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내 생전에 이 얘기를 하고 죽을 날이 올까 생각했다.” “가슴 깊이 파묻어 애써 갈무리해둔 이 아픈 상처를 다시 도지게 했으니, 치료비 내놓고 가라.” “세상이 본시 그런 세상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우리 같은 농투성이 인생은 예나 제나 늘 그 모양 그 꼴이지 뭘.” “이 한 많은 인생, 누가 되돌려줘? 누가 해결해준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문제에 한 발짝이라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귀가 닳도록 들은 말들이다. 절망, 상흔, 통한, 체념, 냉소, 원망이 뼛속 깊은 곳에서 배어나오는 이런 말들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전율도, 분노도,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세상은 으레 그러했고, 또 언젠가는 이런 상태가 역전되어, 아니 교정이라도 되어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번번이 좌절돼..
5. 학살 이후 - 학살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반백년 이어진 극우반공체제하에서 전쟁 전이든 중이든 후든 학살당한 이들의 대부분은 ‘빨갱이’가 되었고 그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 되었으며, 학살 사실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은 ‘불순분자’가 되었다. 그야말로 ‘멸균실’ 수준의 순수한 극우반공체제하에서는 중립도 상식도 통할 수 없었고, 민주니 인권이니 평화니 통일이니 하는 것들에도 색안경이 씌워졌다. 대학살의 그늘은 실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짙었다. 학살에 책임있는 사람들 중 다수가 우리 정부와 미국, 그리고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이니, 그 정황이 어땠을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이유도 없이 개처럼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유족들은 억울한 죽음..
1. 죽이는 이야기 전쟁 때 한반도에서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만행’이 저질러졌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온 산하가 피로 철철 넘치게.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단지 우리 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아니 우리 편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것을 ‘학살’이라고 부른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학살을 ‘아무런 위협이 없는데도 그저 좌익, 우익, 부역자 등 집합체의 성원이라는 이유 또는 혐의만으로 무고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반백년 전 우리 대한민국은 온갖 유형의 ‘학살’의 전시장이요 백화점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죽었느냐고? 남한에서만 무려 100만 명에 달한다. 이는 전투로 인한 군인, 민간인 희생자를 제외하고 순전히 ‘학살’당한 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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