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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 듯한 여름, 답답한 날들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시장 붕괴의 여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상전벽해란 말이 무색할 만큼 한때 잘 나가던 공장들이 속속 문을 닫았고, 나라마다 식량자급과 내수충족을 위한 생산을 늘리느라 아우성들이다. 달러화의 폭락이 세계금융시장에 일대 혼란을 불러오면서 그렇잖아도 휘청거리던 세계무역에 치명타를 가하더니, 국제사회가 연일 머리를 맞댄 끝에 이제야 겨우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다. 국가간 결제통화로는 이제 달러보다 유로와 위안화가 더 강세다. 핵전쟁의 고비는 겨우 넘겼지만, 지금도 중동과 중앙아시아, 아프리카와 남미에서는 총성이 끊일 날이 없다. 세계의 경찰 행세를 하던 미군의 위상이 급격히 추락하면서 국지전이 더 빈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반도가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핵전쟁 위기로까지 치닫던 북미간, 남북간 대립의 예봉이 꺾이면서 남북 경협이 이제 전보다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에 몽땅 들어 먹히나 싶던 북의 귀중한 자원 개발에 남의 참여가 더 활발해지고 있고, 개성에 이어 사리원과 남포에도 남북 합작공단이 들어섰다. 막혔던 경의선이 다시 뚫리고 경원선까지 개통되면서 만주와 시베리아는 물론 한 일주일 고생할 작심만 한다면 유럽까지도 기차를 타고 갈 수 있게 되었다.

수출길이 막히며 고전하던 한국경제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내수 산업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한때 40%에 달하던 수출의존도는 30%대로 떨어졌고, 반대로 식량 자급률은 20%대에서 40%대로 높아졌다. 2010년 융단폭격을 맞으며 쓰러졌던 은행들에 대규모의 공적 자금이 투입되면서 일부는 지금까지도 사실상 국영 체제로 운영되고 있고, 일부는 완전히 외국자본에 넘어갔다. 산업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 수출 주력업종이던 반도체와 조선, 자동차, 그리고 건설, 금융산업의 비중이 줄어드는 대신에 식품산업과 문화산업, 농축산업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이 모든 변화의 뿌리는 2010년의 시민항쟁과 지방선거였다. 2008년 촛불집회를 무참하게 짓밟은 후 2009년 초 극심한 경제위기 속에도 국민 다수의 여론을 무시하고 부자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시대착오적 경제정책과 공안정책들을 밀어붙이던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2009년의 거듭된 국회 날치기와 국민 여론을 무시한 개각과 정책 집행으로 다시 한 번 커다란 역풍을 맞았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그해 4월과 10월 재보선에서 연달아 참패한 뒤에도 오히려 독단적인 정책들과 4대강 사업 등 대규모 건설사업을 강행하려다 대대적인 국민 저항에 부딪쳤다.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에 늘어난 실업자, 일자리를 잡을 희망마저 상실한 백수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면서 이명박 정부는 집권 2년차에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한때 경찰력이 1980년대 이상으로 포악을 떨면서 대치 국면이 전개됐으나 줄곧 낮은 수준에 머무르던 국정 지지율이 정부의 운신 폭을 제약했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국민들의 국정대전환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은 채 박근혜 전총재에게 손을 내밀며 범보수 내각과 정부를 꾸리고 국민들의 개혁 요구 일부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한나라당에 덫이 돼버렸다. 한번 떠난 민심은 돌아올 줄을 몰랐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영남권에서조차 참패를 당하는 대파국을 맞으며 사실상 자멸해버렸다. 2010년 말 결국 거국내각이 들어서며 국민들의 개혁 요구가 대폭 수용되었고, 2011년 내수증진과 복지강화, 남북협력을 골자로 하는 국정의 대전환이 이루어졌다. 한나라당은 사실상 해체되어 몇 개의 분파로 갈라졌으며, 우여곡절 끝에 2012년 민주연립정부가 발족했다.

문제는 경제였다.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공황은 7년이 가도록 아직까지도 수렁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채 계속 허우적거리고 있다. 수출의존도가 매우 높고 외채규모가 크던 한국경제는 치명상을 입었다. 뒤늦게나마 내수증진과 서민복지강화를 위한 긴급 수혈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계속되는 외환위기와 재정위기 속에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수단도 그리 많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한 많은 이들이 속속 농촌으로 귀향했고, 삶이 팍팍해진 서민들은 수십년 만에 가내수공업을 부활시켜 의식주의 상당 부분을 제 손으로 해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3년 전이던 2012년까지 2007년의 절반 수준으로 급락했고, 그 이듬해에 이르러서야 겨우 회복 추세로 돌아섰다. 한때 선진국 운운하던 한국은 다시 개발도상국으로 전락했다.

그런 와중에 소득 격차가 두 배 이상 더 벌어지면서, 기본 의식주의 해결을 요구하는 생계형 시위가 하루도 끊일 날이 없다. 납북협력이 이루어지면서 장기 사업이 착착 추진되고 있긴 하지만, 당장 목구멍에 풀칠하기 힘든 서민들에게 그 효과가 와 닿기까지는 아직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 같다. 소득 격차의 확대가 심각한 국민 분열을 몰고 와 범죄와 테러가 급증한 반면에, 많은 예술가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면서 돈과 무관한 거리의 문화는 날로 번창하고 있고, 더 많은 민주주의와 사회적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날로 커지고 있다. 세는 비록 많이 약해졌지만, 한동안 극성을 부리던 극우집단의 난동사태도 심심찮게 지면을 장식한다.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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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한 마음으로 오늘도 탄현동에 있는 고양평화공원을 찾았다. 올 들어 벌써 일곱 번째 길이다. 되도록 자연을 그대로 살리며 그 자체로 평화를 느낄 수 있게 만든다는 대원칙을 고수했음에도, 작년까지는 아무래도 이것저것 정비하고 손보느라 구석구석이 공사장 같은 분위기였지만, 올봄부터는 완연하게 달라졌다. 해서 마음이 착잡할 때면 이곳을 찾곤 하는데, 이곳은 결코 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한두 시간 이곳을 거닐다 보면, 들어설 때의 답답함과 심란함이 어느새 눈 녹듯 풀어지고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그동안 잊고 있던 것, 소홀히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 공간을 나설 때의 나는 한동안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과욕과 집착에서 벗어나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며 새로운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여느 때처럼 오늘도 나를 처음 맞는 것은 공원 입구의 표지석이다. 이 공간에는 안과 밖을 가르는 문도 없고, 철책은커녕 목책도 없다. 이곳이 고양평화공원 입구임을 알리는 둥그런 표지석 하나가 전부다. 적막하리만큼 나무와 숲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공원길을 따라 2, 3분 걷다 보면, 길이 오른쪽으로 꺾이며 오붓한 잔디광장과 자그마한 단층 건물 두 동이 눈앞에 나타난다. 하나는 평화박물관이고 하나는 역사교육관인데, 두 건물은 쌍둥이처럼 이어져 있어 조금 멀리서 보면 길쭉한 하나의 건물로 보인다. 건물의 외양도 모난 모양이 아니고 원형과 마름모꼴을 기본으로 하고 벽면에 평화의 상징물들을 몇 가지 새기고 장식한 편안한 모양이다.

박물관 문을 밀고 들어서니 널따란 거실형 사랑방 한 구석에서 낯익은 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이내 하던 일로 눈길을 돌린다. 자주 찾는 이에게는 별도의 안내를 하지 않는 것이 이곳의 관행이다. 방문객이 각자 필요한 만큼 알아서 느끼고 챙겨가면 그만인 것이다. 사랑방은 한 30명은 족히 둘러앉아 방담을 나눌 수 있는 비교적 큰 공간으로서, 벽면과 공간 곳곳에는 전쟁과 평화에 관한 일반적인 사진과 자료, 조형물들이 아기자기하게 전시돼 있다.

사랑방의 안쪽 공간은 다시 네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세계관과 한국관, 경기관, 고양관이다. 각각의 공간에는 각기 그 범주에서 일어난 주요한 전쟁(현대전 중심)과 그 피해, 영향, 그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의 실상들을 알리는 사진과 설명, 각종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방문객이 많을 경우에는 이 공간 하나하나가 또 다른 사랑방으로도 쓰일 수 있도록 배치돼 있다. 이곳에 특별히 경기관 등이 들어앉은 것은 고양시 금정굴 현장과 그 일대가 도립평화공원으로 지정된 까닭이다.

평화박물관이 비교적 편안한 곳이라면, 역사교육관은 불편한 곳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섬뜩한 곳일 수도 있다. 이 공간은 크게 체험관, 영상실, 교육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의 관심과 수준에 맞게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체험하고 느낄 수 있게 돼 있다. 올해 들어서 고양시내 각급 학교들과 기관, 단체들에서 단체 관람을 하면서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곳이다. 기절초풍할 뻔했다는 둥, 인간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는 둥, 역사의 무게감을 느꼈다는 둥 반응들이 천차만별인데, 자세한 내용은 상상에 맡긴다.

교육관을 나서서 다시 숲이 무성할 뿐 여느 공원이나 다를 바 없는 가벼운 오르막길을 4, 5분 걸어올라가다 보면, 원형과 삼각형을 기본 토대로 삼고 그곳에 다양한 인간의 모습들을 새긴 나지막한 조형물 하나가 나타난다. 고양금정굴학살 희생자 위령탑이다. 그리고 바로 그 위편으로 고양금정굴 희생자 합동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1995년 유족들의 힘으로 자체 발굴한 금정굴 희생자 유해가 무려 18년 동안이나 서울대 의대 창고에 방치돼 있다가 2년 전에야 비로소 영원한 안식처를 찾은 곳이다. 국가가 그 책임을 인정하고 그 최소한의 책무를 다하기까지 실로 길고도 모진 역정의 연속이었다.

재작년 여름 바스라지기 직전의 유해들을 서울대에서 이곳으로 모셔올 때의 그 착잡함과 감격이란 이루 형언하기 힘들다. 우리 서병규 회장님은 끝내 격정을 이기지 못해 실신했고, 마총무님과 이간사님, 그리고 여러 유족들의 환한 표정, 이제야 못난 후손들이 최소한의 도리를 다했다는 그 안도와 회한과 뿌듯함이 교차하던 표정들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위령탑 한켠의 묘석에는 이곳 금정굴 희생자들만이 아니라 고양시 전체의 희생자들이 함께 새겨져 있고, 딱히 갈 곳을 찾지 못한 경기도 내 다른 희생자들의 이름도 함께 모셔져 있다. 합동묘역에도 차후의 필요에 대비하여 빈 공간을 남겨두었다.

위령탑 앞에는 참배객들과 각종 행사를 위한 평화의 광장이 조성돼 있고, 그 옆으로는 평화의 정원이 조성돼 있다. 평화의 정원에는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하며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는 많은 작가들이 정성을 모아준 다양한 작품들, 조각과 그림과 시와 노래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찾는 이들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이곳이 평화공원의 끝은 아니다. 여기서부터 금정굴 학살 현장까지 도보 7-8분 거리의 공간이야말로 평화공원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곳이다. 이 공간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숲을 그대로 보존한 채 평화를 상징하는 나무를 몇 그루 식재한 평화의 숲으로서, 그 숲을 따라 두 갈래로 길이 나 있다. 하나는 학살체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의 길이다. 학살체험 길을 따라 올라갔다가 평화의 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 공원 기획자의 본래 의도다. 학살체험 길에는 당시 학살지로 끌려올라가던 이들의 모습과 그와 연관된 자료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당시의 상황을 추체험할 수 있게 하고 있고, 평화의 길에서는 우리가 앞으로 가꾸어갈 세상에 대한 꿈을 다양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산등성이에 올라서면 65년 전 수많은 고양사람들이 인민군에게 부역을 한 것 같다는 혐의만으로, 혹은 그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경찰과 우익단체들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간 그 통한의 현장, 금정굴이 있다. 길이 15미터 가량의 수직굴은 이제 정비되어 순례객들이 당시의 현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고, 수직굴 머리 위에는 평화의 종이 설치돼 있다. 평화의 종은 해마다 열리는 위령제 때 열두 번씩 울리며, 먼 곳에서 귀한 순례객이 찾아왔을 때 특별 타종 의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금정굴 현장은 평화의 벽으로 둘러쳐, 한쪽에는 당시 학살의 끔찍한 현장을 부조로 새겨놓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평화를 염원하는 인류의 소망을 양각으로 새겨놓고 있다.

지금은 평화공원의 주 진입로를 남쪽 방면으로 새로 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정굴 현장의 진입로는 동쪽의 중산마을 끝 고봉산주유소 방향이었다. 비록 주 진입로는 아니지만 지금도 그쪽을 통해 금정굴 현장을 찾거나 능선을 따라 산책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쪽 방향으로도 작은 산책로를 하나 냈고, 원래는 붙어 있었으나 고봉로가 갈라놓고 있는 이쪽 능선과 고봉산 능선 사이에 조촐한 생태다리 하나를 놓아 평화의 다리라 명명했다. 개발이 갈라놓은 간극을 평화공원이 다시 이어놓은 것이다.

공원에 숲이 많아 바깥세상보다는 훨씬 서늘한 편이지만 그래도 20분 가까이 걷다보니 등판에 땀이 차고 목덜미에 땀이 배는데, 새삼스럽게 금정굴 현장을 둘러보고 있노라니 더위가 씻은 듯이 날아가버린다. 학살 당시에 대한 상상이 몸을 오싹하게 만드는 효과도 물론 작지 않겠지만, 물리적으로도 이곳은 명당자리다.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이곳에 올랐다가도 한 3, 4분만 지나면 능선을 넘는 바람에 가슴팍까지 시원함을 느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명당지에서 그런 악독한 짓을 하다니, 천벌을 받을 놈들! 하지만 하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민심이 천심이라 했으니, 이제 우리의 뜻을 어느 방향으로 모아가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늘 그렇듯이 내려가는 길은 항상 가볍다. 누구 말마따나 귀신 모시는 사람 다 됐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십수 년을 훌쩍 넘겼으니, 이제 이골이 나다 못해 영령들한테 영기를 전달받는 경지에 이르렀나 보다. 어서 가서 아직도 그 모진 마음을 품고 사는 인간들 정화시키고, 오늘도 다시 새 밭을 갈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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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편안해지니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1993년 김양원 선배를 따라 이곳을 처음 찾던 때, 이곳은 지금의 중산마을이 아직 제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고 있던 봉일천 가는 길의 한적한 곳이었다. 43년 묻혀 있던 천추의 한을 세상에 널리 알리자며, 우리는 이곳 사람들이 ‘금정구뎅이’혹은 ‘금구뎅이’라 부르던 곳을 ‘금정굴’로 명명하고 제1회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올리며 그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심히 뛰던 김선배와 유족들의 가슴만 타들어갈 뿐, 세상은 요지부동이었다.

1995년 세상의 무관심에 절망하고 거기서 유골이 하나라도 나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모진 마음에 분노하며 - 그 인간은 아직도 멀쩡한 손가락으로 고양바닥에서 갖은 거드름 다 피우며 산다 - 십시일반 힘을 보태 현장을 발굴하고 유해가 온 산을 뒤덮어 한국판 ‘킬링필드’를 선보였을 때, 그 참담한 모습을 보고도 설마 외면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설마는 현실이 되었고 더 처절한 외면이 더 길게 이어졌다. 49일간 온 산을 덮고 있던 유해는 고양경찰서와 국회 앞을 거쳐 서울대로 갔고,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중앙정부와 국회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양시, 고양시 출신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의 태도는 한 동네에서 하늘을 함께 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1999년 나진택 도의원과 강인규 등의 노력으로 경기도의회에서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려 조사를 한 뒤 금정굴 학살을 경찰 주도하의 불법학살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제야 든든한 반석 하나 확보했구나 하는 안도감도 잠시뿐, 2000년 3월 고양시의 태도는 절망 그 자체였다. 그때 고양시를 뒤엎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2001년 전국 차원의 통합특별법 제정운동이 시작되면서 해마다 겨울철이면 연례행사처럼 국회 앞 농성이 이어졌다. 유족분들, 노구를 이끌고 고생 정말 많이 하셨다. 2002년에는 고양시의회에서도 시의원 31명 중 22명의 발의로 위령사업촉구결의안이 제출되며 위령사업의 물꼬가 터지나보다 했으나, 웬걸 12명씩이나 외압에 굴복하여 고무신을 거꾸로 신으면서 결의안이 부결되는 참담함을 맛보았다. 2003년 금정굴공대위에서는 제1회 고양파주지역민간인학살 심포지엄을 열고 새롭게 전열을 정비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4년 민간인학살규명 통합특별법이 통합과거사법으로 국회에 제출되었고, 다시 우여곡절 끝에 일부 조항이 누더기가 된 채로 2005년 5월 과거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날, 유족들은 그나마에도 감격해하며 펑펑 울었다. 2005년 12월 진실화해위가 발족했고, 2006년 금정굴사건 조사가 시작된 후 2007년 6월 금정굴사건의 진실이 밝혀졌다. 이어서 12월에는 고양지역 다른 5개 사건의 진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진실화해위는 금정굴사건을 경찰 책임하의 불법처형으로 규정하면서, 국가의 사과와 피해자 명예회복, 위령사업 시행, 역사관과 평화공원 건립, 기록 정정과 교육, 법령정비 등을 권고했다.

한편, 금정굴 현장은 1994년 유족회에서 철제 안내판 두 개를 세운 뒤, 1995년 발굴 후 계속 위험한 상태로 방치되었다. 고양시에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도 거부했다. 진상규명도, 유해안치도, 위령사업도, 피해회복도 모두 국가의 책임임을 분명히 한 유족회와 대책위에서는 정부와 지자체의 책임과 역할을 계속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순례객들을 위해,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스스로의 힘으로 힘닿는 대로 학살 현장을 평화의 현장으로 가꾸어가기로 방침을 세웠다. 그러고는 해마다 하나씩 소박한 조형물을 현장에 놓아가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나무조각가 이락진 선생의 장승 작품을 입구와 현장에 하나씩 세웠고, 2002년에는 ‘산 자들이여, 우리를 기억하라’는 영령들의 절규를 담은 신목(이락진 작)을 현장에 세웠다. 2003년에는 문경유족회장 채의진 선생의 도움으로 솟대를 현장 주변에 심었고, 2004년에는 푯말 두 개를, 2005년에는 ‘통한의 금정굴을 평화의 공원으로’라는 글귀를 새긴 커다란 표목(채의진, 이락진 작)을 입구에 세웠다. 두 분 선생과 그 무거운 물건들을 산등성이까지 몸으로 지고 날라와 심고 이제 벌써 20회도 넘게 치른 매해 위령제와 각종 행사 때마다 온갖 궂은 일 도맡아 해온 대책위 소속단체 회원들의 노고는 20여 년을 한결같이 싸워온 유족들의 끈질긴 투쟁과 함께 청사에 영원히 기록돼야 할 것이다.

한편 공대위와 유족들은 고양시에 끈질기게 요구하고 당시 시의원들의 협조를 얻어 2004년 고양시 예산을 확보한 후,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의 시굴로 2005년 금정굴 현장의 발굴마무리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유해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현장은 다시 천막만 한 꺼풀 덧씌워진 채 방치되었으며, 안전시설비로 확보한 예산조차도 토지주인 권씨 문중의 부동의와 고양시의 미온적인 태도로 집행을 하지 못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2007년 국가의 진실규명과 책임인정 이후에도 진실화해위의 권고사항을 포함한 각종 후속조치들이 계속 미루어졌다는 것이다. 2008년 9월 위령제에서 일산서장이 경찰청장의 유감애도표명 추도사를 대독했을 뿐, 시급한 유해안치를 포함한 각종 후속조치들이 대책 없이 마냥 뒤로 미루어진 것이다. 이는 ‘정의의 지연은 불의’라는 법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피해자와 유족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국가의 명백한 직무유기로서 피해자와 유족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행위였다. 진실과 정의가 말 그대로 땅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이런 어처구없는 현실을 단번에 역전시킨 것이 바로 서두에서 말한 2010년 시민항쟁과 지방선거였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2010년 지방선거 참패 후 거국내각을 구성하면서 국민들의 요구를 전폭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과거사 관련 조사와 후속조치에서도 구체적인 방침이 천명되었다. 국회에서도 2010년 말, 국가공권력 피해회복법과 인권평화재단설립법이 만들어지면서 진실규명 이후 후속조치를 적극 추진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지방 차원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중도-진보대연합의 승리로 사상 처음으로 고양시에 진보 성향의 시집행부와 시의회가 들어서면서, 2010년 말 고양평화공원 설립안이 채택되었다.
 
고양시에서는 2011년 발 빠르게 예비조사를 실시한 후 중앙정부와 경기도에 적극적인 의견개진을 하며 금정굴 유해안치와 평화공원 조성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2011년 말 고양평화공원이 경기도립평화공원으로 지정되면서 2012년부터 3개년에 걸친 고양평화공원 건립예산이 국비와 도비에 반영되었고, 고양시에서는 탄현근린공원 부지 중 동측 4만 평을 평화공원 부지로 지정했다. 2011년 말 민간 전문가와 관계자가 중심이 되고 중앙정부와 도, 시의 관계자가 함께 참여하는 고양평화공원 건립위원회가 구성되면서 평화공원 조성사업이 본궤도에 올랐다. 그리고 2013년 유족들의 숙원사업이던 유해안치가 이루어졌고, 2014년 말 공원조성사업이 1차 마무리되었으며, 2015년 현재 박물관과 교육관의 내용물 보강 작업도 거의 마무리됐다. 끔찍한 대학살이 있은 지 무려 65년 만에 전쟁과 학살의 땅을 인권과 평화의 땅으로 만들어가는 대역사의 초석이 놓인 것이다.

갈수록 흉흉해지는 민심 동향과 세계정세를 감안할 때 우리가 소중하게 확보해낸 이 공간의 의미는 더욱 커질 게 틀림없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은 결코 전쟁이나 무한경쟁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고, 평화와 공존과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함한 세상일수록 앞을 내다보며 꿈을 꾸어야 한다. 모두가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2009년 만추에 2010년, 2011년, 2012년, 진실과 정의와 평화가 계속 승리하는 날들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