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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학살 이후 - 학살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반백년 이어진 극우반공체제하에서 전쟁 전이든 중이든 후든 학살당한 이들의 대부분은 ‘빨갱이’가 되었고 그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 되었으며, 학살 사실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은 ‘불순분자’가 되었다. 그야말로 ‘멸균실’ 수준의 순수한 극우반공체제하에서는 중립도 상식도 통할 수 없었고, 민주니 인권이니 평화니 통일이니 하는 것들에도 색안경이 씌워졌다.

대학살의 그늘은 실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짙었다. 학살에 책임있는 사람들 중 다수가 우리 정부와 미국, 그리고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이니, 그 정황이 어땠을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이유도 없이 개처럼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유족들은 억울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오히려 사실 자체를 숨겨야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다. 유족이건 아니건, 사실을 본 그대로 이야기하고 밝히다가는 다시 ‘빨갱이’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갈 판이었다.

우리 사회의 인권과 생명 경시 풍조, 폭력 불감증, 상호 불신, 극도의 보신주의와 가족주의, 민주주의 냉소, 진보에 대한 회의, 극우반공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그 폐해들, 극성을 부리는 국가폭력과 권위주의 등등이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일제 40년보다도 더 무서운 여파를 남긴 대학살극

전쟁 전후의 대학살은 일제 40년 지배보다도 더 무서운 여파를 남겼다. 사람이 개처럼 떼거리로 죽어가는 판에 사람이 조금 두들겨 맞는 것이 무슨 큰 문제겠는가? 고문 좀 당하는 것, 억울하게 잡혀가는 것, 차별 좀 받는 것, 불이익 좀 당하는 것 등등이 무슨 대수겠는가? 사람들이 떼로 죽어가는 걸 보고도 입도 뻥긋 못했는데, ‘대수롭지 않은’ 부정과 불의에 대해 어찌 목소리를 높이겠는가?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거고, 죽는 놈, 맞는 놈만 서러운 거지. 재수없이 그런 꼴 안 보고 살려면, 권력에 붙어서 안전막을 쳐놓든지, 그게 싫으면 여기저기 끼어들지 말고 내 가족이나 챙기며 조용히 살아야지. 그런 사고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지면서, 우리는 인권 후진국, 민주주의 후진국이 되었다.

전쟁 후 반백 년 동안, 피학살자 가족은 물론 그 이웃들에게도 ‘입 조심, 몸 조심’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제일의 가훈이었다. 그리고 학살자들이 지어낸 이야기, ‘죽을 짓을 했으니까 죽었겠지’ 하는 말들이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곧바로 사회의 지배 담론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교과서 한 구석에나 힘없이 박혀 있는 허언일 뿐이었다.

요컨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극우반공체제, 인간의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여기는 생명경시와 인권유린 풍조, 웬만한 폭력은 폭력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국가폭력의 사회, 이것이 우리가 전쟁과 학살을 통해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극우반공체제하에서 인권유린과 국가폭력은 그뒤로도 계속 되풀이되었다. 4.19와 5.18의 무자비한 진압에서, 수많은 의문사와 고문치사, 각종 의혹사건, 민중 생존권의 폭력적인 진압, 가까이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과 FTA 체결 반대집회 등등에서 국가폭력은 계속 기승을 부렸다. 그것은 국가가 다수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던 전쟁중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국가의 거듭나기 시도가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니,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들고 일어난 유족들, 무참하게 짓밟히다

학살 문제가 결코 유족들만의 문제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차 당사자는 유족이다. 가족주의를 강요받는 우리 사회의 풍조에 비추어보면 더더욱 그렇다. 다수 유족들은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침묵하고 자식들에게까지 함구했지만, 그래도 그걸 기억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큰맘 먹고 앞장선 유족들은 오히려 이중 삼중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학살진상규명 요구가 처음으로 전면 제기된 4.19 직후에는 유족들이 그래도 힘이 있었다. 유족들이 아직 젊었고, 유족들과 이웃들의 기억이 생생했다. 50년대 이승만 정부의 폭정도 그런 기억들을 깡그리 제거할 수는 없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고, 죽인 자가 어떤 사람이고 죽은 자는 어떤 사람인지, 세상이 다 알았다. 북진통일의 슬로건 아래 지독한 ‘빨갱이 사냥’이 계속되고 지독한 탄압이 이어졌지만, 압제의 뚜껑이 빠끔히 열리는 틈을 타고 거세게 터져 나오는 유족들의 한과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내건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피학살자들은 지하에서 또 한 차례 죽음을 맞았고, 자기 부모형제자매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일에 앞장섰던 유족회 간부들에게 내려진 죄목은 ‘특수반국가행위’였다.

그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은 유족들에겐 너무 길었다. 강화된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그에 동반한 연좌제와 보안처분제도 등이 유족들과 사회운동가들의 숨통을 더욱 죄어왔다. 유족들은 속으로 한을 삭이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었다. ‘빨갱이 가족’으로 몰리고 연좌제의 피해를 당하며 피해 의식만 커져갔다.

유족들은 자꾸만 자기에게 빨간 물을 들이려는 시도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썼다. ‘우리 아버지, 우리 형님은 결코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말을 속으로 거듭거듭 외며 자기 주문을 했다. 그것은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지배 담론에 승복했음을 뜻했다. 불법적인 국가폭력에 대한 성토, 민주주의의 근간인 사상과 이념의 자유 요구 등은 유족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진짜 ‘빨갱이’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의식을 가두어버리고 만 것이다.

학살 이후 유족들의 삶

학살 이후 유족들의 반백 년 삶은 실로 형언하기 힘들다. 애비 없는 설움에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 지독한 가난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거미줄처럼 따라다니던 연좌제의 꼬리표는 그나마 힘겨운 삶을 더욱 옥죄었다.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질시를 피해 고향을 등졌다.

왜 죽었는지 이유라도 알자, 유골이라도 찾아 제사라도 떳떳이 지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은 번번이 압살, 배반당했고, 많은 유족들은 억울하게 죽은 부모형제와 자신의 삶까지도 부정하면서 자신을 거짓 포장하며 살 길을 꾀했다. 살기 위해 군에 입대하여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 길도 택했고, 가해자 집단과 어울리며 신분 세탁을 꾀하기도 했다. 대물림을 하지 않으려 자식들에게 사실을 함구하니 가해자 집안과 피해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끔찍한 악몽을 다시 꾸지 않으려면 그 사실 자체를 잊어야 했다. 도리질치고 떨어내어 덮고 잊어야만 살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그래도 대다수 유족들에게 거의 공통으로 나타나는 피해 양상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좌제
연좌제는 당사자들이 의식하건 못하건 거의 모든 유족들에게 공통의 덫이었다. 육사나 공사, 경찰대학 등의 채용시험에 합격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떨어진 경우는 비일비재하고, 대다수의 유족들은 아예 공직은 몰론 버젓한 직장에조차 지원할 꿈도 꾸지 못했다. 심지어는 ‘신원보증서 떼기가 겁이 나서’ 직장생활을 접었다는 사람도 있고, 여권 신청 때마다 신원조회에 걸려 유학이나 해외취업, 해외이주를 못한 사례도 셀 수 없이 많으며, 정보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경우도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학살 자체와 마찬가지로 연좌제의 피해 역시 당사자의 앞길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당사자와 가족 전체의 응어리가 되어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덧낸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병, 멸시, 가정파탄
학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병으로 지독하게 고생하거나 결국 죽음을 맞은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빨갱이 자식’ 또는 ‘호로 자식’이라는 멸시와 손가락질은 대다수 유족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가정파탄의 사례도 각양각색인데, 가장 극악한 경우로 가해자가 남편을 죽이고 그 부인을 첩으로 삼아 함께 산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여자와 아이들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아이들의 피해는 남자들보다도 더욱 심각했다. 남편 잃고 손가락질받으며 삯바느질이나 식모살이로, 또 여자의 몸으로 남정네들의 일 모두 감당해가며 혼자서 아이들을 키워온 의지의 한국 여성들, 창졸간에 부모를 모두 잃고 느닷없이 ‘가장’이 되어 동생들 보살펴가며 그 험난한 세월을 견뎌온 우리의 맏딸들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 빨갱이 집안이라고 결혼 석달 만에 소박을 맞고 쫓겨난 뒤 평생을 외롭게 산 경우도 있고, 젖먹이 아이들 떼어놓고 개가한 여인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또한 완강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지붕도 바람막이도 없는 한데에 내동댕이쳐진 꼴이었으며,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돼버린 아이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개가한 뒤 남겨진 아이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아버지를 잃고 남겨진 아이들에게 홀로 된 어머니를 바라보며 그에 의지하는 것 또한 편할 리 있겠는가?

가난, 원망, 출향, 자기부정
대다수 유족들에게 지독한 가난이야 평생을 따라 다니는 동반자였으니,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많은 유족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는 하늘의 별이었다. 좀 심한 경우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개가한 뒤 고아원에 들어갔다가 넝마주이를 시작으로 60가지 이상의 직업을 전전한 사람도 있고, 부모 잃고 어린나이에 거지가 되어 이집 저집 밥 얻어먹으러 다니다 10살 때부터 머슴살이를 시작한 사람도 있다. 이렇듯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많은 유족들은 가난까지 대물림할 수는 없다면서 이 악물고 살아 웬만하면 자식들 대학교육은 다 시키는 ‘의지의 한국인상’을 보여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모두 ‘인간승리’요 ‘감동 드라마’다. 이들에게 ‘아버지, 왜 날 낳으셨소’ 하는 애틋한 원망은 너무나도 자연스런 감정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물론, 드물지만 올곧은 삶을 살다가 비명횡사한 부모나 남편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학살 이후 유족들의 삶을 이야기하자면 실로 끝이 없다. 고향을 등진 사람들, 특히 고국을 등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자신을 부정하고 재포장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깊은 한은 가슴속에 켜켜이 묻어두고 묵묵히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짓들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유족들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들에 대해 국가와 사회는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 사회가 그 답을 준비할 때다. 아직까지도 대다수 유족들이 평생 자신을 짓눌러온 피해의식이나 좌절감, 자포자기, 냉소, 방관의 틀에 갇혀 있는 지금, 그 끔찍한 학살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고 진실 은폐를 사실상 용인해온 우리 사회가 이제라도 스스로를 통렬하게 반성하며 거듭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여기서 진실규명에 앞장선 유족들이 이구동성으로 “과거사법이 통과되었을 때가 생애에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한국사회의 새로운 출발점이 만들어질 수 있다. (계속)

(글: 이무열, 그림: 박건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