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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굴사건 진상규명운동이 시동을 건 지 어언 16년 여, 그 발동주체였던 고양시민회의 창립 21주년을 맞아 운동의 역사와 현황, 과제들을 정리해본다.




1. 금정굴학살 규명운동과 고양시민회

고양시민회가 금정굴과 연을 맺은 것은 1993년이다. 당시 금정굴사건을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있던 김양원 씨가 93년에 시민회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여름 시민회에서 금정굴사건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정하면서 금정굴학살이 역사와 사회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시민회는 당시 고양지역의 4개 민주단체들과 공동으로 금정굴사건진실규명위원회를 꾸려 금정굴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작업에 나섰고, 그와 동시에 당시 김양원 회장이 파악하고 있던 유족들을 중심으로 유족회가 꾸려져 공동활동을 하게 된다. 1993년 9월 25일의 제1회 합동위령제를 시작으로 금정굴사건은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금정굴학살 진실규명운동은 유족회가 아니라 사실 시민회에서 시작한 운동이었다.

그뒤로도 약간의 부침과 곡절은 있었지만, 시민회는 금정굴과 늘 함께 했다. 1회부터 작년의 16회 위령제까지 유족들과 시민사회의 힘을 모아 16차례의 위령제를 올리는 동안에도 시민회는 거의 매번 그 중심자리를 지켰으며(중간에 잠시 청년회에서 실무를 맡아 진행한 기간이 있었다), 금정굴사건을 조사하여 알리고, 시민사회의 관심과 참여를 끌어내고, 정부와 지자체에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고, 입법운동과 투쟁을 추진하고, 사건 현장을 보존하고, 사건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반추하며 공유하는 일까지, 시민회는 유족들과 늘 동고동락하며 금정굴학살진실규명운동의 중요한 한 축을 떠맡아왔다.

시민회원들은 때로는 선두에 서서, 때로는 기획과 실무를 도와가며, 때로는 자기 직분에 걸맞은 역할로 운동을 지원하며, 때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으로 때워가며, 금정굴학살 규명운동의 몸과 머리와 손발이 되어왔다. 이제 미흡하나마 금정굴학살의 실체와 그 책임을 국가가 인정하면서 커다란 한 고개를 넘고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이때, 이 운동의 성과를 어떻게 굳히고, 막힌 물꼬는 어떻게 뚫고, 어떻게 사회적으로 공유하며 새 세상의 밑거름으로 삼아가야 할지 창조적인 고민과 활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2. 금정굴학살 규명운동의 역사와 현황

(1) 1단계(1993-1995)
1990년부터 김양원의 개인적인 조사 작업이 시작되었다. 마을의 역사를 조사하던 중 금정굴사건의 실체를 접하고 3년 동안 탐문조사 작업을 벌였다. 1993년 김양원이 고양시민회장 직을 맡으면서 시민회에 문제를 제기했고, 그해 8-9월 고양시민회 등 5개 단체가 금정굴사건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김양원)를 꾸리고 금정굴 문제를 사회에 공식 제기했다. 그와 동시에 유족회(회장: 서병규)도 발족되어 활동에 들어갔다. 1993년 9월 25일 학살 후 43년 만에 이곳 사람들이 ‘금정구뎅이’‘금광구뎅이’‘금구뎅이’라 부르던 곳을 ‘금정굴’로 명명하고 제1회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올리며 그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유족회와 진상규명위 공동 명의로 각계에 진정서를 내고 국회에 특별법 제정을 청원하고 조사에 착수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나, 열심히 뛰던 김 전회장과 유족들의 가슴만 타들어갈 뿐, 세상은 요지부동이었다. 1차 자료집이 발간되고, 금정굴 학살의 큰 틀이 파악되었다. 1994년 금정굴 입구와 현장에 철제 안내판 두 개를 세웠다.

(2) 2단계(1995-1998)
1995년 9월 유골 발굴이 시작되고 그 참상이 MBC PD수첩을 비롯한 각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유족회와 진상규명위 공동 명의의 조사, 진정, 청원 작업이 가속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무관심에 절망하고 거기서 유골이 하나라도 나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모진 마음에 분노하며 십시일반 힘을 보태 현장을 발굴하고 희생자의 유해와 유품들이 온 산을 뒤덮어 한국판 ‘킬링필드’가 그 실체를 드러냈음에도, 중앙정부와 경찰, 지방자치체, 지역 출신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들의 처절한 외면은 계속되었다. 49일간 온 산을 가득 덮고 있던 유해는 고양경찰서와 국회 앞을 거쳐 서울대 의대로 실려갔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무영 당시 고양경찰서장의 행적이 확인되는 등, 사건 진상에 한걸음 다가섰다. 서울대 이윤성 교수는 1차 발굴된 유골의 중간 감정서에서 희생자가 최소 153명이고 여자가 약 10퍼센트이며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이의 유해도 있다고 밝혔다.

(3) 3단계(1998-2000)
국회 특별법 제정과 도의회 진상조사를 목표로 금정굴사건 진상규명명예회복추진위(대표: 이창복, 두봉, 서병규, 유재덕, 종후)를 꾸리고 증언 녹취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를 종합하여 2차 자료집, <고양금정굴양민학살사건 진상보고서>를 발간했다(실무작업: 고양청년회 진행). 강인규, 나진택 등의 노력에 힘입어, 1999년 도의회의 진상조사특위 활동을 거쳐 경기도의회에서 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하고, 지방자치체 차원의 위령사업, 국회 차원의 특별법 제정, 중앙정부 차원의 명확한 진상규명을 건의했다. 도의회는 진상조사보고서에서 금정굴 사건이 부역 혐의자를 색출, 처단한다는 명분하에 행해진 불법 학살임을 공인했다. 그러나 이제야 든든한 반석 하나 확보했구나 하는 안도감도 잠시뿐, 고양시의 위령사업 거부와 중앙정부, 경기도, 국회의 묵묵부답으로 금정굴 문제는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이 어간에 실무책임자들 간에 예기치 않은 혼선과 갈등이 빚어지면서, 2선에 있던 이춘열이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4) 4단계(2000-2005)
2000년 9월 16개 시민사회단체와 유족회를 중심으로 고양금정굴사건 공동대책위를 결성하고 지역 차원의 위령사업 촉구운동을 벌이는 한편, 다른 지역의 유족들 및 인권사회단체들과 힘을 합쳐 전국 차원의 민간인학살진상규명 통합특별법 제정운동에 착수했다. 2002년 지역 차원의 위령사업이라도 시행하려는 목적으로 고양시의회에 위령사업촉구 청원을 냈으나 발의 의원(22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10명)만이 찬성표를 던져 결의안이 부결되면서 지역 차원의 위령사업은 일단 수포로 돌아갔다. 고양파주지역의 학살실태 보강조사 작업을 실시하여 2003년 3월 제1회 고양파주지역 민간인학살 심포지엄 “금정굴학살은 빙산의 일각이었다”를 열었고, 전국 통합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농성투쟁을 강도 높게 펼쳤다. 해마다 겨울철이면 연례행사처럼 국회 앞 농성이 이어지면서 연로한 유족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2004년 여름을 기점으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통합특별법 제정운동이 통합과거사법 제정운동으로 합쳐지고 과거사법이 ‘4대 입법’의 하나로 자리매겨지면서 법제정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편, 금정굴 현장을 우리 손으로 평화의 공간으로 가꾸어가자는 목표하에 2001년에는 나무조각가 이락진 선생의 장승 작품을 입구와 현장에 하나씩 세웠고, 2002년에는 ‘산 자들이여, 우리를 기억하라’는 영령들의 절규를 담은 신목(이락진 작)을 현장에 세웠다. 2003년에는 채의진 문경유족회장의 도움으로 솟대를 현장 주변에 심었고, 2004년에는 푯말 두 개를, 2005년에는 ‘통한의 금정굴을 평화의 공원으로’라는 글귀를 새긴 커다란 표목(채의진, 이락진 작)을 입구에 세웠다. 그리고 2003년에는 한국종합예술학교 학생들에 의해 금정굴 다큐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가 제작되었다. 1996년 정순덕 교수의 진오귀굿판을 제외하고는 유족들을 중심으로 조촐하게 치러오던 위령제도 2000년부터는 지역 안팎의 시민사회단체, 문화예술인, 종교인들이 다양하게 참가하는 시민참여행사로 발전시켜 행사의 내실을 기했다.

(5) 5단계(2005-2007)
2005년 5월 우여곡절 끝에 일부 조항이 누더기가 된 채로 통합과거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유족들은 감격해하며 펑펑 울었다. 2005년 12월 역시 우여곡절 끝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미흡한 상태로 발족했고, 금정굴 유족을 비롯한 전국의 민간인학살 유족들은 시행령 개정 마스크를 쓴 채로 위원회의 발족식에 참여했다. 2006년 4월 1차로 금정굴사건 등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사(금정굴 조사관: 신기철)가 시작되었으나, 금정굴 유족을 비롯한 민간인학살 유족들은 전면적이고 철저한 조사가 가능하도록 위원회 조직을 확대개편할 것을 요구하며 또 다시 싸움을 벌여야 했다. 한편, 고양시에서는 끈질긴 요구 끝에 시 예산을 확보한 후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소장: 박선주)의 시굴로 2005년 7월 금정굴 현장의 발굴마무리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유해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현장은 다시 천막만 한 꺼풀 덧씌워진 채 방치되었으며, 안전시설비로 추가 확보한 예산조차도 토지주의 부동의와 고양시의 미온적인 태도로 집행을 하지 못했다.

(6) 6단계(2007-현재)
2007년 6월 26일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미흡하나마 금정굴사건에 대한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금정굴사건을 경찰 책임하의 불법처형으로 규정하고 사건의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다면서, 국가의 사과와 피해자 명예회복, 유해봉안 등 위령사업 시행, 역사관과 평화공원 건립, 기록 정정과 교육, 법령정비 등을 권고했다. 이어서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금정굴사건 외 고양부역혐의사건(한강변, 덕이리, 성석리, 현천리, 화전리의 5개 지역)의 진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그러나 진실규명과 국가의 책임 인정 후 2년이 지나도록, 진실화해위의 권고사항을 포함한 제반 후속조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유족들이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유해안치를 비롯한 제반 후속조치의 조속한 시행을 거듭 촉구하고 있으나, 고양시에서는 지자체에서 할 수 있는 일까지도 중앙정부에 마냥 미루고 중앙정부에서는 기약도 없는 검토, 준비를 앵무새마냥 되뇌고 있는 상황이다. 2007년, 2008년에는 지역의 종교계와 문화예술계에서 위령제에 적극 참여하며 행사가 더욱 다채로워졌고, 2008년 위령제에는 일산경찰서장이 참석하여 유감과 애도의 뜻을 담은 경찰청장의 추도문을 대독했다.



3. 국가의 조사 결과와 그에 대한 평가

2007년 6월 26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고양금정굴사건에 대한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1990년 김양원 전 고양시민회장이 개인적으로 금정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지 17년 만에, 1993년 금정굴사건진상규명위와 금정굴유족회가 발족하여 제1회 위령제를 지내며 금정굴 문제를 공식 제기한 지 14년 만에, 1995년 유족들의 자체 유해 발굴로 황룡산 자락이 킬링필드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지 12년 만에, 중앙과 지방의 책임있는 온갖 기관들이 나 몰라라 외면하는 가운데 1999년 경기도의회에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사건을 조사한 뒤 금정굴 사건을 ‘경찰 주도하의 불법 학살’로 잠정 결정하고 2000년 초에 ‘조사보고서’를 낸 지 7-8년 만에, 2000년 금정굴유족회와 고양지역시민사회단체들이 금정굴공대위를 결성하고 2001년부터 전국의 다른 유족, 사회단체들과 함께 민간인학살규명통합특별법 쟁취투쟁에 돌입한 지 6년 만에, 2002년 고양시의회에서 금정굴희생자위령사업 촉구결의안이 우익보훈단체들의 방해공작으로 부결된 지 5년 만에,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고 ‘진실화해위’가 발족한 지 2년 만에, 국가의 공식 기구에서 마침내 금정굴 사건이 경찰의 불법 학살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간 십수년간은 금정굴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유족들과 활동가들에겐 실로 고난의 세월이었다. 메아리 없는 아우성처럼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일은 더 없다. 쉬쉬 하는 분위기에서 이웃들은 물론 피해 당사자들까지도 속시원히 털어놓지 못하거나 나서려 하지 않던 사회적 환경, 행여나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세라 입을 꼭 다물거나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며 진실을 호도하려던 인간 군상들, 자신의 기득권과 사회적 위상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봐 오히려 덤터기를 씌우려 들던 가해자와 한국사회의 우익집단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은근슬쩍 상황을 모면하기에 급급하던 중앙과 지방의 공직자들, 그리고 각급 국가기관들... 금정굴 진실규명의 최대의 적은 바로 이른바 민주화됐다는 한국사회의 국가기관과 주류세력들이었고, 그 영향하의 한국사회 자체, 그리고 한 지붕을 이고 살아가는 동시대의 사람들이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공권력의 탄압이나 여의도의 칼바람 같은 물리적 조건은 사람들의 냉담함에 비하면 차라리 속 편한 것이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이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사회와 제도였다.

그럼에도 그 사회와 국가의 일각에나마 인권과 양심의 호소가 먹혀들면서 부족하지만 마침내 법도 만들어지고 국가위원회도 만들어지고, 미흡하나마 드디어 진실도 공인되었다. 사건의 진실에 대한 국가의 공인은 그 자체로서도 중대한 의미를 가지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이제야 문제 해결의 커다란 주춧돌 하나가 놓여진 것이고, 이 주춧돌 위에 무엇을 쌓아 어떤 집을 만드느냐는 늘 그렇듯이 우리 하기에 달려 있다. 국가의 행동은 언제나 아와 비아를 아우르는 시민들의 요구의 종속변수이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의 진실규명 내용을 전제로, 금정굴사건 진실규명의 의의와 한계를 짚어보자. 거기서 우리의 향후 과제가 도출되기 때문이다.

(1) 국가의 조사 결과
[결정사안]
고양경찰서장의 지휘아래 1950년 10월 9일부터 31일까지 고양지역과 파주 일부지역에서 거주하던 고산돌 외 75명을 포함한 153명 이상의 주민들이 부역혐의자 및 부역혐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에 의해 금정굴에서 불법적으로 집단총살당한 사건

[결정요지]
1) 고산돌 외 75명을 포함한 153명 이상의 고양지역 주민들이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9일부터 10월 31일 사이에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경찰서 경찰관에 의해 고양시 소재 금정굴에서 집단총살 당하였다.

2) 위 사건의 경위를 보면, 국군의 고양․파주지역 수복 이후, 경찰은 지역주민 중 인민군 점령시기에 부역한 혐의가 있는 자와 부역혐의로 행불 또는 도피한 자의 가족을 연행하였다. 경찰은 이들을 관내 각 지서 및 치안대 사무실, 창고 등에 구금하였다가 고양경찰서로 이송한 다음, 3~7일간의 조사를 거쳐 10월 9일부터 한 번에 20~40여 명씩 금정굴로 끌고 가서 총살하고 암매장하였다. 이 과정에 고양경찰서 관내 경찰과 20여 명의 태극단․치안대 등 경찰보조 인력이 가담하였다. 금정굴 현장에서는 5인 1조의 경찰관 2개조가 희생자 5명씩을 굴 방향으로 무릎을 꿇게 하고 등 뒤에서 사격하여 살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3) 본 사건의 전체 희생규모는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를 포함하여 최소 153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고산돌(다-253), 최의현(미신청)... 등 76명이다.

4) 희생자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던 지역주민들로서, 이중에는 북한 점령기 인민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소극적인 부역행위를 했던 사람도 일부 있으나,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혐의자 가족원 및 이와 무관한 지역주민이었다. 희생자 중에는 10대가 8명, 여성이 7명 포함되어 있었으며, 고양시 중면과 송포면의 주민들이 주로 희생되었다.

5) 본 사건의 가해책임은 고양경찰서(서장 이무영)에 있고, 고양경찰서의 지휘를 받으며 보조역할을 수행한 치안대․태극단에도 간접책임이 있다.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은 희생자들의 연행․구금․이송 및 총살을 감독․집행하였다. 치안대는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대동청년단․태극단원을 구성원으로 하여 결성된 경찰의 치안보조 조직으로서 고양경찰서의 지휘 아래 있었다. 특히 태극단은 고양경찰서 직할파출소에 본부를 두고 부역혐의자 연행, 고양경찰서 유치시설의 감시, 희생자들의 금정굴 처형장소 이송 등을 실행하였다. 본 사건 발생 당시 경찰의 일차적인 지휘․명령계통은 고양경찰서 ⇨ 경기도 경찰국 ⇨ 내무부 치안국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한편으로 전시 계엄령 하에서 경인지구 계엄사령부가 모든 상황을 통제․감독하고 있었다. 본 사건에서 이들 상급기관의 사건 인지, 묵인 및 지시 여부는 확인되지는 못했지만, 경찰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최종 책임은 국가에 귀속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6) 고양경찰서 경찰이 희생자들을 집단 처형하는 과정에서는 어떠한 확인․선별 절차나 적법절차도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국회는 「부역행위특별처리법」․「사형금지법」을 제정하고 있는 중이었고, 정부는 국가기관의 불법적인 부역자 처리를 금지하는 지시를 여러 차례 발표하였음에도 경찰은 이를 준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양경찰서는 본 사건 관련 희생자들을 처형장소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재판을 받으러 간다고 속이는 위법행위를 저질렀다. 특히 수복 직후 부역자 처리를 전담하기 위해 중앙에 설치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1950년 11월 2일 들어, 본 사건 관련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관 및 치안대원들을 체포한 직후 금정굴에서 처형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이승만 정부는 본 사건의 진행 중에 이미 그 위법성을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7) 본 사건은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을 불법으로 집단 총살한 사건이었다. 비록 사건 관련 희생자들 가운데 일부가 부역자 혹은 부역혐의자였다고 할지라도 적법절차를 준수하지 않고 비무장 민간인을 집단 총살한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사건 이후에도 일부 희생자 가족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며, 생계의 터전인 재산을 빼앗기기도 했다. 또한 연좌제에 따라 취업의 권리도 제한되고,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8) 진실화해위원회는 호적 정정조치를 비롯하여 고양 금정굴사건 희생자 유족들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 사과, 임시 보관 중인 유해 영구봉안, 평화공원 설립과 위령시설 설치, 전시하 국민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 등 관련 법률 정비, 잘못된 기록의 수정 및 진실의 역사반영, 역사관 건립을 권고한다.

[권고내용]
가. 사과: 국가는 고양 금정굴에서 비무장 민간인들이 아무런 적법절차 없이 집단희생되었으며 그 유족들이 오랜 세월 슬픔과 고통을 안고 살아온 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권고한다.

나. 명예회복: 정부는 희생자의 호적 등에 ‘행방불명’으로 기록되어 있거나 사망신고를 하지 못하여 유족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정정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

다. 재발방지: 정부는 비록 전시나 국가비상사태 하에서라도 사법심사 없이 민간인이 임의 처형되는 일이 발행하지 않도록, 전시하 비무장민간인의 인권을 침해할 위험이 있는 국가보안법, 계엄법, 위수령, 군형법 등 제반 법률 내의 관련 조항들을 개정하여 국민의 인권보호에 최선을 다하기를 권고한다.
  국가위기 상황에서 경찰이 직권을 남용하여 민간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경찰 대상의 인권교육 실시를 권고한다. 또한 본 사건에 대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잘못된 기록을 수정하고, 향후 역사관련 교재에도 위의 진실규명 내용을 수록할 것을 권고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한국전쟁기 고양 금정굴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비극과 잘못을 이후 세대가 망각하지 않기 위해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연구, 교육할 수 있는 고양지역의 역사관 건립을 적극 추진할 것을 권고한다.

라. 화해와 위령사업: 정부는 현재 서울대병원 법의학교실에 임시 보관되어 부식되고 있는 유골․유해를 영구봉안 할 수 있도록 시급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무하고 지역민과 국민들에게는 역사적 교훈을 남기기 위해 금정굴 지역에 평화공원을 설립하고 적절한 위령시설을 설치할 것을 권고한다.

(2) 진실규명결정의 의의
1) 유족들과 시민사회의 오랜 요구에 대한 국가의 1차 화답: 사건 이후 57년 만에, 진상규명운동 17년 만에 금정굴사건이 전쟁기 민간인에 대한 불법학살임을 국가적으로 공인했다.

2) 학살의 불법성과 국가의 책임 확인: 고양금정굴사건은 국가기관인 당시의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이 당시의 어떤 법령도 지키지 않고 공권력을 불법사용한 불법행위이자 전쟁범죄임을 확인하면서 그 책임은 국가에 귀속됨을 분명히 했다.

3) 피학살자 일부와 학살의 반인륜성, 2차 피해 일부 확인: 고양금정굴사건 희생자 최소 153명 이상 중 76명의 신원을 확인했고, 희생자에게 씌워진 혐의조차도 전혀 근거가 없거나 당시 법령의 기준으로 보아서도 사형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미미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또한 확인된 희생자 중 상당수가 여자와 10대라는 것, 학살 과정에서도 온갖 반인권 행위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여 학살의 반인륜적 성격을 분명히 했으며, 학살 이후에도 피해 유족들에게 연좌제, 재산 피해 등 수많은 2차 피해가 가해졌음을 확인했다.

4) 부역혐의 학살 조사의 토대 구축: 전쟁기 민간인학살의 가장 깊은 ‘바다’이며 사건의 특성상 조사하기가 매우 어려운 부역혐의 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인 금정굴사건의 메커니즘과 전개과정에 접근함으로써 고양파주지역의 다른 학살은 물론 전국의 모든 부역혐의 학살 조사의 기초를 놓았다.

5) 국가에 기초적 권고를 행함으로써 피해회복 등 후속조치의 근거 마련: 국가의 공식 사과, 희생자의 명예회복, 법제도 정비 등을 통한 재발방지책 마련, 경찰 대상의 인권교육, 잘못된 기록의 수정과 교재 반영, 고양지역의 역사관 건립, 유해 영구봉안, 평화공원 설립, 위령시설 설치 등을 국가에 권고함으로써 피해를 회복하고 유사 사건의 재발을 막으며 역사의 교훈을 남길 수 있는 토대를 놓았다.

(3) 문제점과 한계
그럼에도 금정굴사건의 진실규명 결정문은 많은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피해자 일부와 가해 책임을 규명함으로써 유족들과 시민사회의 오랜 요구를 국가 차원에서 확인하며 공인했다는 데는 별 이의가 없지만, 사건 전모 파악과 역사적 진실규명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경우 여전히 허술한 구석이 많다. 향후의 추가조사 및 보강작업을 위해 이를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조사과정상의 문제
- 사건 전모에 접근할 수 있는 자료 미발견: 우선 금정굴학살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일차적인 자료가 될 수 있는 연행자 명부와 처형자 명부를 결국 확인하지 못했고, 현존 가능성이 가장 높은 당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1950년 11월 2일 고양서 경찰 및 치안대 10여명 연행 이후의 수사기록도 찾지 못했다. 전반적인 사건 정황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당시 고양경찰서 편제, 태극단과 치안대 조직, 당시 대한청년단 고양군단 조직, 전쟁 발발기의 고양군 편제, 인민군 점령 당시의 점령 기구 및 군.면.리별 인민위원회와 여성동맹, 청년동맹 조직 등도 보고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 참고인 진술 태부족: 사건 규모에 비해 참고인 진술이 너무 적다. 희생자 최소 153명에 신청인이 46명이나 되는 사건(어쩌면 희생자 수백 명에다 연관 사건들까지 포함할 경우 희생자가 천 명도 넘는 사건)의 피해자 참고인 조사가 고작 34명이고, 가해혐의자 및 참고인 조사가 겨우 20명이라는 것은 자료도 별반 없는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시간을 좀더 갖고서 참고인 진술 폭을 넓혀갔더라면, 피해자의 추가 확인은 물론이고 가해 집단간의 책임관계, 학살의 전개과정을 보다 명료하게 밝히는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 가해혐의 집단 책임자에 대한 접근 미흡: 당시 고양경찰서장(이무영)의 후임서장 박홍묵과 당시 경찰 간부들, 당시 태극단장(이장복), 당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와 당시 경인지구 계엄사령부, 당시 경기도경 관계자 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특히 사건에 깊숙이 관계했고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었을 게 틀림없는 당시 태극단장에 대해서는 드러난 학살 보조 책임만으로도 동행명령장을 발부해서라도 철저하게 조사했어야 한다.

2) 보고서 기술상의 문제
- 학살이라고 규정하지 않은 이유: 인권유린의 극치를 달린 국가기관의 불법 총살에 학살이라는 정의를 내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사건 조사 전에는 예단할 수 없어 잠정적으로 ‘민간인희생’이라고 표현한다고 해도, 조사하여 그 성격을 밝힌 후에는 ‘민간인학살’로 바로잡아 말과 뜻을 바로 세우는 것이 옳지 않을까? 언어와 문맥으로도 ‘희생’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곳이 부지기수다.

- 신청인들의 주장과 그간의 민간조사에 대한 검증작업, 그리고 그간의 진상규명운동 자취들을 결정문에 충분히 담아내지 않고 있는 이유: 위원회에서 조사한 기간은 조사관 한 명이 일년 남짓이지만, 46명 신청인의 일부와 그 가족들은 평생 동안 이 문제로 고민을 해왔으며, 민간에서도 지난 1990-1993년(김양원 개인), 1993-1995년(진상규명위와 유족회), 1998-1999년(금정굴범국민위와 유족회), 2001년(학살규명범국민위 실태조사단), 2003년(금정굴공대위와 유족회)의 자체 조사를 거쳐 소략하지만 일부는 기록으로 남겼고 일부는 기록 외의 메모나 기억, 테이프 등으로 남아 있다. 그중 일부는 조사 내용 속에 인용도 되고 공식 기록되기도 했지만, 일부는 목록에서도 제외되고 일부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국가 차원의 공식 기록(결정문 또는 보고서)에는 힘겨운 상황에서 결코 쉽지 않았던 민간의 그러한 노력들, 그 땀과 눈물들을 오롯이 기록해두는 것이 정석 아닐까? 나아가, 신청인의 주장과 민간 보고서 또는 공간 보고서 등의 내용이 위원회의 공식 결론과 다를 경우, 그 검증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정석 아닐까?

- 몇 가지 소소한 문제들: 희생자의 중면, 송포면 집중 등, 부분적으로 확인된 조사 내용에 매몰되는 경향이 간간이 눈에 띈다. 10월 3일부터 구금 시작, 태극단의 금정굴 학살 직접 책임 없음 등, 일부 확인한 것으로 지나치게 단정하는 경향도 보인다.

3) 배경 조사 미흡
- 부역혐의 학살이 일어난 전국적 배경 조사 미흡: 전쟁 전의 좌우 대립 상황, 우익 청년단과 우익 테러, 정부 피난과 민초들의 피난 좌절 상황, 인민군 점령기의 점령기구와 인민 편제, 인민군 점령에 대한 민초들의 태도, 인민재판과 우익인사 처형, 수복 이후의 부역자 처벌 문제(도강파-잔류파 논쟁 등), 수복 직후 보복의 피바람, 검거 또는 자수한 55만 부역혐의자의 처리 상황, 군검경 합수부의 수사 내용, 부역자 재판, 무분별한 처형에 대한 공감대 확산, 처벌 완화, 계속되는 부역자 처벌 등에 대한 배경 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만 부역혐의 학살의 전모를 밝히고 그 의미를 새길 수 있다. 최초의 부역혐의 학살 조사보고서인 금정굴 결정문에서는 이와 같은 내용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금정굴사건이 고양지역만의 특수한 부역혐의 사건이 아닌 한, 개괄적으로라도 다루고 넘어가야 하지 않았을까?

- 지역적 배경 등에 대한 접근 미흡: 지역 차원에서도 사건 전모의 파악을 위해서는 이와 같은 접근이 필요하고, 거기에 더하여 고양금정굴사건 조사에 필수적인 당시 경찰과 치안대, 태극단 편제 등에 대한 조사가 함께 이루어졌어야 한다.

4) 학살일과 학살지 문제
- 최초 학살일: 학살사건 조사에서 최초 학살일은 여러 모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정문에 따르면 고양경찰서 유치장과 인근 창고에는 10월 3일부터 구금하여 10월 9일부터 학살을 시작한 것으로 거의 단정하고 있는데, 이는 오류일 수 있다. 일산 기준으로 수복일인 9월 28일부터 10월 9일까지 11일 동안에는 과연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능곡이고 송포고 행주고 수색이고 산남리고 구산리고간에 수복 직후부터 태극단을 포함한 치안대에 의해 피바람이 불었는데, 일산 지역만 평온했을까? 민간 차원의 진상규명활동 초창기의 몇몇 증언은 일산 지역에서도 태극단 등에 의해 수복 직후부터 학살이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설령 초창기의 학살지가 금정굴 현장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고양경찰서를 경유한 경우는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재정리하는 것이 옳다. 최초 학살일은 학살 책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로서, 매우 중요하다. 경찰의 완전 복귀 또는 부분 복귀 이전의 학살을 누가 주도했느냐는 문제다. 또한 구금 시작일로 못박고 있는 10월 3일, 조사기간 3-7일도 의문이다. 9월 28일 수복 직후부터 연행되었다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 구금되어 있었을까? 추적하여 풀어내야 할 고리들이 많다. 의문이 풀리지 않을 경우 적어도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다.

- 학살지: 금정굴 현장에서의 학살이 10월 9일에 시작되었다고 할 경우, 9일 이전에 경찰서에 끌려와 죽은 사람들은 어디에서 죽었을까? 그 이전의 경찰서 뒷산 신사터 학살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고양경찰서 경유 최초 학살지는 금정굴이 아니라 경찰서 뒷산이 된다. 성격상 두 학살지를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므로 고양금정굴학살의 1차 학살지가 고양경찰서 뒷산으로 병기되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5) 희생자 조사 미흡
- 신원 확인 희생자 76명(?): 과거에 민간에서 파악한 수에서 몇 사람 추가된 숫자다. 과거에 민간 차원에서 조사할 때 수백 명의 희생자 중 70여 명의 신원을 확인하고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희생자가 10여 명 더 있다는 정도만 확인하고 조사를 끝낸 것은 돈도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의 민간 조사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 차원의 조사를 절실히 원하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겨우 이 정도라니... 지금이라도 보따리 싸들고 동네를 돌면 수십 명의 희생자, 지역 내 다른 사건의 피해자를 포함할 경우 수백 명의 희생자를 확인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위원회의 신청인 중심의 ‘민원처리’식 사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사람들이 왜 진실규명신청을 하지 않는지, 하지 못했는지는 위원회에서도 잘 안다. 그들의 천부적 인권은 무시해도 좋을까? 참고로, 신원 미확인자로 분류된 희생 추정자 9명의 경우에는 조금만 더 발품을 팔면 곧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중면, 송포면 지역에 희생자 집중(?): 고양군 전역에서 고양경찰서로 끌려온 부역혐의자 학살인 금정굴학살의 경우, 확인된 희생자가 2개 면에 집중된 것은 고양경찰서에 가까운 지역인 탓도 일부 있지만 민간의 진상규명활동이 집중된 곳이 그 2개 면인 이유가 훨씬 더 크다. 민간 차원에서 조직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곳은 최초 문제 제기자인 김양원의 고향인 송포면 덕이리와 일산 본바닥인 중면 일산리뿐이고, 나머지 지역은 거기서 새끼쳐 나간 인근 지역과 1995년 유해발굴 소식 등을 듣고 달려온 유족이 있는 곳뿐이었다, 다른 지역들에 대해서는 민간 차원에서 조직적인 접근을 한 적이 없고, 따라서 진실규명신청을 해온 유족들도 없을 뿐인데, 이를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큰 무리다. 덕이리에 바로 인접한 엄청난 학살지인 송포면 가좌리와 대화리조차도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고양군 전역의 학살에 대한 밑바닥 조사가 절실하다.

- 희생 규모: 당시 고양군 전역에서 일어난 부역혐의자 학살에서 고양금정굴 피학살자를 가려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태극단원 이모씨의 증언에 따르면, 가좌리 창고에 가둬두고 있던 200여 명(혹은 400여 명) 중 일부는 고양경찰서로 보내고 일부는 훈방하고 나머지는 강변으로 끌고 가 죽였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도 그 비슷한 증언들이 나온다. 고양금정굴 학살의 희생 규모에 근접하는 수치를 파악하자면, 마을별 전수조사를 통해 마을이나 리, 면 단위로 죽어간 사람과 고양경찰서로 이송된 사람들을 구분해내야 한다. 그 작업은 자료와 증언이 태부족한 상황에서 아마도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결정문에서 밝히고 있는 유해의 근거, 비비선의 근거, 실탄의 근거 등은 단지 참고자료일 뿐으로서 보다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가장 확실한 것은 당시의 처형자 명부나 군경합수부 수사기록, 당시 처형 책임자들의 증언 등일 텐데, 글쎄, 처형 책임자가 수치까지 양심적으로 밝혀줄 날은 언제 올까? 요컨대 희생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대로 확인해야 하며, 부득이한 경우 조사의 한계를 명시하여 차후의 여지를 남겨놓아야 한다.

- 희생자들의 연행 사유와 경위, 경찰서 구금, 금정굴 이송 등의 확인 문제: 한 곳에서 한날 한시에 수백 명이 집단학살된 사건이 아닌 금정굴 사건의 경우,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정확한 연행 사유와 경위, 경찰서 구금과 금정굴 이송 등의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은 희생자를 확정하고 사건의 전모를 밝히며 무더기로 죽어간 사람들을 도매금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늦었지만 이제라도 존귀한 인간으로 대접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다. 나중의 필요에 대비해서라도 한 명 한 명의 피해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공식 채택된 결정문에 포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분량 때문에 여의치 않다면 추가로라도 의결 형식을 밟는 것이 옳을 것이다.

6) 학살 메커니즘과 책임 규명 미흡
- 군 단위 학살과 면리 단위 학살의 입체적 접근 부족: 고양군 지역의 부역혐의 학살은 마을, 리, 면, 군 단위의 학살이 다층적으로 이루어졌다. 한 마을에서도 마을 자체에서 학살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찰서로 끌려가 금정굴에서 학살된 사람도 있다. 면리 단위의 학살이 이루어진 송포면이나 수색, 능곡, 도내리 등지에서도 일부는 금정굴로 끌려갔다. 고양금정굴사건은 고양경찰서 경유, 금정굴에서 학살된 사람들로 한정되었지만, 그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입체적인 접근과 마을별 바닥조사가 필수적이며, 고양군 지역의 대표적인 부역혐의 학살로서 고양군 전지역에서 사람들이 끌려와 경찰서장 지휘하에 학살된 금정굴사건 보고서에는 금정굴 외 지역 내 다른 사건들과의 유사성, 차별성, 관련성을 명시하면서, 추후의 지역 내 사건 조사 및 보고서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리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 경찰-태극단-치안대와 그 관계: 경찰과 치안대의 조직이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으며, 경찰 완전복귀 이전의 경찰과 태극단의 초기 관계가 덜 분명하다. 치안대와 태극단의 관계도 덜 분명하다. 학살 책임 규명과 사건 전모 파악을 위해서는 그 관계가 보다 명확히 규명돼야 한다.

- 상부 명령체계의 규명 미흡: 경인지역 계엄사령부 및 경기도경과 고양경찰서의 명령 관계를 밝히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어쩌면 군검경 합수부도 명령체계 안에 들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국회의원들이 부역혐의자에 대한 무분별한 불법 학살을 목도하며 이를 막고자 만든 부역행위자처리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이승만 대통령, 국방장관을 비롯한 정부 최고위층이나 어쩌면 연합사까지도 불법학살 예방에 대한 정책적 노력이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학살을 사실상 방조했을 개연성이 크며, 어쩌면 대통령 또는 정부 최고위층이 암암리에 학살을 사주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부역혐의자 연행, 조사 명령이 사실상의 학살 명령으로 둔갑하여 전국 곳곳에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것을 정부 최고위층만 모르고 있었을 리는 사실상 만무하다. 왜 정권은 국민을, 피난 못 간 국민을 적대시했을까, 왜 학살을 사실상 방조했을까 하는 물음들에 대한 답과 그 구조적 배경, 명령체계를 최대한 밝혀내 기술해야 한다.

-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구세주’였나: 결정문 전체에 걸쳐 여러 차례나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개입으로 금정굴 학살이 중단된 것으로 기술함으로써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지나치게 미화되고 있다. 당시의 군검경 합수부는 과연 어떤 곳이었는가? 군검경 합수부는 국회를 통과한 부역행위처리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이승만이 초법적으로 설치한 부역혐의자 수사기구로서, 당시의 55만 부역혐의 검거.자수자 처리를 사실상 총지휘한 기구였다. 물론 전시인 당시에 방방곡곡까지 그 권한이 행사되진 못했겠지만, 10월 중순 이른바 ‘잔류파’에 대한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시기에 군법회의를 통해, 한두 달 후면 훈방되거나 몇년 형 정도로 감형받게 되는 정도의 부역을 행한 수백명의 부역혐의자에게 사형을 내리게 하여 죽음으로 몰고간 기관이며, 12월 1.4 후퇴 직전에는 이들의 수사로 감옥에 갇혀 있던 수천 명의 부역혐의자가 열차 편으로 후방으로 호송되고 그중 일부는 결국 불법 학살로 목숨을 잃는 사태를 야기한 기관이기도 하다. 이들이 과연 방방곡곡에서 자행된 부역혐의자 불법학살을 몰랐을까? 알고도 묵인했을까? 아니면 암암리에 방조 또는 지시했을까? 이들의 개입으로 금정굴 학살은 중단됐다지만, 이들이 끌고 간 치안대의 일부는 왜 부역혐의자 불법학살로 처벌받지 않고 ‘특별조치령’으로 처벌됐고, 금정굴사건의 ‘주범’인 경찰은 왜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으며, ‘주범’ 중의 ‘주범’인 이무영 고양경찰서장은 왜 면직 조치만 받고 얼마 후 다시 경찰에 복귀하도록 내버려두었을까? 아무리 좋게 보아도 ‘구세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보다 정확한 진실규명이 필요한 대목으로서, 최소한 ‘구세주’ 같은 인상을 주는 반복적인 기술은 피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 이무영 서장의 부임일자와 9.28 수복 직후의 학살 책임: 결정문에서는 <경찰10년사(1958)>를 근거로 이무영 서장의 부임일을 10월 3일로 못박고 있지만, 그 기록이 가장 빠른 기록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전시하 발령일과 부임일은 며칠씩 차이가 날 수 있고, 그 기록 역시 불완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위원회 이전의 민간 조사에서 어렵게 찾아낸 문서를 근거로 10월 12일을 이무영 서장의 부임일로 확인한 바 있는 것을 위원회 조사에서 바꾸고자 할 때에는 그 교정 근거를 보다 친절하고 상세하게 제시해주는 것이 옳다. 어쨌든 10월 초 어느 날 이무영 서장이 부임하여 고양군의 치안 책임을 맡았다 해도, 9.28 수복 이후 그날까지는 5-10일의 간격이 있다. 그 5-10일 동안에 일어난 학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그동안에도 학살이 자행된 정황은 충분하고 미흡하나마 증언도 있었다. 서장 부임 이전의 잔류 경찰 혹은 경찰 간부에게 책임이 있을까? 아니면 태극단에? 고양서 출신의 석호진 미해병 중위가 태극단에 일산 지역의 치안권을 위임했다는 날짜도 9월 28일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9.28 수복 직후의 학살과 그 책임에 대해서는 보다 명확한 규명이 필요하다.

- 금정굴 학살(또는 고양경찰서 뒷산 학살)에서 태극단의 손에는 과연 피가 묻지 않았을까: 일산 지역 외 태극단원들이 치안대원 또는 경찰 자격으로 학살에 직접 가담한 사례는 적지 않다. 일산 지역 태극단원들도 수복 직후의 부역자 연행 사실과 감시, 호송, 학살 경비 역할은 자인하고 있다. 태극단 수색지단장까지도 수복 초기에 일산을 들락거린 것을 보면 그때야말로 태극단의 일산 본단이 본부 구실을 한 게 틀림없다. 그리고 수복 직후에 경찰서 뒷산 신사터에서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태극단이 군대보다도 앞서 일산을 수복했다고 자화자찬하는 사실, 고양서 출신인 석호진 미해병 중위로부터 일산 지역 치안권을 위임받았다는 사실, 태극단이 고양경찰서를 차지하고 있다가 고양경찰 복귀 후 직할 파출소로 본부를 옮겼다는 사실 등에 대한 기록과 증언도 있다. 여러 면에서 정황상 경찰 공식 복귀 이전에 태극단이 학살에 직접 가담하거나 학살을 지휘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결정문에서 당시 여러 태극단원들의 증언 외에는 정모 순경 하나의 추정만으로 일산 지역 태극단에 면죄부를 주기는 아직 이르다. 보다 많은 증언을 들어야 한다. 태극단의 역할에 대한 경찰 쪽 증언도 들어야 하고, 태극단 핵심인사가 아닌 태극단원들의 증언도 더 들어봐야 하고, 당시 치안대원으로 일한 사람이나 당시의 지역 상황을 잘 아는 사람들의 증언도 더 청취해야 한다. 그리고 살생부 작성자 5인 중 하나였다는 말도 있는 당시 태극단장에 대해서는 동행명령장이라도 발부하여 진실을 밝히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최소한, 의혹이 명확하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학살의 직접 책임은 없다는 식의 단정은 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7) 권고 내용 미흡
- 피해회복: 피해회복으로 호적정정밖에 언급하지 않고 있다. 거창, 노근리, 4.3 등 타 위원회의 사례나 다른 사건 결정문에 언급돼 있는 치료와 생계 지원 등의 원호사업은 언급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배상, 보상 등을 직접 언급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정부가 피해의 원상회복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정도의 포괄적 권고라도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 위령사업: 권고 사항의 기계적 해석, 권고 이행 해태 가능성 등을 감안하여, 위령사업으로 위령제와 문화학술행사 지원 등도 적시하며 포괄적 언급을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 권고 내용의 구체화: 권고 이행 주체와 방안까지도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4. 금정굴학살 규명운동의 향후 과제

사건 후 59년 만에 소문으로만 떠돌던 금정굴 학살의 실상은 밝혀졌고, 국가는 이를 진실로 공인했다. 향후 과제는 무엇일까? 최우선 과제는 보다 철저하고 광범한 진실규명과 신속한 후속조치를 통한 사건의 근원적 해결이다.

(1) 추가조사
국가 차원의 조사는 피해자를 일부 확인하고 가해 책임을 밝히며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등 커다란 의미가 있었지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는 여전히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우선 9.28 수복 직후 10월 8일까지의 학살의 실상과 책임이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고, 송포면과 중면 일부 이외의 학살에는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며, 고양경찰서의 상부 지휘 책임을 밝히지 못하고 있는 점, 사건 배경에 대한 조사가 미흡한 점 등이 그것이다. 그와 함께 고양경찰서를 경유하지 않고 마을이나 면, 리 단위로 학살당한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도 시급하다. 수복 직후의 학살이 마을, 리, 면, 군 단위에서 다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를 종합적으로 조사해야만 당시의 학살 실상의 전모를 밝히고 그 의미를 깊이 성찰할 수 있다. 진실화해위에서는 고양금정굴 사건에 이어 고양지역의 다른 5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고양부역혐의 사건으로 묶어 조사한 후 진실규명결정을 내린 바 있지만, 위에서 지적한 문제들에 대한 답은 거의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의 활동시한도 얼마 남지 않고 그 한계도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지금, 어떤 단위에서 어떻게 조사를 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답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어쨌든 중요한 과제로 두고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2) 진실규명 후속조치
진실규명 이후의 후속조치도 시급하다. 진실규명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지만, 그 피해를 어루만져 공동체를 회복하고 그 의미를 넓고 깊게 성찰하여 역사적 교훈으로 삼으려면 해야 할 일이 무척 많다. 우선 국가가 학살의 책임을 인정한만큼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과거 공권력의 잘못에 대해 진지하게 공식 사과를 하는 것이 그 시발점이다(유감과 애도 표명 정도로는 제 길을 찾아갈 수 없다). 그래야만 반백년 이상 국민 대우를 받지 못해온 ‘국민’이 비로소 국민이 되어 사회 통합의 전초가 놓인다. 12년 동안 서울대 병원 창고에 보관중인 유해를 국가 차원에서 공식 감정 후 공식 안치하는 것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금정굴 유족들은 금정굴 현장 양지바른 곳에 유해들을 합동안치하기를 원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에서도 권고하고 있는 유해 안치소 앞의 희생자 위령탑, 역사관 건립, 그리고 이 위령시설들과 학살 현장을 축으로 하는 평화공원의 설립에도 박차를 가의해야 한다.

보다 폭넓게는 이와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 그리고 군경과 국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권평화 교육도 체계적으로 추진해야 하며, 전쟁과 학살 관련 각종 기록물들을 정리하고 정비하여 후세에 남기는 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그와 함께 반백년 이상 짓눌려 지내온 피해자와 유족들이 사회의 성원으로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피해의 완전한 회복을 위한 각종 조치도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피해에 대한 국가배상과 함께 피해 유족들에 대한 폭넓은 지원책이 적극 검토돼야 한다. 이러한 피해의 회복과 함께 가해 책임자들의 진정한 사죄가 동반될 때 이곳 고양 지역과 한반도는 비로소 전쟁과 학살의 상흔을 씻어내고 평화의 땅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유족들의 요구이기도 한 후속조치의 주요 목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국가의 공식 사과
- 국가 최고 책임자의 공식 사과 (국가의 궁극적인 책임)
- 경찰 최고 책임자의 공식 사과 (학살의 직접 책임)
- 지방자치체 책임자의 공식 사과 (유족들의 그간의 고통을 방치한 지자체의 책임)

2) 위령제 및 기념행사
- 매년 1회 올리는 합동위령제를 국가 책임하에 국가 예산(또는 지방자치체 예산)으로 공식 편성하여 치러야 한다.
- 기념행사(종교행사, 문화행사, 학술행사, 보고서 발간)를 내실있게 추진하여 학살의 교훈을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3) 유해 안치
- 현재 서울대에 임시 보관중인 금정굴 유해를 국가 차원에서 공식 감정한 후 금정굴 아래 양지바른 곳에 하루 빨리 안치해야 한다.
- 유해 안치소(유골탑) 앞에 영령들의 영혼을 달래는 위령탑을 건립해야 한다.
- 유해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석동 귀일안골 현장도 조속히 발굴하여 공식 감정 후 안치해야 한다.

4) 학살현장 보존
- 금정굴 현장은 향후 인권평화의 산 교육장이자 순례지로 긴요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잘 정비하여 보존해야 한다.

5) 평화공원 조성
- 금정굴 현장과 유해 안치소, 위령탑, 역사관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평화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

6) 희생자 및 유족들의 명예회복, 피해회복
- 호적이 잘못 기재된 경우 호적을 정정해야 한다.
- 사건으로 인해 후유증을 앓고 있는 부상자의 치료사업, 유족들에 대한 원호사업을 조속히 시행해야 한다.
- 사건으로 인해 흩어졌지만 아직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족들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제반 조치를 취해야 한다.
- 희생자와 유족들이 입은 피해를 배상하는 등, 피해 유족들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사회의 당당한 성원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그밖의 각종 조치와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 유족회 활동을 공식 지원하여 그 아픔을 전 시민이 함께 나누며 인권평화의 산 증인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7) 책임자 및 관련자의 사죄와 참배, 그리고 화해
- 당시 학살에 직접, 간접으로 가담했던 경찰과 인사들의 사죄와 참배가 있어야 한다.
- 진실규명과 위령사업을 지연시켜온 정부와 고양시의 책임있는 인사들과 경찰 책임자의 사죄와 참배가 있어야 한다.
- 전쟁기의 아픈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는 전시민적 화해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8) 기록 및 교육, 재발방지
- 국가의 각종 기록물과 고양시사를 비롯한 고양시의 모든 공식 간행물의 제반 오류를 바로잡고 금정굴사건을 비롯한 전쟁기의 피해를 상세히 수록해야 한다.
- 금정굴사건과 고양부역혐의사건은 물론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전쟁기의 숨겨진 피해를 일제히 조사 정리 기록하고 이 자료와 유물, 유품 등을 토대로 역사관을 만들어 후세의 교육공간으로 삼아야 한다.
- 고양교육청 및 경기, 서울교육청과 협의하여 고양시 및 수도권 각급 학교의 모든 학생들에게 금정굴을 비롯한 전쟁기 학살 특별수업(현장답사 포함)을 실시하고 고양시 및 수도권 소재 학생들의 금정굴 순례를 추진해야 한다.
- 고양시 경찰을 포함한 고양시 전 공무원의 금정굴 참배를 추진해야 하고, 경찰 대상의 특별 인권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 군, 경찰과 공무원을 대상으로 전쟁 중 민간인 보호에 관한 법률과 국제 인도법 교육을 의무화하는 등, 국민의 생명과 인권의 소중함을 자각하는 평화인권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전 국민을 대상으로 평화인권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 비무장민간인의 인권을 침해할 위험이 있는 국가보안법, 계엄법, 위수령, 군형법 등 제반 법률 내의 관련 조항들을 개정하여 국민의 인권보호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인권평화통일의 전진도시 기반 구축
1) 학살현장 정비 보존, 유해 공식 안치, 위령탑 건립, 역사관 건립을 축으로 하여 금정굴 현장 남쪽 사면(탄현근린공원 부지의 동측 1/4)에 가칭 ‘고양평화공원’을 조성하여 수도권의 상징적인 학살 순례지이자 인권평화통일 학습교육장으로 만들어간다.
2) 킨텍스 내의 시설 등과 연계하여 인권평화통일 도시의 물적 기반을 구축한다.
3) 공직자, 시민,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인권교육, 민간인학살과 인권평화통일 관련 각종 문화예술학술 활동과 행사를 통해 시민들의 인권평화 감수성을 높이고 시민의식을 함양하며 도시의 새로운 색깔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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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2005년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의 금정굴 시굴조사시 제출한 유족회와 시민단체의 의견서

(1) 발굴 마무리
- 발굴 마무리를 위한 확인 작업: 조사에서는 10년 전의 발굴지점까지를 조사한 후 더 이상의 유골이 묻혀 있지 않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만에 하나 단 한 사람 희생자의 유골이라도 더 묻혀 있을 경우에 대비하여 마무리 확인 작업은 필요할 것임(예: 2-3미터 추가 굴착)
- 발굴 완료지점 표지: 향후 굴의 붕괴 등에 대비한 표지 설치

(2) 현장 안전대책
- 학살현장 보존 방안이 확정되고 그 예산이 확보되어 집행될 때까지 현재의 위험한 상태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음
- 더욱이 현장이 탄현근린공원의 산책로이자 황룡산-고봉산 등산로의 축이라서 일일 통행량이 많은데다 고양파주지역 인권평화통일기행의 순례지로 정착하고 있어 안전대책이 시급한 상황임
- 빗물이 스며들거나 그밖의 외부 충격의 결과로 굴이 붕괴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해둘 필요가 있음
- 따라서 공식 현장보존책이 취해질 때까지에 대비한 임시 안전대책을 시급히 서둘러야 함
- 응급 안전대책의 내용:
1) 굴 측면 보강 등 굴 붕괴 방지책
2) 승강장치 보강 등 향후 현장 조사, 취재, 순례에 대비한 안전장치
3) 굴 주변 울타리와 출입문 설치
4) 빗물 유입으로 인한 굴 붕괴 방지와 미관을 위한 굴 지붕 설치

(3) 학살현장 보존
- 이전의 국가기관의 부당한 권력행사의 증거이자 우리의 슬픈 역사의 생생한 단면인 학살 현장을 잘 보존하여 후세에 교훈을 남기는 것은 국가의 책임임
- 학살지 소재지의 지방자치체는 그 한스런 역사의 현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인권평화 교육장으로 승화시켜 보존해가야 할 책무가 있고, 또 인권평화통일의 가치가 갈수록 중요시되는 지금 이를 잘 활용할 경우 의미있는 가치들을 다양하게 창출해낼 수 있음
- 금정굴 현장은 이제까지 밝혀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지 중 수도권 최대의 학살지이고, 10년 전에 유족들의 자체 발굴로 이미 전국에 널리 알려진 역사의 현장인 바, 이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학살지 소재 지방자치체의 수치이자 무능의 표본임
- 금정굴 현장은 올 12월 1일 중앙정부 차원의 과거사정리위원회 출범과 동시에 주요한 조사 대상지가 될 예정임
- 그와 함께 금정굴 현장은 이미 수도권 인권평화통일 기행의 주요 순례지로 정착했고, 앞으로는 그 수와 빈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으로 예상됨
- 학살 현장을 잘 정비하여 보존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며, 고양시의 인권평화통일 이미지 고양에도 큰 보탬이 될 것임
- 따라서 중앙정부 차원의 조사 후 후속조치가 취해지기 이전에 지방자치체에서 앞장서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경우 중앙정부나 경기도의 의미있는 지원을 충분히 받아낼 수 있고, 그 부대효과도 훨씬 커짐
- 현장 보존책의 내용:
1) 벽면 보강
2) 안전한 승강장치 - 현장 체험, 견학을 위한 장치
3) 평화의 탑 또는 평화의 종각 - 학살 현장임을 알리며 평화를 염원하는 건축물
4) 평화의 벽 - 학살 사실을 알리는 글.그림, 발굴된 유해를 상징하는 조각품, 평화와 상생을 염원하는 글.그림 등을 부조로 새김 - 주변 안전장치를 겸함
5) 진입로 - 현장 체험, 견학, 행사를 위한 진입로 개설
6) 안내판 등 - 현장과 사실을 알리는 각종 부대 시설물

(4) 유해 보존처리 및 감정
- 1995년 유족들의 자체 발굴 후 서울대 병원 창고에 임시 보관돼 있는 유해와 유품들이 해가 갈수록 눈에 띄게 부식되고 있음
- 권력의 불법 사용으로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의 유해이자 학살과 진상조사의 중요한 증거물들이 책임있는 국가기관들의 책무 방기로 유실되고 있는 것은 문명국가의 크나큰 수치임
- 올 12월 중앙정부 차원의 과거사정리위원회 출범 후 국가기관의 공식 조사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후속조치가 취해지기 전까지 유해와 유물들이 더 이상 유실되어서는 아니 됨
- 또한 1995-1996년 서울대 이윤성 교수의 1차감정결과는 온전하게 발굴된 오른쪽 대퇴부 유골을 기준으로 희생자 수를 최소 153명으로 추정하는 극히 초보적인 수준의 감정이었으므로, 유해가 더 유실되기 전에 유해를 정밀 감정할 필요가 있음
- 따라서 단계적으로라도 유해 보존 처리 및 감정 절차를 밟아나가는 것이 필수적임
- 과제
1) 유해 및 유품의 보존 처리 -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공식 조사가 끝난 뒤 유해가 공식 처리될 때까지 현 상태에서 더 이상의 부식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응급조치임
2) 유해 및 유품 감정 - 정확한 피해자 수, 성별, 나이, 인적 사항, 사망 사유, 학살 당시 정황 등을 알아내기 위한 것으로, 더 이상의 부식이 진행되기 전에 시행해야 함
3) 유전자 감식 - 발굴된 유해와 피해자 유족들의 유전자를 감식하여 상호 비교함으로써 피해자-유족 관계를 밝히기 위한 조치임

(5) 유해 안치
-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을 이제나마 양지바른 곳에 모셔서 그 넋들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마음을 달래며 국가 차원에서 제사라도 지내주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는 것은 인권과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나라와 지방자치체의 기본 책무임
- 유해 안치 시기는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상 조사 후 후속 조치가 취해지는 시점인 2-3년 뒤가 바람직할 것으로 사료됨
- 현재 유족들의 의견은 양지바른 곳에 합동묘소 또는 유골탑을 조성하자는 의견이 주류임. 화장 여부와 일부 유해의 상징적인 전시 여부는 유족들의 의견을 감안하여 추후에 결정해도 될 것임
- 합동묘역 또는 유골탑은 금정굴 현장의 남쪽 사면(탄현근린공원 부지 내)이 바람직할 것으로 사료됨

(6) 주변 시설물 - 평화공원
- 수도권 최대의 학살지이자 통일의 길목에 있는 금정굴 현장과 합동묘역(유골탑), 위령탑, 유품과 자료를 보관하는 사료관 등을 연계하여 가칭 ‘고양평화공원’을 만들 것을 제안함
- 향후 예상되는 많은 순례객, 수도권 일대의 인권평화통일 견학 및 기행 인구 등을 미리 감안하여 고양시를 인권평화통일의 상징도시로 만들어가는 구상을 구체화해갈 필요가 있음
- 국제전시장 부대시설과 국제회의장에 각종 인권평화통일 관련회의를 유치하면서 이 평화공원과 연계하여 인권평화통일의 이미지를 고양시켜간다면 고양시의 또 하나의 상징 브랜드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임
- 금정굴 현장이 고봉산과 황룡산 축의 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는 점을 활용하여, 현 고봉산주유소 남쪽, 고봉로 위에다 생태다리를 놓고 ‘평화의 다리’라 명명한다면, 단절된 녹지축 및 산책로 연결의 의미로도 큰 의미가 있을 것임
- 금정굴 현장의 남쪽 사면이 대부분 탄현근린공원 부지이므로, 평화공원 조성에는 별도의 부지가 별로 필요없음(금정굴 현장 주위 200여 평과 공원 진입로 200여 평만 추가 매입하면 됨). 즉, 탄현근린공원 부지의 동측 약 1/4 면적의 골짜기 일대를 평화공원으로 설정하고 관련시설을 설치할 것을 제안함
- 가칭 ‘고양평화공원’은 고양시는 물론 수도권 일대의 학생과 일반인들이 오며 가며 들러 인권과 평화와 통일을 명상, 체험하고 돌아가는 명소로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됨
- 평화공원의 기본 시설물:
1) 평화의 탑(또는 종각), 평화의 벽 - 금정굴 현장
2) 희생자 합동묘역(또는 유골탑)
3) 희생자 위령탑
4) 평화박물관(사료관) - 유품 및 자료, 기록 전시
5) 평화교육관
6) 학살 체험로
7) 평화의 다리
8) 평화의 숲
9) 평화의 정원 - 조형물
10) 평화의 광장 - 행사장, 주차장
11) 진입로
* 이외에는 시설물을 최대한 억제하고 시설물도 될수록 작게 만들고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려 조용히 명상, 산책하며 피부로 평화를 느끼고 돌아가는 명소로 만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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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큰 고개는 넘었으나, 아직 탄탄대로는 나오지 않고 앞길이 오리무중이다. 지난 16년 동안 시민회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온 금정굴학살 규명운동이 그 결실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민간인학살은 물론 과거사 전반의 진상규명에 소극적인 정부와 지자체가 눈앞에 짙은 연무를 흩뿌리고 있는 지금, 어떤 선택과 집중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우리를 탄탄대로가 난 평지로 안내해줄까? 세상사가 거의 그렇듯이, 뾰족한 왕도는 아마 없을 것이다. 뱀 같은 지혜와 사자 같은 용기, 황소 같은 뚝심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것 외에는.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목표지점을 잃지 않는 것이다. 목표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설령 좀 에두르는 한이 있더라도 결국엔 목적지에 다다른다. 비록 연무에 싸여 있긴 하지만 우리의 목표지점이 바로 저만치에 있는 지금, 우리의 목표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이야기를 끝내자.

금정굴학살 규명운동, 나아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은 피로 얼룩진 이 죽음의 땅을 삶의 땅으로 거듭나게 하고, 학살과 대립의 국가를 인권과 평화의 국가로 재탄생시키며, 그 속에서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운동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해원과 인권과 평화와 민주주의와 역사바로세우기로 집약되고, 그 과정에서 국가의 책임과 존재의의를 물으며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중앙정부가 머뭇거리면 지방자치체가 앞장설 수 있고, 지방자치체마저 머뭇거리면 시민사회에서 강력하게 발동을 걸 수 있다.

(그림: 만화가 박건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