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는 듯한 여름, 답답한 날들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시장 붕괴의 여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상전벽해란 말이 무색할 만큼 한때 잘 나가던 공장들이 속속 문을 닫았고, 나라마다 식량자급과 내수충족을 위한 생산을 늘리느라 아우성들이다. 달러화의 폭락이 세계금융시장에 일대 혼란을 불러오면서 그렇잖아도 휘청거리던 세계무역에 치명타를 가하더니, 국제사회가 연일 머리를 맞댄 끝에 이제야 겨우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다. 국가간 결제통화로는 이제 달러보다 유로와 위안화가 더 강세다. 핵전쟁의 고비는 겨우 넘겼지만, 지금도 중동과 중앙아시아, 아프리카와 남미에서는 총성이 끊일 날이 없다. 세계의 경찰 행세를 하던 미군의 위상이 급격히 추락하면서 국지전이 더 빈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
6. 진상규명, 그 멀고도 험한 길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은 학살 당시부터 일어났다. 1951년 2월 거창 신원면 일대에서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주민 719명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그해 3월,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이 국회 본회의에서 거창 학살을 폭로했다. 이에 국방장관 신성모는 사실을 부인하고 통비분자 187명이 죽은 것으로 사건을 조작했으나 내무, 법무장관이 사실을 부분 시인하면서 국회에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현지 시찰에 나섰다. 그러나 현지에 내려간 국회와 정부(내무, 법무, 국방) 합동조사단은 가해 군인들의 집요한 방해를 받던 중 당시 경남지역 계엄사 민사부장 김종원이 신성모 국방과 모의하여 짜낸 무장공비 위장 습격 계략에 말려 그만 철수하고 만다. 이후 가해..
금정굴사건 진상규명운동이 시동을 건 지 어언 16년 여, 그 발동주체였던 고양시민회의 창립 21주년을 맞아 운동의 역사와 현황, 과제들을 정리해본다. 1. 금정굴학살 규명운동과 고양시민회 고양시민회가 금정굴과 연을 맺은 것은 1993년이다. 당시 금정굴사건을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있던 김양원 씨가 93년에 시민회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여름 시민회에서 금정굴사건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정하면서 금정굴학살이 역사와 사회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시민회는 당시 고양지역의 4개 민주단체들과 공동으로 금정굴사건진실규명위원회를 꾸려 금정굴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작업에 나섰고, 그와 동시에 당시 김양원 회장이 파악하고 있던 유족들을 중심으로 유족회가 꾸려져 공동활동을 하게 된다. 1993년 9월 25일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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