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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라는 나라

러시아의 역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러시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에 대해 정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시대가 흐르면서 러시아의 세계가 점점 확대된데다가, 좁은 의미의 러시아와 넓은 의미의 러시아가 두루 혼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슬라브 인 이전의 시대는 일단 접어두고 그 후의 역사만 볼 때, 맨 먼저 '루시의 나라'라고 불린 동슬라브 인의 국가가 있었다. 키예프가 그 중심이었으므로 '키예프 러시아'라고도 한다. 키예프 대공국이 몰락하여 키예프 러시아가 분열한 후 짧은 기간의 블라디미르 대공국 시대에 이어 모스크바 대공국이 전면에 대두했다. 분열 과정에서 동슬라브 인은 언어의 통일성을 잃어버리고 모스크바 중심의 대러시아 인, 키예프 중심의 소러시아(우크라이나) 인, 서쪽의 백러시아(벨라루시) 인의 셋으로 갈라졌다.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이 힘을 길러 17세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하에 있던 우크라이나를 병합하고, 그보다 조금 전 16세기 말엽부터 시베리아 진출을 시작하면서 대제국의 기반을 닦는다. 이때까지는 '러시아'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루시'라는 옛 이름을 국명으로 사용했다.

러시아(러시아 어 발음으로는 '로시야')라는 이름이 정식 국명으로 채택된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시대에 러시아 제국이 성립하면서다. 이때 백ㆍ청ㆍ적의 삼색기가 이 나라 배에 꽂는 깃발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와 발트 지방까지를 아우르는 유럽 러시아와 아시아의 시베리아 지방을 지배했다. 이후 제국이 팽창하면서 핀란드와 폴란드, 카프카스 지방, 중앙 아시아, 극동 연해주 지방을 제국의 깃발 아래 복속시켰다. 러시아 제국이 최대 판도를 이룬 것은 19세기 말부터 1914년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은 붕괴했다. 10월혁명 후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크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이 나라의 권력이 미치고 있던 영역은 매우 유동적이었다. 핀란드, 폴란드, 발트 3국은 곧바로 독립했다. 이윽고 내전이 소비에트측의 승리로 끝을 맺은 후 1922년 러시아 공산당이 지도하는 4개 소비에트 공화국, 즉 러시아ㆍ백러시아ㆍ우크라이나ㆍ자카프카스 연방의 대표들이 모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을 결성한다.

이어 중앙 아시아의 소비에트화, 극동 공화국의 병합 등으로 영토가 확대되고, 마지막으로 1940년 발트 3국의 병합, 루마니아령 베사라비야(몰다비아)의 점령으로 소련은 15개 공화국의 연방이 되었다. 소련이 마침내 러시아 제국의 최대 판도에서 폴란드와 핀란드를 제외한 영토를 갖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계승자였다.

그후 최근에 와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는 가운데 1991년 쿠데타와 대중봉기로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었다. 먼저 발트 3국이 독립하여 연방에서 떨어져나갔고, 나머지 11개국은 차례로 독립을 선언한 후 독립국가공동체(CIS)를 결성했다. 
 
대외적으로 소련을 계승한 것은 옛 소련 영토의 4/5,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러시아 연방 공화국'으로, 혁명 전 러시아 제국의 삼색기를 국기로 정했다. 현재 러시아 공화국의 영토는 17세기 전반 로마노프 왕조 초기의 모스크바 대공국이 지배하던 땅에다 동시베리아와 극동 연해주 지방을 더한 영역이다.

러시아 공화국 인구의 약 80%는 대러시아 인이다. 나머지 20%는 매우 많은 민족들로 이루어져 러시아 연방 공화국 내의 자치공화국만도 20개가 넘는다. 러시아 공화국 역시 옛 소련과 마찬가지로 다민족 국가인 것이다. 나아가 러시아 인은 카자흐 공화국 인구의 30%, 우크라이나 공화국 인구의 20% 등, 옛 소련 구성 공화국 모두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를 생각할 때 러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나, 그 나라가 러시아 인을 중심으로 러시아 어로 교류하는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것과 아울러, 러시아 인의 세계가 러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 밖으로까지 폭넓게 열러 있음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에서는 넓은 의미의 러시아 세계, 즉 예전의 러시아 제국이나 붕괴 이전의 소련에 속해 있던 영토 전체를 러시아 사의 영역으로 보고 폭넓게 러시아의 역사를 조망하려 한다.




러시아의 대지

지구 표면 육지의 약 1/6(현재의 러시아 공화국만 하면 약 1/7.5)을 차지하는 러시아의 대지는 좁은 땅에 어깨를 맞부딪치며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크기를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동서로 약 1만km, 남북으로 약 4,000km에 걸쳐 유라시아 대륙의 약 40%를 점하고 있는 그 거대한 대지는 우리 나라 남북한을 합친 넓이의 약 100배이고 중국과 미국을 합한 것보다도 더 넓다. 그 넓은 영토와 그것에 살고 있는 다양한 민족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제정 러시아 이래의 큰 숙제였다.

러시아 국토의 첫번째 특징은 가도 가도 끝이 없이 펼쳐진 대지다. 해발 평균 500m의 낮은 우랄 산맥이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서쪽의 발트 해 연안에서 동쪽의 태평양 연안 가까이까지 산다운 산이 거의 없다. 군데군데 흐르는 강을 무시하면, 러시아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평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넓은 러시아의 평원은 동서로 길게 이어진 북쪽의 삼림지대와 남쪽의 초원(스텝)지대로 크게 나뉘고, 그 위아래로 북극해 연안에 동토지대, 남쪽에 사막지대가 펼쳐져 있다.

숲은 동슬라브 인의 영혼의 고향이다. 그들은 숲을 개간하여 먹을 것을 마련하고, 숲 속의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땔감을 대었다. 숲은 또한 그들을 외부로부터 지켜주는 자연의 방벽이기도 했다.

숲에서 나오면 드넓은 초원이 눈앞에 열린다. 초원은 러시아 인에게 끝없는 탐구의 장인 동시에 거기서 숱한 목숨을 잃은 운명의 땅이기도 했다. 러시아 인의 가슴 깊은 곳에는 '그 넓은 세계를 그리는 마음' '드넓은 공간을 앞에 둔 기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이 초원을 대하는 러시아 인의 태도였다. 삼림지대의 러시아 인과 초원지대의 유목민족들은 그 경계선에서 만나 천여 년의 세월 동안 싸움도 하고 교역도 했다. 이 두 지역이 단일한 행정체계 아래 통합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다.

러시아의 강들은 평원을 가로지르며 고요히 흐른다. 유럽 러시아에서는 북드비나 강과 페초라 강이 북극해로 흘러들며, 레나 강과 서드비나 강이 발트 해로 흐른다. 남쪽으로는 드네스트르, 부크, 드네프르, 돈 강이 흑해로 흐르며, 유럽 최대의 강인 볼가 강이 카스피해로 흘러든다. 이들 강은 몇몇 호수와 함께 좋은 수로망을 이루어 오랜 옛날부터 러시아 인의 젖줄 역할을 해왔고, 이 강들을 무대로 러시아의 역사가 엮어져왔다. 드넓은 시베리아 평원에서는 거대한 오브, 예니세이, 레나 강이 북으로 흘러 북극해에 닿고, 동쪽으로는 아무르 강이 중국과의 국경을 이루며 태평양으로 흘러든다.

러시아의 기후는 혹독하기 그지없다. 러시아는 북쪽에 있는 추운 나라다. 가장 남쪽인 흑해 연안이나 중앙아시아 지방도 위도 상으로 우리나라보다 북쪽에 있다. 여름은 잠깐 만에 지나가고 긴긴 겨울에는 해가 하늘에 떠 있는 시간이 짧다. 러시아의 남북 중앙쯤에 있는 모스크바의 경우, 겨울철에는 아침 9시나 돼서야 날이 밝고 오후 4시가 되면 벌써 어두워진다. 눈은 많고 비는 적다.

혹독한 기후는 러시아 인들의 인내심을 길러주는 한편으로, 농업의 발달에 장애가 되어 생산성을 시종 낮은 수준에 머무르게 했다. 시베리아의 타이가 숲에서 얻는 모피는 유럽에 고가상품으로 팔렸으나 모피라고 무한정 나올 수는 없었다. 러시아의 산업은 완만하게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지정학적 조건

러시아의 숲은 유럽으로 이어져 있다. 바랴기(노르만 인)를 '루시의 나라'의 지도자로 받아들인 데서도 볼 수 있듯이 서쪽 세계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폴란드ㆍ리투아니아ㆍ스웨덴 등, 서쪽의 이웃들이 끊임없이 러시아를 침략해오기 시작했다. 러시아도 필사의 전쟁을 거듭하여, 이윽고 발트 해 연안에 진출하고 또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여 한때 폴란드를 세계 지도에서 없애버리기도 했다. 러시아는 프랑스ㆍ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 등의 유럽 강국들을 이제 눈앞에 두게 되었다.

한편, 초원지대는 흑해 북안에서 동쪽 저 멀리 몽고고원까지 장벽 하나 없이 곧바로 이어져 있다. 초원에서 동슬라브 인은 동쪽에서 온 유목 기마민족과 마주쳤다. 유목민족들은 힘센 전사로서 복종을 거부할 경우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러나 복종하여 같이 살게 된 경우에는 그들 역시 동방의 문화를 전해주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러시아 인이 이윽고 초원의 주민들을 지배하고 그들과 뒤섞여 살게 된다. 마침내 러시아는 남으로 중국을 압박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을 온통 독차지하여 미국ㆍ일본과도 접하게 되었다.

남쪽 방면으로는 18세기 이래 투르크와 거듭 전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조금씩 영토를 확장한 결과, 19세기 중반에는 투르크의 뒤편에 자리 잡고 있던 영국과도 싸움을 치르게 되었다. 영국과의 대결은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티베트에서 극동까지에 걸쳐 진행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 시대에도 강국들에 포위되어 있던 러시아는 이제 그 포위망을 부수고 거대한 북유라시아 제국이 되었으나, 그 결과 서쪽 남쪽, 동쪽으로 더 힘이 센 세계열강들을 마주하기에 이르렀다.




민족과 언어와 종교

러시아는 다민족 사회로 민족구성이 아주 복잡하다. 러시아 제국이 팽창하면서 여러 민족들을 그 세계 안으로 끌어들인데다가, 그 후 효율적인 통치와 개발을 위해 곳곳에 많은 러시아 인들을 이주시킴으로써 그 복잡성을 증폭시켰다. 소수민족 문제는 제정 러시아 시대 이래로 큰 골칫거리의 하나였다. 소련 붕괴에도 그러한 민족문제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한 것이 큰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넓은 의미의 러시아 세계를 이루는 민족의 수는 120여 개에 이르는데, 민족에 따라 언어가 다르고 종교 분포도 달라 이질적인 요소들이 많다. 이들은 크게 보아 4∼5개의 무리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비중이 큰 민족은 전 인구의 절반 정도인 1억 4천만의 대러시아 인과 4,200만의 우크라이나 인, 1,000만 가까운 백러시아 인을 포괄하는 동슬라브 족이다. 총인구의 70%를 차지하고 이들이 서로 협조하고 때로는 반목, 대립하면서 러시아사의 주역으로서 사실상 러시아를 이끌어왔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 정교의 종교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이들 다음으로 많은 것은 19세기에 러시아에 편입된 투르크계의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들이다. 우즈베크인, 카자흐인, 투르크멘인, 키르기스인, 타지크인 등이 그들로서 총인구의 10%를 차지한다. 이들 외에 자카프카스(카프카스 산맥 너머)의 아제르바이잔인과, 타타르ㆍ추바슈ㆍ바슈키르 등 남우랄과 시베리아 지방의 여러 민족도 이 계열에 속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다.

다음으로, 세계인종의 전시장이라 할 만큼 다양한 민족들이 얽혀 살고 있는 카프카스 지방의 여러 민족이 있다. 그중 자카프카스의 그루지야인과 아르메니아인은 언어와 종교가 모두 크게 달라 인근의 아제르바이잔인과 함께 민족분쟁의 화약고 같은 구실을 해왔다. 이밖에도 북카프카스의 다케스탄 민족군과 잉구슈ㆍ체첸ㆍ오세트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있다.

북서부에는 옛 소련 구성원 중 가장 독자성이 강한 세 민족,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ㆍ에스토니아 인이 살고 있다. 생활수준도 가장 높고 가장 유럽적인 면모를 보이는 이 발트 지방의 세 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키릴 자모 대신 라틴 문자를 사용하며 카톨릭이나 개신교를 믿는다. 역사와 전통의 차이로 말미암아 소련 붕괴 후에도 독립국가공동체에 가담하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밖에 루마니아와의 접경지역에는 라틴계의 몰다비아 인이 살고 있고, 북서부와 시베리아 북부지방에 핀 우골계의 여러 민족이 있으며 시베리아와 극동지방에는 몽고계ㆍ퉁구스계ㆍ구시베리아의 여러 민족이 살고 있다. 또 상당수의 독일인과 유태인이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연해주에 살다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우리 한민족도 약 40만을 헤아린다.

언어 역시 민족의 수만큼이나 다양하여, 문장어를 가진 언어만도 70개에 달한다. 옛 소련에서는 러시아어와 각 공화국의 주된 민족 언어가 공용어로 통용되었으며, 비러시아인들 중 둘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수가 55%에 달했다.

러시아어는 슬라브어의 일족이지만, 그리스-로마어나 투르크어, 몽고어 혈통을 가진 단어들이 많다. 그리스-로마 계통의 단어가 많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 정교를 수용한 까닭이다. 정교회의 의식은 아름답다. 전승에 따르면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선택한 것은 정교의 의식이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교는 교회의 의식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몸소 경험하는 것을 지향한다. 15세기에 러시아의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다.

정교회에서는 이콘이라는 판화를 성상으로 사용하는데, 거기서 독특한 미의 세계가 생겨났다. 루블료프나 그레크 등 유명한 화가 외에도 무수히 많은 화공들이 깊은 신앙심이 배어나는 아름다운 성화상들을 남기고 있다. 또 정교회에서는 카톨릭이나 개신교와 달리 파이프오르간이나 오르간을 사용하지 않는다. 무반주로, 인간의 목소리만으로 성가를 부른다. 러시아 인의 음악성은 이러한 교회의식에서 연마되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가 된 이래로 러시아 인들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 삶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같은 정교회이면서도 그루지야에는 독자적인 그루지야 정교회가 있고, 아르메니아에는 정교회와 뿌리가 같으나 많은 면에서 의식을 달리하는 아르메니아 교회가 있다. 그밖에 발트 3국인과 폴란드 인ㆍ독일인은 카톨릭이나 개신교를 믿는다.

제2의 종교는 이슬람으로 신자 수가 5,000만에 달한다. 신도 수로 보면 아랍 세계에 버금가는 규모이다. 예전의 러시아 제국이나 그 후의 소련이나 모두 종교에 대해서는 관용을 보였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등지의 이슬람 전통은 크게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될 수 있었다.

이슬람교도 외에 불교를 믿는 몇몇 소수민족과 유태교도가 있다.  
  


러시아사의 몇 가지 특징
 
이상과 같은 조건 속에서 러시아사의 특징과 발전의 패턴이 형성됐다. 이것이 러시아사의 연속성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후진성의 의식이다. 러시아는 주변의 선진국들에 비해 자기네가 후진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선진국을 따라가려는 노력이 행해지고 발전을 가속시키려는 지향이 생겨나지만, 역으로 선진국에의 동화를 두려워하고 그에 반발하면서 자기 것을 지키려는 지향도 나타난다. 표트르 대제의 근대화 정책과 그에 대한 민중적 반발, 19세기의 서유럽파와 슬라브파의 논쟁 등이 그 예이다.

둘째는,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지만, 외부의 침략에 대한 강한 경계심, 안전보장에 대한 강한 집착이다. 이 점을 가장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1931년 2월에 행한 스탈린의 연설이다.

"속도를 늦추는 것은 낙오다. 낙오자는 두들겨 맞는다. 하지만 우리는 두들겨 맞지 않는다. 결단코 맞을 수 없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낙후되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짓밟혀온 기록이었다. 몽고의 칸이, 투르크의 총독이, 스웨덴의 왕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주가,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가, 일본 군벌이 끊임없이 우리를 짓밟아왔다. …이것이 착취자들의 법칙이다. 자본주의의 악랄한 규칙인 것이다. …우리는 선진국에 50년 내지 100년 뒤떨어져 있다. 우리는 이 거리를 10년 동안에 따라잡아야 한다. 우리는 전력 질주해야 한다."

셋째는 국가주의, 국가신앙이다. 후진적인데다가 외부 침략에 시달리다 보면 강력한 국가에 대한 관념이 형성되고 지지를 받게 되는 법이다. 러시아에서 강력한 국가권력은 사회의 내적 발전에 따라 생겨난 것이 아니라 외적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나라를 군사적으로 방위할 필요에 따라 강력한 국가가 출현한 것이다. 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는 사회조직을 창출하고 사회적 결합을 다져나갔다.

국가주의, 국가신앙에 대한 관념은 언어에서도 나타나는데, 러시아어에서 '국가'는 '군주, 주인'이라는 말에서 파생했고, '정부'는 '바르게 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국가는 곧 주인이고, 정부의 역할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관념은 뜨거운 조국애로 이어져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를 돌파해내는 저력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국가를 숭배하는 경향은 혁명이 성공하면 국가는 소멸해간다는 마르크스의 예견과는 달리 러시아 혁명으로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정착해가면서 이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사회주의 소련은 제정 러시아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동적이며 포괄적인 국가였다.

넷째는 제국 관념이다. 다민족을 지배하게 된 러시아는 제국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병합한 나라의 옛 지배자들을 자기네 지배계급, 귀족의 반열에 편입시켰다. 제국을 세운 것은 그러한 귀족들과 황제와 러시아 어였다. 심지어 사회주의 소련에까지도 그러한 제국 관념이 부분적으로 이전되었다.

다섯째는 '프라브다'와 '볼랴'의 꿈이다. 프라브다는 소련 공산당기관지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본디 이 말은 러시아 인의 전통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프라브다는 '진리ㆍ진실'이라는 뜻과 함께 실현되는 세계를 지향한다.

"거짓이 진리를 짓밟아 진리는 거짓을 피해 하늘로 달아나고, 성스러운 루시의 대지에는 거짓만이 횡행하여 땅이 울고 사람들은 분노한다"며, 잃어버린 '프라브다'의 회복을 희구하는 간절한 마음이 13∼15세기의 민중 종교시에 잘 표현되어 있다.

러시아의 민중들 가운데에는 지상을 지배하는 거짓을 타파하고 프라브다를 실현하는 것이 차르의 할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이윽고 그러한 생각은 "현재 제위에 있는 것은 가짜 차르이고 진짜 차르는 악인에게 추방당해 몸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구하기 위해 곧 돌아올 것이다"라는 관념으로 변했다. '구세주 차르'의 신화다. 19세기에 들어 그러한 관념은, 제위에 있는 차르가 우리에게 볼랴(자유)와 토지를 주려 하는데 나쁜 귀족들이 그 뜻을 막고 있다는 '통치하는 해방자 차르'의 신화로 변했다.

'볼랴'라는 말에는 '자유'와 '의지'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다. 즉,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상태로서의 자유를 뜻한다. 러시아 인은 전통적으로 "고기를 한점 더 먹는 것보다는 가슴 가득히 자유롭게 공기를 호흡하는 일을 보다 높은 가치"라고 믿었다. '카자흐의 자유'에도 이러한 민중의 바람이 녹아들어 있다.

이처럼 돌아오는 차르의 힘으로 프라브다와 볼랴를 일거에 실현하고자 하는 민중들의 희망이 국가와 혁명 사이에서 동요하며 근래의 역사를 이끌어온 추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세기 초엽의 러시아 혁명은 민중이 황제에게 프라브다를 구하여 동궁(겨울 궁전)을 향해 행진한 '피의 일요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위와 같은 여러 조건 위에서 러시아는 '위로부터의 혁명'이 거듭 반복되면서 발전해왔다. 영국의 소련사 연구가 E. H. 카는 그의 <일국사회주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발전 패턴은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개혁이 아래로부터 일어나지 않고 대외적 위기의 압력으로 행해진다. 지배층 내에서 뒤늦게나마 효과적인 권력과 그것을 행사할 강한 지도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러시아에서 개혁은 권력의 강화와 집중을 의미한다"

후진성의 의식, 안전보장에의 강한 집착, 국가주의 제국 관념은 '위로부터의 혁명'을 거듭 반복시킨다. '위로부터의 혁명'은 강한 외세와 대치하는 속에서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선, 강화할 목적으로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해 발동, 실행되는 대규모의 격렬한 개혁이다.

러시아 역사상 첫번째 '위로부터의 혁명'은 이반 뇌제에 의해 행해졌고 두번째는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혁명이며, 세번째는 19세기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이다. 그 뒤로 두 차례의 혁명에 이어 1929년 네번째로 스탈린의 '위로부터의 혁명'이 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다.

그전까지의 '위로부터의 혁명'이 모두 국가권력의 강화를 가져온 데 반해 페레스트로이카로 시작된 최근의 러시아 사태는 권력의 분산과 민주화를 가져왔고, 급기야는 체제의 붕괴까지 몰고 왔다.

소련의 역사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전 역사를 통틀어서도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이로써 러시아사의 연속성은 파괴된 것일까?
 
소련의 붕괴와 함께 정의와 자유를 일거에 실현하려는 러시아 인민들의 소망 또한 묻혀버린 것일까? 러시아 인들은 지금 스스로의 노력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개혁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을 내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역사와 현실을 조금 더 돌아보고 또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러시아가 남긴 유산과 교훈  
 
러시아는 오랫동안 문화적으로 후진국이었다. 우리 역사와 비교해보면 고구려가 만주벌판을 경영하고 백제가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일본까지를 잇는 해상제국을 건설할 무렵 러시아는 아직 부족 단위의 생활을 하고 있었고, 9세기 말엽 통일신라와 발해가 남북국 시대를 형성하고 있던 무렵에야 키예프에 최초의 국가다운 국가가 세워졌다. 그 후 고려가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해낼 무렵 러시아에서는 겨우 최초의 연대기가 쓰이고 최초의 법전이 마련됐다.

비록 구전 민요나 서사시 등의 민중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유포되고 교회에서 러시아의 독특한 음악성이 착실하게 연마되긴 했으나, 러시아 문화가 활짝 핀 것은 근래에 이르러서였다.

19세기 들어 러시아 문학과 음악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일거에 세계 최고수준의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푸시킨, 고골리,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의 문호와 무소르크스키, 차이코프스키 등의 작곡가를 높은 봉우리로 하여 회화ㆍ발레ㆍ오페라ㆍ연극 등의 분야에서 숱한 거장들을 배출해낸 것이다. 이들은 러시아가 인류에게 준 귀중한 유산이다.

20세기의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거대한 사건과 시도로써 세계인을 주목케 했다. 인간이 모든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진정한 평등ㆍ평화가 넘치는 유토피아를 구현하려는 과정에서 겪은 온갖 우여곡절에 한편에서는 박수를 보내고 한편에서는 질타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 거대한 시도는 끝내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20세기의 러시아사는 만인에게 커다란 발자취와 교훈을 남겼다. 각기 입장에 따라 평가도 다르고 얻은 교훈도 다르겠지만, 적어도 반제국주의 운동을 고무하고 나치 독일을 괴멸시키며 서방의 복지국가화를 촉진한 것 등등은 20세기 러시아 인의 커다란 공적임에 틀림없다.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살아온 러시아 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짙은 감동을 준다. 이들이 다시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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