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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진상규명, 그 멀고도 험한 길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은 학살 당시부터 일어났다. 1951년 2월 거창 신원면 일대에서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주민 719명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그해 3월,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이 국회 본회의에서 거창 학살을 폭로했다. 이에 국방장관 신성모는 사실을 부인하고 통비분자 187명이 죽은 것으로 사건을 조작했으나 내무, 법무장관이 사실을 부분 시인하면서 국회에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현지 시찰에 나섰다. 그러나 현지에 내려간 국회와 정부(내무, 법무, 국방) 합동조사단은 가해 군인들의 집요한 방해를 받던 중 당시 경남지역 계엄사 민사부장 김종원이 신성모 국방과 모의하여 짜낸 무장공비 위장 습격 계략에 말려 그만 철수하고 만다. 이후 가해 군인들의 위장 매복 사실이 드러나면서 책임자들이 실형을 언도받지만 곧 유야무야되고 사건 책임자들은 오히려 승승장구의 길을 걷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다.

1950년 7,8월에 보도연맹원 등 335명이 학살당한 경남 진영에서도 학살 직후 유족 등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학살을 주도한 진영지서장 김병희 등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한 목사의 죽음에 미국 선교단체와 국제연합 한국부흥위원단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미국 언론이 이 사건을 보도한 것이 주요한 배경이었다. 그 결과 김병희 외 3인에게 사형이 구형됐으나 김병희만 사형이 선고 집행됐고, 나머지는 10년 징혁형을 받았지만 한 달도 안 돼서 풀려났다. 이 역시 위의 김종원 등의 협잡으로 사건이 유야무야된 경우인데, 진영 사건은 당시 광범하게 자행됐던 수많은 학살 중에서 사건 책임자가 사형에 처해진 유일무이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범죄를 저지르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해결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100만 민간인학살은 비명에 죽어간 자는 있으되 죽인 자도, 책임지는 이도 없고, 나아가 사실 자체도 없던 일이 되는 수순을 밟아갔다. 그래도 1950년대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기는 했으나 반공과 북진통일을 게거품 물고 떠드는 정권의 기세에 눌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4.19 직후의 전국유족회와 4대 국회

그러던 중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전국의 유족들이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학살자 처단 등을 요구하며 유족회의 깃발을 들기 시작했다. 경남의 거창, 동래, 진영, 마산, 창원, 김해, 금창, 밀양, 함양, 충무, 경북의 대구, 경주, 경산, 문경 등지에서 피학살자 유족회가 결성되고, 1960년 6월 16일에는 경북을 포괄하는 ‘경북지구피학살자유족연합회’가, 8월 28일에는 '경남지구피학살자유족연합회'가 결성되었으며, 10월 20일에는 서울 종로의 전 자유당 회의실에서 전국의 시군 유족회 대표 50여 명이 모여 '전국유족회'를 창립했다. 유족회는 유골을 발굴하여 합동묘역을 조성하고 지역별로 합동위령제를 지내는 한편, 대통령, 국무총리 등 정부 각 기관과 국회 등에 청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런 노력이 시작되면서 1960년 4대 국회는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여 학살사건을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전쟁 때에도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던 거창의 유족들이 4.19 직후 학살 당시 가해자에게 협력했던 박영보 전 신원면장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며 항의하는 등, 유족들의 진상조사 요구가 높아지고 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1960년 5월 23일 제4대 국회 제19차 본회의에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경남반, 경북반, 전남반을 편성하여 조사에 착수했다. 특위는 1960년 5월 31일부터 11일 동안 현장을 조사한 후 <양민학살사건진상보고서>를 제출했는데, 보고서에는 경남의 거창, 거제, 함양, 동래, 산청, 울산, 충무, 구포, 마산, 산청 등지에서 3,085명, 경북의 대구시 일대, 대구 형무소, 문경 등지에서 2,200명, 전남 함평군에서 524명, 전북 순창군에서 1,028명, 제주에서 1,878명 등 총 8,715명의 양민이 학살됐고, 10,041호의가옥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마저도 전체 피해의 일부만을 조사한 것에 불과해 피해 신고가 증가일로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4대 국회는 내무, 법무, 국방의 3부 장관을 위원회에 출석시켜 신중하게 토의한 결과, 이를 행정부에 이관하여 장시일에 걸쳐 정확하고 상세한 실정을 조사토록 결의했다. 국회 특위의 조사가 지극히 부분적이었다는 것은 조사 시도가 3개뿐이고 조사 기간이 11일밖에 안 되었다는 것, 그리고 4.3위원회의 조사 결과 이제 사건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 제주도(피학살자 3만여 명 추정)를 비교해볼 때 당시 피학살자의 극히 일부(약 1/20)밖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분명히 할 수 있다.

5.16 쿠데타 세력의 부관참시

새롭게 출범한 장면 정부에서 미흡하나마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진행하려던 계획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혁명공약을 내세운 5.16 쿠데타 정권은 극우반공체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유족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법’을 만들어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들을 체포, 재판에 회부했다. 검찰은 이들이 반국가단체를 결성하여 북을 이롭게 하고 좌익용공의식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유족회 간부들에게 사형, 무기 등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이들에게 '특수반국가행위' 죄를 적용하여 사형 1명(전국유족회 회장 이원식, 나중에 감형), 징역 15년 3명 등 수십 명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게다가 유족들을 검거하면서 유골발굴일지와 유골 수집철, 피학살자 조사명부, 유족회원 가입명단, 학살자 고발장, 유골 상자 등 학살 진상규명에 결정적 단서가 될 관련 기록물들을 남김없이 압수, 폐기하여(5.16 군사정부 포고령 제18호) 이후의 학살 진상조사를 원천 봉쇄했다. 또 피학살자들의 합동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불사르거나 바다에 내다버리고 비석을 뽑아 부수는 부관참시까지 자행했다. 이로써 민간인학살은 다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금기 중의 금기 사항이 되었고, 1987년까지 강요된 침묵의 세월이 계속되었다.

26년의 세월은 길었다. 진상규명운동 탄압과 뒤이은 연좌제의 굴레 하에서 유족 1세들은 점점 힘을 잃어갔고, 살기 위해 사건들을 잊어야만 했으며, 고통과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2세들한테까지 사실을 함구하면서 먹고 사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는 사이에 학살 사실은 하나 둘 묻혀져 없던 일이 되어갔다. 극악무도한 군사독재하에서 사실을 아는 학자, 언론인 등의 지식인, 양심적 종교인, 사회운동가들까지도 반인륜 범죄인 학살 사실에 침묵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크고 작은 인권유린이 난무하는 반인권국가의 표본이 되었다.

지역별 유족회와 사회단체, 연구자들

그러나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제든 비어져 나와 그 존재를 알리는 법.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유족들이 드디어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4.3과 거창을 필두로 곳곳에서 유족들이 학살 문제를 다시 제기하기 시작했고, 뜻있는 사회단체와 언론인, 연구자들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 말까지, 제주, 거창, 산청, 함평, 고양, 문경, 노근리, 여수 등 전국적으로 30개 정도의 지역별, 사건별 유족회나 대책위가 결성되어 활동을 펼치기에 이른다. 각지의 유족회는 지역에서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아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고 국회와 지방의회, 청와대 등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청원과 진정을 수없이 내왔다. 또 흩어진 유족들을 찾고 학살지를 추적하는 등 학살의 증거들을 모아왔다. 그리고 2000년 9월에는 각 지역 유족회가 뜻을 합쳐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전국유족협의회'를 결성하고 전국의 민간인학살 문제의 통합 해결을 촉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양심적인 학자와 언론인, 사회단체,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반백년 이상의 고통스런 삶을 살아온 유족들에게는 삶 주체가 투쟁이었고, 이제 연로해진 유족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맡기는 것은 사회의 직무유기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지역 차원에서도 민간인학살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소명으로 생각하는 단체들이 생겨나, 지역 내 사건의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하면서 유족회 활동을 지원하고 유족회와 함께 위령제를 거행하는 등의 행사를 치르고 있다. 학살 지역에 근거를 둔 이들 단체는 자기 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을 지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평화운동 차원에서 접근하는 동시에 다른 지역 또는 전국 단체들과 함께 공동 활동도 펼치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이들 단체가 모여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전국사회단체협의회’를 결성했다.

이들 사회단체는 전국적으로 30여 개 단체가 각 지역의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고양, 여수, 순천, 충북, 홍성, 인천 등 지역 차원에서 단체들을 규합하여 대책위를 구성, 활동하는 곳도 있다. 이들은 유족들과 함께 지역 사건에 대해 자체 조사를 실시하고 학살실태보고서나 자료집을 발간하고 학살실태 토론회나 증언대회를 열면서 대국민 홍보에 힘써 왔다. 또 국회와 지방의회, 청와대 등에 진정, 청원을 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시군의회나 도의회에서 특위를 구성하여 ‘조사보고서’를 내게 하는 등의 성과를 올리기도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지자체로부터 위령사업 및 실태조사 예산을 지원받는 곳도 계속 늘고 있다. 또한 전국 단체들 중에도 문제 해결에 동참하는 단체들이 생겨났다.

한편, 연구자와 문인, 언론들도 진상규명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부터 제주 4.3을 중심으로 사건 조사 및 보도에 참여하는 연구자와 언론들이 생겨났고, 학살사건과 관련자들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도 선보이기 시작했다. 제주4.3연구소와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는 각각 4.3사건과 여순사건에 관한 여러 권의 실태보고서를 펴냈고, 개인 연구자들도 자료조사, 구술조사 내용을 정리한 논문이나 기고문, 단행본 집필로 진상규명작업에 합류했으며, 2000년을 전후해서는 민간인학살을 주제로 다루는 학술대회도 열리기 시작했다. 언론 중에서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창간된 <월간 말>, 제주의 <제민일보>와 <제주 MBC>, <시사저널> <MBC PD수첩> 등이 학살 보도를 선도했다. 각종 역사연구회와 사회연구소, 세미나팀, 조사모임에 속해 있던 연구자들, 그밖에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학살 조사에 참여하거나 관심을 보인 연구자들이 삼삼오오 모이다가 2004년에는 제노사이드연구회를 결성하여 답사, 심포지엄 등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1999-2000년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의 분수령이었다. 1996년에 제정된 거창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거창양민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위령사업이 착수되고 있었고, 4.3특별법의 제정과 함께 제주 4.3사건의 진상조사가 시작되었으며, AP 통신에 노근리 사건이 대서특필된 후 한미합동조사반이 구성되어 조사에 착수했다. 국회에는 개별 학살사건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특별법 청원이 봇물을 이루었고, 전국 곳곳에 묻혀져 있던 사건들이 그 존재를 알리며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개별 사건을 다루는 특별법과 조사위원회를 계속 만드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의 통합 해결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태동했고, 그 귀결이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이하 ‘학살규명 범국민위원회’)였다.

학살규명 범국민위원회는 2000년 9월 7일 전국유족협의회와 민간인학살관련 전국사회단체, 그리고 관련 연구자와 언론인, 종교인, 일반시민들이 모여 결성했다. 학살규명 범국민위원회는 발족 이래 지역단체, 유족들과 함께 전국의 학살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모아 전국 학살지도 및 학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으며, 영상 홍보물, 교육선전 책자를 제작하여 대국민 교육홍보 활동을 펼쳐왔다. 2005년에는 그간의 실태조사 결과를 집대성하여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와 <민간인학살 인권피해실태보고서> 등을 펴냈다. 또한 민간인학살 문제를 사회의 주요 의제로 만들기 위해 ‘전쟁과 인권 심포지엄’, 피학살자 유족 증언대회, 전국합동위령제 등의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고, 유족회 결성 지원과 소식지 발간, 지역별 위령제 지원 등의 사업을 통해 전국의 유족회와 대책위 활동을 측면 지원해왔다.

그리고 국가가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에 책임 있게 나설 것을 촉구하며 전국의 유족들과 함께 장기 농성투쟁을 전개하고 법안 토론회와 공청회를 지속적으로 여는 등, 민간인학살 전국통합특별법 제정사업을 줄기차게 전개해왔다. 그 결과, 민간인학살 통합특별법 제정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2005년 5월 독재정권하 의문사건 등의 진실규명까지 포함한 통합과거사법의 제정으로 그 결실을 보았다.

지방의회와 중앙정부

1987년 이후 국가기관에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에 먼저 발을 뗀 곳은 아무래도 학살 문제가 일찍부터 제기된 지역의 지방의회였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전면 시행되면서 주민들의 아픔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다가 의회에 진출한 의원들을 중심으로 문제 해결의 출발점인 진상조사라도 착수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도 전체 차원에서 진행된 제주도 외에, 시도 단위에서는 전라북도에 이어 경상북도 의회에서 신고접수 후 특위를 구성하여 조사를 실시했고, 경기도에서 고양금정굴 사건을 조사하여 각각 보고서를 펴냈다. 시군의회 단위에서는 전남 함평군과 화순군, 담양군, 나주시, 전북 익산시, 경남 산청군과 거창군, 경북 경산시와 예천군, 충북 괴산군 등에서 자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학살실태를 조사한 후 보고서나 백서를 펴냈다. 지방의회에서 사건을 확인한 뒤 일부 지자체의 경우 지역 위령제나 유족회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지만 법적 근거가 없어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일부 지방의회에서는 국회와 정부에 입법과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건의서나 청원서를 채택, 전달하기도 했다.

국가 차원에서도 전혀 조치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1990년대 들어 각지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요구가 활발해지면서 국회와 정부에 특별법 제정과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청원과 진정이 쇄도했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이를 회피하던 정부와 국회도 그 요구를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먼저 1996년에 거창사건명예회복법이 제정되었고, 이어서 1999년 말에는 4.3진상규명명예회복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유족들과 지역사회의 끈질긴 요구에 화답한 것이긴 하나, 다른 사건들은 외면한 채 아쉽게도 두 법안만 통과된 데에는 당시 김영삼,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고려가 크게 작용했다. 1999년 노근리 사건이 외신에 대서특필된 뒤에는 한미 합동조사반을 구성, 진상조사에 착수하여 2001년 노근리사건 보고서를 펴냈고, 이어 2004년에는 노근리사건피해자심사명예회복법을 제정하여 후속 조치에 착수했다. 법안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4.3법을 제외한 두 법은 명예회복에 치중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4.3법에 따라 구성된 4.3위원회에서는 진상조사 후 조사보고서를 채택하고 대통령이 국가권력의 불법적 사용에 대해 공식 사과까지 했지만, 조사기구의 권한의 미약함, 관계집단의 집요한 문제제기 등으로 말미암아 학살 책임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등 진상규명이 미흡했다는 평가다.

과거사기본법 제정과 진실화해위원회 출범

문제는 위의 세 가지 사건의 수십 배 규모에 달하는 전쟁전후의 다종다양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이었다. 2000년 이후 민간인학살진상규명전국통합특별법의 제정을 계속 미뤄오던 국회와 정부는 2005년 5월 마침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을 제정했다. 2004년부터 물꼬를 튼 포괄적 과거청산 움직임에 따라 일제하, 한국전쟁기, 독재정권하의 모든 과거사를 통합 해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으나, 결국 일제하의 친일, 강제동원 문제를 다루는 법은 각각 별도로 제정되고, 전쟁기의 민간인집단학살과 독재정권 하의 각종 의문사 의혹사건에다 독립운동 해외동포사까지 아울러 다루는 법이 통합과거사법으로 제정된 것이다. 법제정 과정에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법의 취지가 상당 부분 왜곡됐고, 군의문사 사건들은 제외돼 별도의 법으로 만들어졌다.

어쨌든 이로써 지난 반백년 이상 너무도 당연한 국가의 책무, 진실을 밝혀야 할 국가의 책무를 방기하고 오히려 압살해오던 대한민국이 과거의 과오를 씻고 미래를 밝힐 수 있는 주춧돌은 놓아졌다. 법에 따라 만들어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넘어야 할 장벽은 많다. 우선 진실규명에 소극적이거나 오히려 방해하려는 세력들의 움직임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하고,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탄생한 위원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적 소명을 다할 수 있는 지위와 역할을 확보해야 하고, 국가기관들에 진실규명과 위원회의 중요성을 알려 자료 협력과 행정 지원, 예산 지원 등의 뒷받침을 최대한 받아내야 하고, 미국 등 관련국가의 자료 협력 등 진실규명을 위해 필요한 지원을 최대한 이끌어내야 하고, 위원회에 부과된 다양한 과거사 문제들의 본질과 경중을 헤아려 슬기롭게 다루어야 하며, 후대에 부끄럽지 않을 진실규명에 필요한 권한과 인력과 예산을 충분히 확보해야 하고, 진실규명 이후의 위령사업, 명예회복, 화해, 배상 또는 보상, 처벌, 역사기록, 기념사업 등을 슬기롭게 준비해야 하는 등, 첩첩산중이다.

그중 민간인학살 문제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사건의 특성상 특정 지역, 특정 시기의 사건만 따로 떼어 진실규명을 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는 원천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조사를 할 수 있는 편제와 인력, 권한, 예산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진실 자체에 접근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그 조건을 만들어내는 일은 일차적으로는 위원회의 임무이고, 나아가서는 인권평화세상을 바라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임무이기도 하다.

일대 광풍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지 반백 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야, 수백만 유족들의 염원과 유족회, 관련 사회단체들의 피나는 노력에 힘입어, 그동안 까맣게 묻혀 있던 역사의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대학살의 진실을 얼마만큼이나 밝혀내고 그 의미를 얼마나 제대로 성찰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3,4년이 지나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활동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는 지금, 진실화해위의 조사는 명백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고, 정부의 직무유기와 책임방기는 도를 넘어서고 있다. - 계속)

(글: 이무열, 그림: 박건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