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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내 생전에 이 얘기를 하고 죽을 날이 올까 생각했다.”
“가슴 깊이 파묻어 애써 갈무리해둔 이 아픈 상처를 다시 도지게 했으니, 치료비 내놓고 가라.”
“세상이 본시 그런 세상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우리 같은 농투성이 인생은 예나 제나 늘 그 모양 그 꼴이지 뭘.”
“이 한 많은 인생, 누가 되돌려줘? 누가 해결해준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문제에 한 발짝이라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귀가 닳도록 들은 말들이다. 절망, 상흔, 통한, 체념, 냉소, 원망이 뼛속 깊은 곳에서 배어나오는 이런 말들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전율도, 분노도,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세상은 으레 그러했고, 또 언젠가는 이런 상태가 역전되어, 아니 교정이라도 되어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번번이 좌절돼왔으므로.

우리 대한민국의 지난 반세기는 침묵과 망각의 세월이었다. 방관과 유기의 세월이었다. 어떤 미사여구로도, 어떤 상황 논리로도 그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100만의 목숨을, 100만의 우주를 잠깐 사이에 정당한 이유 없이 허공에 날려버리고도 말이 없는 사회와 나라가 무슨 인간사회고 무슨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짐승들의 세계지.

끈질긴 투쟁 끝에 다행히도 몇 년 전에 국가 차원의 진실위원회가 만들어져 진상규명에 나섰고, 개별 사건들의 진실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는 있지만, 그 조건도, 권한도, 예산도, 인력도 턱없이 부족한 판에 그 최종 결과가 어찌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게다가 과거사 진실규명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현 정부 들어 모든 조건이 후퇴하고 있고 진실규명된 사건에 대한 후속조치는 이루어질 기미조차 전혀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왜 그랬을까? 그 많은 사람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죽어가고, 그 후손과 이웃들이 입을 다물고, 그 여파로 크고 작은 학살과 인권유린이 계속 뒤를 잇고, 위정자가 진실을 덮으려 하면서 사실은 망각되고, 거기에 새로운 요인들이 중첩되면서 온갖 헛소리로 진실이 호도되는 이런 사태가 왜 벌어졌고 또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길래?

힘들어도, 괴로워도 우린 그 길을 추적해가야만 한다. 그 길을 피해가며 떠드는 인권이니 평화니 민주주의니 참세상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헛소리다.

1945년 해방 이후 5년간은 대한민국, 아니 남북한 국민국가의 성립기였다(이하 우리의 정보가 제약되어 양극단의 논리가 좌충우돌하는 북쪽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그리고 이후 3년간의 전쟁을 거치며 대한민국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맹목적인 반공국가로 우뚝 섰고, 국민들은 그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왔다. 통일은커녕 인권은커녕 평화는커녕 상식조차도 설 자리가 없었다.

그 한복판에 전쟁이 있고, 또 그 한복판에 전투원도 아니고 전투의 불가피한 희생자도 아닌 100만 민간인의 불법학살이 있다. 100만 민간인학살은 우리 대한민국 탄생의 기초이자 그 비밀의 열쇠다. 그 비밀의 상자를 열어야 한다. 이 상자를 열지 않고서 새로운 대한민국의 꿈을 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추론이나 관념이나 이념이 아니라 철저한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사실로 하여금 온갖 허위의식과 추론과 관념을 몰아내고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오늘의 의미와 과제를 생각하는 일은 조금 미루어도 좋다. 그 결과에 대한 불안감과 노파심은 잠시 거두어도 좋다. 인간들의 세계는 살아 있는 유기체여서 더 잘 살고 더 커지고 더 좋아지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추슬러갈 터이므로. 전쟁에서 이를 취하고 뒤집힌 세상에서 득을 보는 극소수의 인간이 아니라면 결코 손해 볼 일이 없을 터이므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하여금 말하게 하자.



2. 그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은 이제 걸음마 단계다. 4.3이 부분적으로 밝혀지고, 거창 신원면 희생자들에게 명예회복 조치가 취해지고, 노근리 사건이 널리 알려지고, 2006년부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전쟁기 민간인학살에 대한 종합적인 진상규명작업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코가 성긴 그물에 건져진 사실의 조각들을 갖고서 조각맞추기를 해보자. 완전함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그래도 윤곽은 잡힌다.

자, 대한민국의 지명을 얼마나 아는지 시험해볼까?

화순, 대구, 제주, 여수, 순천, 구례, 광양, 보성, 고흥, 산청, 거제, 문경, 임실, 남원, 광주...

이곳들의 공통점은? 6.25 이전에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일어났던 곳들이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학살들로 전쟁 이전에 이미 약 10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 구실이 반란 진압(4.3, 여순)과 빨치산 토벌, 그리고 통비분자와 부역자 처단에 있었고 토벌전이 인근 지역의 초토화 작전을 방불케 했던만큼, 제주와 여순 지역은 물론 당시 빨치산이 활약했던 지리산 중심의 소백과 노령산맥 일대의 산간 지역에는 예외가 없었을 거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전쟁 이전에 ‘작은 전쟁’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이미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시작되었다.

수원, 인천, 시흥, 평택, 여주, 이천, 안성, 음성, 진천, 청원, 보은, 옥천, 영동, 괴산, 서산, 예산, 당진, 공주, 부여, 대전, 익산, 군산, 정읍, 나주, 진도, 해남, 여수, 문경, 예천, 칠곡, 울진, 영덕, 영천, 포항, 경주, 경산, 군위, 대구, 청도, 상주, 김천, 밀양, 양산, 울산, 부산, 김해, 함안, 마산, 통영, 거제, 진주, 사천, 하동, 남해, 거창, 함양, 제주...

공통점은? 국민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예비검속자 학살지들이다. 전쟁이 나자마자 정부에서는 ‘요시찰인’검속령을 거듭 내렸고, 그에 따라 ‘자수’하거나 회유당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과 이전에 좌익계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졸지에 잡혀 들어와 불귀의 객이 되었다. 최초 보고가 나오는 6월 말 당시 전선이 한강 바로 아래에 있었으므로 한강 이남의 보도연맹원 대다수가 처형당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참고로, 천안의 경우 경찰서장의 특별 배려로 다른 지역과 달리 희생자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는 것을 극찬하고 있는데, 이를 역으로 생각해보면 당시 보도연맹원 학살이 얼마나 광범하게 자행됐는지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전국의 거의 모든 시군에서 학살 사실이 계속 확인되고 있다. 피학살자의 수는 전국의 보도연맹원 약 35만 중 한강 이남의 30만 명과 기타 예비검속자의 절반이라고 가정하면 15-20만 명이다. 학살 이유는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어떠한 법적 조치도 밟지 않았다.

인천, 수원, 공주, 대전, 청주, 원주, 전주, 광주, 목포, 대구, 김천, 부산, 마산, 진주...

공통점은? 전쟁 발발 당시 형무소가 있던 곳들이다. 당시 전국의 형무소에는 3-4만의 기결수와 그에 버금가는 수의 미결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 약 80%가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 이른바 좌익사범이었고, 나머지는 일반범과 잡범이었다. 이들 역시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거의 전원 불법 처형되었다.

수원, 용인, 천안, 서산, 서천, 영동, 단양, 익산, 예천, 고령, 구미, 칠곡, 포항, 진주, 마산, 사천, 의령, 함안, 창녕, 독도...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다수의 피해자가 난 곳들이다. 7월 초 전쟁에 개입한 미군은 피난민, 주민 가릴 것 없이 전투에 걸림돌이 되는 한국인은 모조리 쓸어버리다시피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투 명령에 ‘흰옷 입은 자는 적으로 간주하라’는 말이 버젓이 나올 정도로, 인종차별적 시각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나 기총소사로 피해자가 나지 않은 지역은 전국에 한 곳도 없고 개인 또는 소수의 피해자는 집계조차도 불가능하여 피해자 수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대략 10만 이상으로 추산된다.

고양, 파주, 강화, 인천, 김포, 포천, 양주, 남양주, 군포, 여주, 속초, 양양, 아산, 군산, 완도, 안동, 상주, 영양, 영덕, 울진...

유엔군과 국군이 실지를 탈환하면서 군경, 우익단체가 부역 혐의자를 집단으로 불법 학살한 곳들이다. 전선이 이동하면서 시차는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부역 혐의자 집단처형이 본격화된 것은 9.28 서울 수복 직후 이승만 정부의 부역자 색출령이 발동된 후다. 색출령은 현지에서는 사실상 색출 처단 허가증이 되어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학살이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좌익에 의해 우익 희생자가 다수 발생한 곳에서는 보복의 성격이 가미되어 그 규모와 잔학상이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부역 혐의자 처형 역시 전국적인 현상인데, 극우반공체제하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지역에 공생해온 탓에 표면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 수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최소 10만 이상으로 추산된다.

고창, 정읍, 순창, 임실, 남원, 함평, 나주, 담양, 장성, 화순, 구례, 거창, 산청, 함양...

미군의 9.15 인천상륙 후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소백과 노령산맥 일대(제2전선)에서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이름하에 다수의 민간인 피해자를 낸 곳들이다. 전쟁 발발 이전의 양상이 더 큰 규모로 되풀이되면서 1953년 전쟁이 끝난 뒤까지도 피해가 이어졌다. 군경의 과도한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면서 피해를 가중시켰는데, 피해자의 수가 10만을 헤아릴 것으로 추산된다.

이밖에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악질지주’에 대한 인민재판 후 처형이나 지방좌익세력에 의한 우익청년단 학살, 인민군 퇴각 직전의 우익인사 처형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수가 약 13만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러나 그 수치에는 당시 남한 군경이나 우익단체에 의한 학살이 좌익에 의한 학살로 둔갑한 경우, 학살 주체가 분명치 않은 경우가 포함돼 있어 그 수가 조금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공식 자료로 여기저기에 올라 있기 때문에 지명 소개는 약한다.

전선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은 생략한다. 미군의 무차별 융단폭격으로 인한 대량학살, 좌우 양측의 보복 학살이 광범하게 이루어졌는데, 피해자 수를 추산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정부에서 공식 집계한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보다도 우리 군, 경찰, 우익단체, 미군에 의한 학살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줄잡아도 최소한 다섯 배다. 그리고 정부의 모든 공식 통계에서 이 수치는 빠져 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3.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세월이 흘러 체제가 고착되고 사회가 틀을 갖추면, 저마다 나름의 사고체계를 굳히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각과 잣대를 갖고서 전 시대를 진단하게 된다. 때로는 그게 더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서는 진실에 접근하기 힘들다. 그 경우 보편적 진리라고 이야기되는 것은 현실의 힘의 반영일 뿐이고, 그 현실의 힘이 현재와 미래를 규정하고 좌우한다.

진실을 알고 거기에서 뭔가 새로운 모티브를 얻으려면 굳어진 지금의 잣대로 보지 말고 당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때 내가,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찌 했을지 생각해보면서.

대규모의 민간인학살이 시작된 기점은 4.3과 여순사건이다. 1948년의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다. 그에 앞서 1946년의 대구 10.1 사건 직후의 대대적인 탄압과 민간인학살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학살이 그렇게 광범하진 않았고 또 그뒤로 대규모 학살이 쭉 이어지지도 않았다.

1948년 초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남쪽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추진하면서 그에 대한 폭넓은 저항과 반대가 시작되었다. 단선단정이 얼마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가는 당시 5.10 선거에 참여한 정당과 사회단체의 비율이 10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참고로, 당시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을 지지하는 비율이 80퍼센트에 육박했다.

그런데도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단선단정을 밀어붙였고, 그것은 곧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다. 즉, 다수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책에 국민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2.8, 4.3 등이 그 반영이었고, 5.10, 8.15 이후까지 계속된 제주 항쟁, 뒤이은 여순 항쟁이 그 속편이었으며, 8.15에 들어선 이승만 정부는 국민의 저항에 무자비한 진압과 민간인학살로 대응했다. 이후 국민적 저항의 중심은 평지를 떠나 산으로 진지를 옮겼고, 전쟁이 나기도 전에 이미 ‘작은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작은 전쟁’의 평지판, 도시판은 파업과 쟁의, 폭력과 테러와 암살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민간인이 학살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이승만 정부와 그 일파는 저항을 억누르고 체제를 굳히고자 48년 말에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49년에는 친일파를 처벌하려는 반민특위를 공격하고,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 각종 우익청년단체를 하나로 통합해갔다. 일종의 병영국가, 전시체제를 구축해간 것이다.

한국전쟁은 해방공간의 난맥상을 세심하게 풀어내는 대신 일거에 폭력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시도한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 책임에서는 북도, 남도, 미국도, 소련도, 중국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결과로서, 남북 분단이 고착되고, 남쪽에는 극우반공체제의 기반이 굳혀졌으며, 미국은 여전히 남한의 강력한 후견자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전쟁기 남한 지역의 민간인학살은 국민들 속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승만 정부와 자신의 동아시아 전략에 입각하여 이승만 정부를 주무르고 있던 미국의 정략적 판단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 정부와 미국에게 어찌 보면 전쟁은 기회일 수 있었다. 최소한 한반도의 남쪽에라도 확고한 반공국가를 세워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과 정통성의 빈 곳을 메우고,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속성상 사람들을 ‘아’와 ‘피아’의 두 진영으로 갈라놓는 전쟁은 나와 우리가 아닌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섬멸’하려는 충동을 갖는다. 이승만 정부와 미국은 전쟁의 속성을 잘 알았고, 잘 이용했다.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인물들은 조직적으로 제거되었고, 승리라는 목표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걸림돌들은 무자비하게 치워졌다. 한 술 더 떠서, 순수한 반공체제에 순응할 것 같지 않거나 이질적인 존재들 중 일부를 제거하고, 남은 이들에겐 재갈을 물렸다. 살아남은 국민들은 최소한 겉으로는 모두 맹목적인 반공주의자, 맹목적인 반공국가의 신민이 되었다. 한국전쟁기의 민간인학살은 이처럼 정치적 학살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고, 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극우반공체제는 든든한 반석 위에 놓여졌다.

요컨대, 한국전쟁전후의 100만 민간인학살은 대한민국이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극우반공체제를 정착시켜가는 과정에서 이질적인 존재들의 일부를 걸러내고 남은 국민들을 체제에 순치시켜가는 절차였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국가폭력의 가장 잔인하고 가장 비인도적인 형태인 대량학살이 이루어졌고, 이후 정당성을 결여한 정권을 존속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민간인학살은 입에 담지조차도 못하는 금기사항이 되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골로 간다’는 말이 아마도 여기서 연유했을 것이다. 극우반공체제하의 국가통제가 극에 달한 것이다.



4. 계속되는 학살, 오늘의 문제

반백년 이어진 극우반공체제하에서 전쟁 전이든 중이든 후든 학살당한 이들의 대부분은 ‘빨갱이’가 되었고 그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 되었으며, 학살 사실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은 ‘불순분자’가 되었다. 그야말로 ‘멸균실’ 수준의 순수한 극우반공체제하에서는 중립도 상식도 통할 수 없었고, 민주니 인권이니 평화니 통일이니 하는 것들에도 색안경이 씌워졌다. 오죽하면 1956년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에 ‘빨갱이’의 굴레를 씌웠을까?

대학살의 그늘은 실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짙었다. 학살에 책임있는 사람들이 우리 정부와 미국, 그리고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이니, 그 정황이 어땠을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이유도 없이 개처럼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유족들은 억울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오히려 사실 자체를 숨겨야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다. 유족이건 아니건, 사실을 본 그대로 이야기하고 밝히다가는 다시 ‘빨갱이’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갈 판이었다.

우리 사회의 인권과 생명 경시 풍조, 폭력 불감증, 상호 불신, 극도의 보신주의와 가족주의, 민주주의 냉소, 진보에 대한 회의, 극우반공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그 폐해들, 극성을 부리는 국가폭력과 권위주의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전쟁 전후의 대학살은 일제 40년 지배보다도 더 무서운 여파를 남겼다. 사람이 떼거리로 개처럼 죽어가는 판에 사람이 조금 두들겨 맞는 것이 무슨 큰 문제겠는가? 고문 좀 당하는 것, 억울하게 잡혀가는 것, 차별 좀 받는 것, 불이익 좀 당하는 것 등등이 무슨 대수겠는가? 사람들이 떼로 죽어가는 걸 보고도 입도 뻥긋 못했는데, ‘대수롭지 않은’ 부정과 불의에 대해 어찌 목소리를 높이겠는가?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거고, 죽는 놈, 맞는 놈만 서러운 거지. 재수없이 그런 꼴 안 보고 살려면, 권력에 붙어서 안전막을 쳐놓든지, 그게 싫으면 여기저기 끼어들지 말고 내 가족이나 챙기며 조용히 살아야지. 그런 사고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지면서, 우리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후진국이 되었다.

전쟁 후 반백 년 동안, 피학살자 가족은 물론 그 이웃들 속에서도 ‘입 조심, 몸 조심’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제일의 가훈이었다. 그리고 학살자들이 지어낸 이야기, ‘죽을 짓을 했으니까 죽었겠지’ 하는 말들이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곧바로 사회의 지배 담론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교과서 한 구석에나 힘없이 박혀 있는 허언일 뿐이었다.

요컨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극우반공체제, 인간의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여기는 생명경시와 인권유린 풍조, 웬만한 폭력은 폭력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국가폭력의 사회, 이것이 우리가 전쟁과 학살을 통해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극우반공체제하에서의 인권유린과 국가폭력은 그뒤로도 계속 되풀이되었다. 4.19와 5.18의 무자비한 진압에서, 수많은 의문사와 고문치사, 각종 의혹사건, 민중 생존권의 폭력적인 진압 등등에서 국가폭력은 계속 기승을 부렸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국가가 다수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던 전쟁중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국가의 거듭나기 시도가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니,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학살 문제가 결코 유족들만의 문제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차 당사자는 유족이다. 가족주의를 강요받는 우리 사회의 풍조에 비추어보면 더더욱 그렇다. 다수 유족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침묵하고 자식들에게까지 함구했지만, 그래도 그걸 기억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큰맘 먹고 앞장선 유족들은 오히려 이중 삼중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학살진상규명 요구가 처음으로 본격 제기된 4.19 직후에는 유족들이 그래도 힘이 있었다. 유족들이 아직 젊었고, 유족들과 이웃들의 기억이 생생했다. 50년대 이승만 정부의 폭정도 그런 기억들을 깡그리 제거할 수는 없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고, 죽인 자가 어떤 사람이고 죽은 자는 어떤 사람인지, 세상이 다 알았다. 북진통일의 슬로건 아래 지독한 ‘빨갱이 사냥’이 계속되고 지독한 탄압이 이어졌지만, 압제의 뚜껑이 빠끔히 열리는 틈을 타고 거세게 터져 나오는 유족들의 한과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내건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피학살자들은 지하에서 또 한 차례 죽음을 맞았고, 유족회 간부들이 붙들려가 고초를 겪으면서 학살은 또다시 은폐되었다. 당시 자기 부모형제자매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려던 유족회 간부들에게 내려진 죄목은 ‘특수반국가행위’였다.

그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은 유족들에겐 너무 길었다. 강화된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그에 동반한 연좌제와 보안처분제도 등이 유족들과 사회운동가들의 숨통을 더욱 죄어왔다. 유족들은 속으로 한을 삭이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었다. ‘빨갱이 가족’으로 몰리고 연좌제의 피해를 당하며 피해 의식만 커져갔다.

유족들은 자꾸만 자기에게 빨간 물을 들이려는 시도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썼다. ‘우리 아버지, 우리 형님은 결코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말을 속으로 거듭거듭 외며 자기 주문을 했다. 그것은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지배 담론에 승복했음을 뜻했다. 불법적인 국가폭력에 대한 성토, 민주주의의 근간인 사상과 이념의 자유 요구 등은 유족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진짜 ‘빨갱이’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의식을 가두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뒤 민간인학살 문제가 침묵을 깨고 다시 제기되는 것은 1987년 6월 항쟁이후 민주주의 공간이 조금씩 열리면서부터다. 거창과 제주 4.3을 중심으로 다시 뚜껑이 조금씩 열리고, 다른 곳에서도 잇따라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예전의 유족이 아니었다. ‘건국’의 제물이 된 피학살자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기보다는 국가의 보살핌과 시혜를 촉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게 보통이었다. 그조차도 유족들 단독으로는 요구도 못하고 사회단체들의 지원을 받으면서야 모기 소리만한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을 전후하여 거창 특별법과 4.3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노근리 사건이 크게 언론을 타면서 유족들은 다시 힘을 얻었다. 전국적으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요구가 빗발치고, 민간 차원에서나마 학살진상조사 작업이 시작되고, 학살진상규명을 목표로 하는 유족, 사회단체, 연구자의 전국연대기구(학살규명범국민위)도 만들어졌다. 5년간에 걸친 이들의 줄기찬 노력은 정치권의 외면으로 거듭 좌절을 겪다가 마침내 2005년 5월 통합과거사법(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으로 작은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유족들은 진실규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지금까지도 학살규명운동의 주체로 당당하게 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반세기 동안의 억압구조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 유족들의 몸과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은 여파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유족들 중 다수는 국가의 시혜를 통한 그간의 물적, 심적 피해보상의 덫에 갇혀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억울하게 죽어간 부모형제자매가 왜 그런 참담한 일을 당해야 했는지, 부모형제자매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가해자 집단을 비롯한 극우반공체제의 수혜자들은 학살규명운동을 음으로 양으로 집요하게 방해해왔다. 학살의 진상이 밝혀지는 날, 자기들이 딛고 서 있던 땅, 자기들을 애국자로 떠받들어주던 토대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극우반공체제와 그를 뒷받침하던 미국을 등에 업고 성장해온 재벌과 보수정치권, 보수언론을 비롯한 한국사회의 지배세력들에게도 민간인학살은 들춰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는 뜨거운 감자였다. 그들이 장악한 국가가 자신의 아픈 과거를 스스로 드러내며 반성할 리는 만무했다.

그리고 그뒤에는 침묵하는 다수 국민이 있었다. 무서운 시간의 흐름을 등에 업은 강요된 망각, 그리고 현실의 필요를 앞세운 실용적 사고가 그 침묵을 합리화하며 뒷받침했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흐름들을 어떻게 역전시켜 학살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고 그 의미를 성찰하느냐 하는 중차대한 과제가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흘러가는 현실은 그다지 녹록치 않다.


5.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한국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는 한국 현대사의 블랙박스다. 그 속엔 대한민국 탄생의 비사가 숨겨져 있고, 오늘 우리 사회에 깊숙이 박혀 있는 각종 문제와 폐해의 뿌리가 거기에 닿아 있다. 학살진상규명은 그동안 묻혀져 있던 그 비사와 뿌리를 들추어내어 우리 사회와 국가를 다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작업이다. 그 목적과 과제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해원이다. 학살의 직접 피해자는 피학살자들과 그 유족들이다. 학살 규명은 피학살자들과 유족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는 것, 즉 해원 과정을 통해서 피학살자와 그 유족들이 국가와 사회의 당당한 성원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인권이다. 학살, 특히 전쟁중의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은 인간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최대의 인권 유린이며, 인간성(인륜)에 반하는 최고의 전쟁범죄다. 따라서 학살규명은 우리가 인간이고 우리가 사는 곳이 인간사회임을 확인하는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셋째는 평화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학살을 동반하며, 더욱이 최근에 올수록 전쟁은 전투원보다도 더 많은 비전투원 민간인의 피를 요구하고 있다. 학살규명을 통해 전쟁의 참상, 그것도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쟁에 휩쓸려 들어간 수많은 민간인들의 피해를 부각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이고 왜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지 각인시킬 수 있다.

넷째는 민주주의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집단학살의 대부분은 국가가 주권자인 다수 국민을 적으로 몰아 불법 학살한 논리 모순의 국가 범죄다. 학살규명은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재확인하는 일이며, 집단학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거듭남을 통해 나라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운동이다.

다섯째는 역사 재정립이다. 학살규명을 통해서 숨겨지고 뒤집힌 역사를 밝히고 바로잡아 후대의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 다시는 이런 뼈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 진상과 교훈을 세세토록 깊이 새겨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더불어 사는 인간세상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원칙을 갖고서 어떤 과정을 거쳐 이 문제에 접근해야 이 목적과 과제들을 이룰 수 있을까?

첫째는 진상규명이다.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진상조사를 통한 진실규명이다. 진상이 밝혀져야만 후속 조치도 취할 수 있고, 길을 잃지 않고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문서 자료가 그리 많지 않고 증언자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가고 있는 지금, 진상조사의 시급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학살의 배경과 함의를 연구하여 정리하는 작업도 병행돼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성찰에 이를 수 있다. 2006년부터 지난 3년 동안 진실화해위의 진상규명 작업을 통해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수많은 민간인학살들의 진실이 하나둘 빛을 보고 있다. 근 60년 만에 미흡하나마 국가 공권력에 의한 불법학살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우리 역사와 사회를 재정립할 기초가 놓이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여건, 권한과 인력과 예산 부족, 관계 국가기관의 비협조로 국가기구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실규명이 아직까지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보다 광범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한데, 뾰족한 수가 없다.

둘째는 피해회복이다. 불법 학살당한 이들을 이제 와서 되살려낼 수는 없지만, 이제라도 그에 상응하는, 아니 최소한이나마 책임을 다하는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잘못 규정된 피해자들의 정치적, 법적 지위를 회복하고 사회적 오명을 바로잡는 일은 피해자의 억울한 죽음과 유족들의 그간의 고통,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 미친 파장을 감안할 때 하루 빨리 풀어야 할 숙제다. 그리고 공권력이 위법하게 행사됐음을 시인하는 법적 절차이기도 한 피해배상도 적극 고려돼야 한다. 국가의 지불능력 등을 감안해야겠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다. 국가의 학살 책임이 인정된 후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몇몇 배상 요구 재판의 경우, 5년이라는 공소시효 소멸을 이유로 각하 결정이 거듭 내려지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한 추세다. 그 이전에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어 논란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 불법 학살당한 유해를 발굴하여 안치하고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사업도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참고로, 금정굴 현장에서 1995년에 발굴된 유해는 2007년 진실화해위에서 국가의 학살 책임을 인정했음에도 무려 14년째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셋째는 책임자의 처벌과 사죄다. 국가와 가해자의 사죄와 처벌은 공권력의 불법적 행사를 시인하는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또한 사회정의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가해자 처벌은 시간적 격차와 사회통합 등을 감안하여 책임자에 대한 상징적인 조치로 국한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최소한 불법 행위로 취득한 부당한 명예와 부는 박탈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할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학살 책임이 인정된 일부 사건의 경우에도, 책임자의 처벌과 사죄는커녕 국가의 형식적인 유감 표명 외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 주소다.

넷째는 재발방지책 마련이다. 사태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 방책을 마련하고 역사 기록과 교육 등을 통해서 이 끔찍한 학살을 널리 기억하여 인권과 평화의 중요성, 국가와 사회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학살규명의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가치다. 학술 활동과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서 국민적 공감대를 더욱 넓히고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일상적으로 되새기는 것도 인류역사를 거꾸로 되돌리지 않고 한 걸음씩 더 전진시키는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진실규명이 이루어진 사건의 경우에도, 이와 관련된 조치는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학살규명의 목적과 과제들을 얼마만큼 달성하느냐는 것은 향후 우리 사회의 미래를 규정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조사, 정리, 조치한 뒤 덮고 넘어가느냐, 사실을 낱낱이 파헤치고 뿌리부터 다시 심느냐, 문제의 본질을 확인한 뒤 그 의미를 살려나가는 데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학살규명이 우리 사회에 미칠 파장도 달라지고 향후 우리 사회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다. 미흡하나마 꽤 많은 사건의 진실규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여러 가지로 걱정이 앞선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일의 기초는 진실규명이다. 제대로 된 진실규명 이후의 깊은 성찰이 우리에게 무엇이 바람직한지 일러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전시의 특수성 문제를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원론적인 접근과는 별도로, 당시의 시대 상황이 당대를 살아가던 모든 이들에게 때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을 수 없게 했고, 어느 한편에 서는 순간 그쪽의 논리로 무장하고서 때로는 인륜에 반하는 행동까지 저지르게 되었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은 작은 차이, 즉 작은 틈새를 건널 수 없는 큰 강으로 갈라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상황의 특수성이 인간성 보편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어느 때고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고, 인간이 인간인 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한계는 있는 법이다. 반백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 와서 그걸 파헤쳐 봤자 무슨 소용이냐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그러나 지난 야수의 시절, 그 광기의 역사를 돌아보고 반성하지 못하는 사회는 앞으로도 가망이 없다. 머지않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면서 다시 한 번 통탄을 금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이미 때는 늦다.

또 한 가지, 피해자의 인권유린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학살진상규명의 궁극적 목적이 그런 무자비한 학살을 가능케 했던 우리 사회, 우리 국가에 대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학살의 책임을 최대한 밝혀가면서 대한민국의 탄생 과정, 미국과 대한민국의 유착 관계, 극우반공체제의 고착 과정, 이후 지배세력의 재생산 과정 등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국전쟁기의 과거청산 작업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사회와 국가 재정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 경우, 재발방지 장치는 그 당연한 부산물로 따라 나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회 분열, 공동체 해체 우려에 대한 단상이다. 과거청산은 공동체와 사회를 새롭게 다시 세워가는 과정이다. 물론 혁명도 전쟁도 아닌 상황에서 그 한계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독이 깨질까봐 상황을 어정쩡하게 미봉하려다 보면, 과거청산의 의미가 그만큼 퇴색하게 된다. 과거청산을 그 자체로서 역사와 사회와 국가를 다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보고, 밝혀져 나오는 진실과 그 흐름에 상황을 맡겨보자는 건 위험한 생각일까? 살아 있는 유기체인 우리 사회는 그 정도의 충격은 너끈히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6. 진실규명은 새로운 시작

한국전쟁전후 100만 민간인학살 문제의 본질은 국가권력이 수많은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죽이고도 그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왔다는 것이다. 즉, 국가권력의 직무 유기의 문제이고, 국가권력의 도덕성의 문제이며, 국가권력의 존재 의의의 문제이고, 나아가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경우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물을 수밖에 없는 문제다. 국가가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또 문제를 묵살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버린다면, 수백만 유족들에게, 그리고 현장을 지켜보고 이야기를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국가란 무엇이겠는가? 국가에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막중한 임무는 없을진대, 하물며 국민, 그것도 전투와 무관한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죽이고 또 이를 묵살하는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최근 역사는 50-60년 전의 그 무지막지한 과오를 씻지 못하고 똑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해왔다. “반성하지 못한 과거는 반드시 되풀이된다”는 금언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그 잔해와 여파가 곳곳에 널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을 불법적으로 죽인 사람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 피의 살육 명령을 내린 사람들이 당당하게 어깨 펴고 사는 세상에서 정의니 인권이니 하는 것들이 어떻게 비치겠으며, 바로 옆에서 가족들이, 이웃들이 무더기로 끌려가 죽는 걸 지켜본 사람들에게 웬만한 인권유린이나 폭력이 무슨 대수겠는가? 그런 속에서 어떻게 인권과 민주주의와 평화의 꽃이 피기를 바라겠는가? 나아가 그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국가와 사회 차원의 일대 반성을 하고 넘어가지 못하는 한, 우리는 머지않아 다시 우리 주변에서 50-60년 전의 피바람이 다시 불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특히 한반도 안팎에서 여전히 전쟁의 기운이 가시지 않고 있는 지금, 이는 결코 과거사가 아니고 오늘의 문제이고 또 미래의 문제다.

다행히도 2000년을 전후하여 제주 4.3, 노근리 사건 등에 대한 진상규명작업이 시작되었고, 2005년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고 이를 근거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져 종합적인 진실규명작업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문제의 해결은 물론 그 중요한 출발점인 진상규명작업조차도 아직 걸음마 단계다. 학살의 책임자이자 주요 가해자이며 문제해결의 주체이기도 한 국가가 이제야 자기 책무를 돌아보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태도는 지극히 소극적이고 미온적이며 시혜적이다. 과거사 진상규명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현 정부 들어서는 더욱 그렇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과 광범한 후속조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길이 흐릿하거나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 의미와 경로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한국전쟁전후 집단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우리 국가와 사회의 기초를 다시 세워 피로 얼룩진 이 죽음의 땅을 삶의 땅으로 거듭나게 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작업이다.

이제라도 가해자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사죄, 반성하면서 진실을 털어놓고, 피해자는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며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그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학살의 최종 책임자이자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국가는 학살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성심을 다해 그 후속 조치를 취하고, 지난날의 과오를 사죄하고, 그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고, 그 뼈아픈 교훈을 길이길이 후세에 물려주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만 그 책임을 다하게 되고, 그를 통해 학살의 국가가 인권과 평화의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국가가 지배세력의 지배도구인지, 아니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계약 장치인지도 판가름날 것이다.

(그림: 박건웅)

(주: 유형별, 지역별 학살실태를 소개하는 글을 계속 올리려다가 아무래도 분량도 너무 많은데다가 또 국가 차원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사건과 사실들이 계속 확인되고 있는 중이라서, 민간인학살 전반을 망라한 총론성 소개글을 싣고 연재를 일차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