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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꼴 좀 봐. 전엔 낚시꾼들을 태우고 나가면 한철 내내 하루에 37달러씩 벌었지. 지금은 총알에 맞아 팔을 잃고 배마저 잃었네. 배 값도 안 되는 술을 밀수하다가 그렇게 됐지. 자네한테 말이지만, 그래도 내 자식들 배는 곯게는 못하겠어. 식구들 밥도 못 먹이는 정부의  하수도 공사를 하기는 싫단 말야. 하긴 이제 그 짓도 할 수 없게 됐지만. 누가 그런 법을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사람 굶기는 법은 있을 수 없어.”
―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제3편



세계 대공황은 많은 이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떵떵거리던 기업과 은행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공장과 농장의 가동률이 격감하면서 사람들은 너나없이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이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쫓겨난 실업자들이었다. 4-5년간 이어진 심각한 공황 국면에서 미국에서만도  최소한 2,500만, 전세계적으로 5,000만 명 이상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하나인 헤밍웨이가 대공황기였던 1930년대를 맞은 것은 30대 초반의 팔팔한 청년 때다. 대공황은 언제나 시대에 정면으로 맞닥뜨리면서 그  시대상을 정직하게 포착해내려고 애쓰던 헤밍웨이의 눈을 사회로 돌리게 했다.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이 그의 소설 중 사회성이 가장 짙게 배어 있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이다.

이 소설에서 그는 뱃사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공황과 그에 따른 실업이 성실하게 일하는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파괴해가는지 생생하게 그려낸다.

작품의 배경은 미국 플로리다 반도 남서안의 한 섬에  있는 키웨스트라는 작은 항구도시다. 전형적인 어항이던 이 도시는 멕시코 만을 배경으로 한 수려한 아열대의 풍광과 바다낚시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면서 가진 자들의 휴양지로  변해간다. 게다가 쿠바와 배로 몇 시간 안 걸리는 곳에 있는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각종 밀무역과 폭력이 도시를 물들여간다.

주인공 모건은 작은 배 한 척으로 짐을 실어날라 주거나 청새치를 낚으면서 아내와 세 딸을 먹여살리는 뚝심있는 뱃사람이다. 그러나 부유한 낚시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모건도 그들에게 배를 세내주고 배를 몰아주는 일로 업종을 바꿔 짭짤한 수입을 올린다. 수입이 보장되는 한, 순간에 한몫 잡을 수 있는 밀입국자 수송 같은 유혹도 뿌리칠 수 있을 만큼은 의식도 건강하다.

그러나 키웨스트에도 어김없이 공황의 여파가 밀려온다. 이제 낚시 관광객도 부쩍 줄었다. 공황은 공장이나 사무실의 노동자들만 거리로 내쫓는 것이 아니라 부유층에게 사치와 향락을 서비스하는 사람들의 밥줄까지도 잘라버린다.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사람들일수록 더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와중에서 어렵게 궁합이 맞은 전세 계약자가 3주간의 뱃삯과 자신의 실수로 몽땅 날려버린 어구 값을 떼어먹고 달아나버린 순간, 모건은 범죄에 가담한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 배곯으며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건은 사기꾼의 제의를 받아들여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중국인들을 아무 데나 갖다버린다는 조건으로 그 대가를 받은 뒤, 사기꾼을 죽여버리고 중국인들은 죽지는 않을 곳에다 내려준다.

점점 더 정상적으로 밥먹고 살기가 힘들어진다. 모건은 마침내 술 밀수입에 손을 댄다. 그러나 밀반입되는 술이 워낙 많아 그 짓도 위험만 클 뿐 먹고사는 방편이 되지 못하던 차에, 쿠바 경찰에 총을 맞아 한쪽 팔을 잃고 미국 관리에게 눈치채여 배까지 압류당한다.

이제 정말 앞길이 막막해졌다. 자신과 식구들의 생존조차도 보장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억센 생활력과 의지로 똘똘 뭉친, 헤밍웨이의 주인공, 모건에게 좌절이란 있을 수 없다. 비록 이 꼴이 되고 말았지만, 자식들 배를 곯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건의 원시적인 생명력은 껍데기에 불과한 법을 훨훨 날려버린다. 도대체  증거도 확실치 않은데 남의 소중한 배를 압류해가서 한 식구의 밥줄을 끊어버리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냐? 먹고살 수 있게 일자리를 만들어줄 일이지, 구호사업이라는 구실하에  끼니도 잇지 못할 알량한 돈을 주는 법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법이란 말이냐?

흥청망청대는 사람의 수가 줄었을 뿐, 공황중이라고 있는 놈들의 작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졸부나 관리들의 투전판은 끝이 날 줄 모르고, 호화 요트에서는 여전히 거부나 그 자식들과 나른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유한계급 마담들이 쌍쌍이 배를 맞추어 놀아난다. 골은 비고 배는 부른 유명작가들은 그들과 어울려 방종을 일삼으며 자신의 너절한 경험을 바탕으로 되지도 않는 말들을 엮어낸다. 온거리에 한탕 하려는 사기와 초점 잃은 폭력이 난무한다. 내 주머니를 챙기기 바쁜데 다른 사람의 목숨이나 삶에 대한 배려가 있을 리 없다.

한심한 것은 가진 것 없는 무지랭이들의 운명뿐. 일자리를 잃은 많은 이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먹고살려고 발버둥을 치건만, 개중에는 가만히 앉아 운명을 감수하는 사람도 있다. 도둑질하기보다는 차라리 굶어죽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지가 불같은 모건에게는 못 가진 이들의 운명을 옭아매는 덫도 보인다.
“그 자식들은 이제 자네들을 굶겨 내쫓고 판잣집을 불살라 없애버린 뒤에 아파트를 지어서 유람지로 만들려는 거야. 내가 들은 말인데, 놈들은 지금 자꾸 사들이고 있어. 가난한 사람들이 굶다 못해 딴곳을 찾아 나가면 자기네가 들어와서 아름다운 유람지를 만들겠다는 거지. 가난한 사람들은 딴데 가면 더 굶주리는데.”

궁지에 몰린 모건은 마침내 비장한 결심을 한다. 자기 배를 몰래 빼내서는, 쿠바 인들이  은행털이에 성공하는 즉시 그들을 실어날라 주기로 하는 것이다. 이 일은 목숨까지도 내걸어야 하는 극히 위험한 일이지만, 성공만 한다면 단단히 한몫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는 날에는… 모건은 그답지 않게 무척 갈등한다. 아내와  딸들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리고, 온갖 생각이 어지러이 뇌리를 스친다.

“이대로 여기 앉아 있을까? 그러면 그 판에서 벗어나는 셈이다. 하지만 무엇으로 식구들을 먹여살린담? 메리와 계집애들을 먹여살릴 돈이 어디서 나와? 배도 없고 돈도 없다. 배운 것도 없다. 게다가 팔도 한 짝밖에 없는 놈이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밑천이라고는 오로지 배짱뿐이다… 지금 은행에 가서 밀고를 해버려? 그러면 나한테 무엇이 돌아올까? 고맙다는 인사? 고맙기는 무슨 얼어죽을! 쿠바 놈들은 함부로 총질을 해대어 내 팔을 빼앗더니 미국정부 놈들은 내 배를 뺏었지. 내 생활을 버리고 그깟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들어? 흥, 그 말 갖다가 뭣에다 쓰게. 그건 못해!”

모건은 마침내 결행 쪽으로 마음을 굳힌다. 이윽고 도시를  뒤흔드는 총 소리…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배에 뛰어오르는 쿠바 인들…  일당 5달러에 목숨을 맡긴 친구이자 조수, 앨벗의 죽음… 등판에 차가운 총구를 느끼며 배를 출발시키고… 멀어지는 추격선들… 팽팽한 긴장 속의 평온… 작렬하는 따발총에 쓰러지는 쿠바 인들… 작전 성공… 그러나 목숨이 채 끊기지 않은 한 쿠바 인이 쏜 권총 탄환이 모건의 배에  명중하고… 선실 바닥에 드러누운 모건… 만감이 교차하는 속에 장출혈로 출렁이는 배, 조타수도 없이 멕시코 만류에 휩쓸려 출렁이는 배… 아득해지는 하늘…

모건이 바다 한가운데서 생사를 오가고 있는 순간에도 가진 자, 골빈 자들의 허튼소리와 갖은 짓거리는 계속되고, 모건은 배를 발견한 해안경비원들에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기고 의식을 잃는다.

“혼자 힘으로는 안돼. 이제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메리와 딸들의 간절한 기도도 아랑곳없이 모건은 마침내 숨을  거두고, 서늘한 아열대의 겨울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내일의 삶을 재촉한다…


일할 데가 없는 사회는 근원적으로 인간으로부터 삶을 박탈하는 사회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성경 말씀이나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어느 고승의 백번 지당한 말씀은, 애써 일자리를 찾아도 일할 곳이 없는 이들에게는 그것만큼 이해 못할 말도 없을 것이다. 또, 오늘 당장 끼니를 잇지 못하는 이에게 윤리니 도덕이니 공동선이니 하는 말들처럼 공허한 말도 없을 것이다.

헤밍웨이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실업자가 급증하는 공황기를 배경으로 먹고살기 위해 기를 쓰고 때로는 범죄에도 서슴없이 가담하는 가난한 이들을 그리고 있지만, 실업자는 비단 공황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잠시 그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자본주의하의 실업과 최근의 추세, 실업자들의 삶을 한번 돌아보자.

자본주의 경제하에서 실업은 잘하면 피할 수도 있는 체제의 부작용이 아니라 체제를 지탱하는 중심축 가운데 하나다. 산업예비군, 즉 실업자 없이는 자본주의 경제 자체가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실업자가 있어야만 자본의 적정 이윤을 보장하는 선에서 임금수준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하에서 실업률은 늘 유동한다. 생산활동이 활발한 호황기에는 실업자가 줄고 불황기에는 늘어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고 있다. 호황, 불황에 크게 관계없이 실업률이 마냥 올라가고 반실업자와 자발적 실업자의 수가 크게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는 것이다. 그것을 부추기는 것이 바로 기술혁신과 경영합리화를 동반한 과학기술혁명이다.

과학기술혁명은 많은 종류의 노동을 기계와 로봇, 자동화 시설, 혁신기술로 대체하면서 엄청난 노동자들을 산업현장에서 밀어내고 있다. 물론 정보통신 등 새로운 산업이 계속 생겨나면서 그중 상당 부분을 흡수하고는 있지만, 밀려나는 노동자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한 예로, 지금까지 방출 인구를 가장 많이 수용해온 유통 분야나 서비스 분야에까지 경영합리화의 파고가 미치면서 이제 거꾸로 노동자들을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단, 그 사회적 의미야 어쨌건 오락산업, 향락산업이 크게 팽창하면서 고용문제 해결에 효자 노릇을 하고는 있으나, 그것도 부의 편중이 심화되면서 수요의 창출에 제동이 걸리는 등 무한정 확장되기는 힘든 요인들을 안고 있다.

보도되는 통계수치도 그런 추세를 그대로 보여준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몇 나라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실업률이 꾸준히 상승하여 오늘날 대체로 10% 내외의 실업률을 보이고 있다. 각국 정부는 사회안정을 꾀하기 위해 고용을 늘리고자 애쓰지만, 성공하는 예는 사실상 없다. 성공 사례를 뜯어보면 일시적인 취업자를 정규 취업자로 계상하는 등 취업자의 기준을 바꾸어 발표한 경우일 뿐이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자발적 실업자 등 통계수치에 반영되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한 사실상의 실업률은 10%를 넘어 15%에 이르는 나라가 허다하고, 완전 취업자로 보기 힘든 반실업자까지 포함할 경우 실업률이 30%에 이르는 나라도 많다. 아직까지도 평생 고용이라는 관행이 강하게 남아 있는 일본의 경우가 5% 이하의 낮은 실업률을 보이는 대표적인 나라인데, 최근에 와서는 일본마저도 오랜 불황의 위기를 벗어나고자 탄력적인 고용이나 경영합리화 정책을 채택하는 기업이 부쩍 늘면서 불안이 증폭되고 있다.

개별기업을 돌아보면 그 추세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업의 부를 크게 늘리면서도 노동력은 오히려 줄여가는 과학기술혁명의 한 단면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는 사실상 고용문제 해결능력을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진 자본주의국에서는 해고된 후 얼마 동안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각종 사회보장정책을 실시하여 실업자들을 사회 안에 감싸안고는 있다.

그러나 경기가 조금만 후퇴해도 곧바로 사회보장책의 후퇴가 거론되는 등, 실업자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일들은 한시도 그치지 않는다. 실업수당이나 각종 보조금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을 경우 마땅히 받게 될 임금을 메꿔주지 못함은 물론, 남들처럼 떳떳이 일을 하지 못하는 데 따르는 상실감이나 내일의 생활에 대한 불안감, 인간성에 대한 모욕을 보상해줄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른바 극소전자혁명, 정보통신혁명이 모든 산업에 파급되어 노동력을 급속히 밀어내면서, 실업자의 증가추세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일각의 예측에 따르면, 앞으로 몇십 년 안에 전세계적으로 1차, 2차 산업의 직접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10% 내외로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전망까지도 나오고 있다.

물론 비대해진 3차 산업이 나머지 상당수를 흡수하겠지만, 자본이 이윤을 더 많이 내기 위해 노동력의 절감 노력을 계속하는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로 전락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야기를 바꿔, 그럼 노동시장에서 밀려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 굳이 미래를 내다볼 필요는 없다. 오늘의 추세만 보아도 사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독일을 비롯한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한때 환영을 받으며 들어갔던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제 필요없다고 내쫓김을 당하거나 각종 불이익을 당할 위기에 있다. 각국의 소수자들, 즉 그 나라의 주도세력과 피부색이나 종교, 인종, 민족 따위가 다른 소수세력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차별의 벽을 넘지 못하고, 필요할 때마다 항상 희생양의 구실을 하고 있다. 병들거나 다친 이, 못 배우고 힘 약한 이, 자신의 하루하루 노동력 외에는 진짜 아무것도 기댈 데가 없는 이들이 이미 사활을 건 생존경쟁에서 속속 밀려나 실업자 또는 반실업자로 전락해간다. 세계 규모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강국들의 정책에 희생된 약소국의 숱한 국민들이 심각한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요컨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부터 차례로 노동시장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이가 빠지면 잇몸이 시린 법. 지금은 안전하다고 여길지 모르는 내가 언제 그들 속에 끼게 될는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여기에서 헤밍웨이의 주인공들의 원시적인 생명력과 결부시켜,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이들의 생존 방식을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 사회적 의미는 갈수록 더 커질 게 틀림없고, 공황이 본격화될 경우 그 파장은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생업을 잃은 사람들 중에는 정말 낙담하여 구호금 같은 것에 목매단 채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기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려고 발버둥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헤밍웨이의 주인공 모건처럼 구차한 삶을 거부한 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 전선에 나서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말 그대로 지상명령인 생존을 위해 수백만의 '모건’이 나오고 수천만의 ‘마피아’나 ‘지존파’가 나오고 수억의 ‘장발장’이 나올지도 모르며, 아니면 정말 끔찍한 일이지만 혼자 죽기는 억울하다고 지하철이나 백화점에다 독가스를 살포하는 사건이 빈발할지도 모른다. 그때 어느 누가 용감히 나서서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어느 누가 이미 의미를 상실한 정의니 법이니를 앞세워 그 많은 이들을 다 쓸어버릴 것인가?

관건은 어떻게 그런 사태를 피해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문제해결의 출발선은 모든 인간은 신성하게 태어났고, 누구에게나 일을 하고 자신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일할 데가 없는 사회는 근원적으로 인간으로부터 삶을 박탈하는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