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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쯤 전에 중고생이나 일반인이 가볍게 넘기거나 찾아보며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세계사 작은사전 한 권을 펴낸 적이 있습니다. 일년하고도 두 달인가를 그 힘겨운 작업에 집요하게도 몰입했었지요.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이런 책입니다. 보통 사전과는 다른 체제를 가진 조금 독특한 사전이었지요.

겉보기에는 가벼워 보이지만 분량도 꽤 되고 꽤 묵직한 책입니다. 지금은 잘 나가지 않아 거의 사장되다시피 한 상태인데, 출판사에서 곧 개정증보판을 낼 계획이랍니다. 나름대로는 그 내용이 사장되는 것이 아까워 오래 전부터 이를 어떻게 공유해볼까 고민중이었는데, 개정증보판 출판계획이 있다 하니 이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고, 하여 그 맛이라도 함께 느끼면서 세계사의 흐름을 일별해볼 수 있도록 각 장의 도입부 글들을 모아 30분 만에 훑어보는 세계역사를 한번 엮어봅니다.

책에는 각 장의 개관 뒤에 독특한 도표들을 만들어 실어두었는데, 지금 이곳엔 스캐너도 없고 하여 일단 글부터 올리고 나중에 여건이 허락하면 도표들을 얹어 놓겠습니다.

자, 그럼 30분간의 세계사 여행을 한번 떠나보실까요? 솔직히 재미는 별로겠지만, 아마 다른 세계사 개관들과는 다른 독특한 맛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바쁘신 분들은 이쯤에서 다음 기회에....


제1장  문명 사회를 향하여

지구의 나이 46억 년에서 인류가 출현한 것은 극히 최근인 200-300만 년 전이다. 그리고 인류의 나이 약 300만 년에서 문명이 출현한 것 역시 극히 최근인 5천 년 전쯤이다. 인류는 오랜 기간의 석기 시대를 거친 끝에야, 청동기나 철기 등의 금속기를 생활에 이용하고 글자를 만들어 후세에 지식을 전하며 치수와 관개 공사를 통해 자연을 다스리는 문명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나긴 원시 시대는 인류가 거친 자연 속에서 생존하며 문명 시대로 나아가는 고되고 힘든 준비기였던 셈이다.

고대 문명이 출현하기 이전의 원시 사회는 다시, 주된 도구였던 석기의 종류에 따라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나뉜다. 인류가 출현한 이래 최근 약 1만 년 전까지를 구석기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는 빙기와 간빙기가 교차하는 지질학상의 빙하 시대와 일치한다. 인류는 기후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과 거의 같은 모습을 하게 된다. 구석기 시대의 인류는 무리지어 돌아다니며 떼어 내거나 깨어서 만든 석기와 골각기, 목기 등을 사용하여 수렵이나 어로, 채집을 하여 먹고살았다.

약 1만 년 전에 마지막 빙기가 끝나고 기후가 온화해지면서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다. 신석기 시대의 인류는 돌을 갈아서 만든 정교한 석기를 사용했고, 농경과 목축 기술을 터득하여 정착 생활에 들어갔으며, 토기를 제작하고 섬유로 옷을 지어 입었다. 또 협동 작업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를 발달시켜 고대 문명이 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이런 가운데 지금으로부터 약 5천 년 전인 BC 30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인더스, 황하의 4대 문명이 싹트면서 금속기와 문자를 사용하는 문명 시대로 접어든다. 고대 문명은 인류에게 높은 생산력을 가져다주어 수확량을 늘리는 한편, 남는 식량을 둘러싼 다툼을 일으켜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계급 관계와 국가를 출현시켰다.

원시 시대와 문명 시대를 가르는 주된 기준 가운데 하나는 문자 기록의 유무인데, 그에 따라 문자 기록이 없는 시대를 선사 시대, 있는 시대를 역사 시대라고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훨씬 오랜 기간을 차지하는 선사 시대에 대한 연구는 주로 유물과 유적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조차도 없는 기간은 상상력으로 채워진다. 사실 우리가 ‘역사’라는 이름으로 배우고 있는 시기는 인류의 오랜 발자취로 보면 매우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으며, 그보다 수백 배나 긴 기간은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이 안개 속에 묻혀 있다.


제2장  고대 서아시아 세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된 문명이 싹튼 곳은 고대 그리스 인이 ‘오리엔트’라고 부르던 땅, 즉 지금의 중동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두 강이 흐르는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나일 강이 흐르는 이집트 지방에서는 BC 3000년 무렵부터 수메르 인과 이집트 인에 의해 대규모 관개 사업을 기반으로 하는 고도의 농경 문명이 일어났다. 두 문명은 모두 왕이 신으로 군림하면서 통치를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했고, 쐐기 문자와 상형 문자로 대표되는 문자를 갖고 있었으며, 역법과 건축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다.

이집트에서는 이런 고대 문명을 토대로 BC 3000년경에 이집트 통일 왕조가 수립된 뒤 2천여 년 동안 파라오를 정점으로 하는 신권정치가 펼쳐졌는데, 그 상징으로 거대한 피라미드 군이 남아 있다. 반면에 메소포타미아는 개방적인 지형 탓에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 국가의 흥망이 빈번했다. BC 3000년경에 건설된 수메르 인의 도시국가군에 이어 BC 2000년경에는 고바빌로니아 왕국이 세워졌고, BC 7세기 전반에는 아시리아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포함하는 전 오리엔트를 통일하여 최초의 세계 제국을 형성했다. 그뒤를 이어 BC 6세기에는 이란 고원에서 일어난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가 다시 오리엔트의 통일에 성공하여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할 때까지 번영을 구가한다.

한편, 에게 해와 그 주변에서는 BC 3000년경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으로 크레타 문명이 일어나고 또 미케네 문명이 그뒤를 이으면서 유럽 세계의 새벽을 밝힌다. 그밖에, 최초의 알파벳을 만들고 한때 지중해를 석권한 페니키아, <성서>의 고향인 이스라엘과 유태 왕국, 기원을 전후하여 이란 고원과 그 주변에 대제국을 건설한 파르티아, 그뒤를 이은 사산 조 페르시아 왕국 등도 초창기 서아시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역들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서아시아 세계를 필두로 세계 각지의 고대 국가들이 이룩한 찬란한 문명의 밑바닥에는 거의 예외없이, 전쟁이나 부채로 인해 노예가 된 이들이나 사실상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당한 대다수 피압박 민중들의 피와 땀과 시체가 켜켜이 쌓여 있다는 점이다.


제3장  지중해 세계의 형성과 전개

발달한 오리엔트 문명은 서쪽으로 그 빛을 퍼뜨려 에게 해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에 문명의 세례를 주고, 거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그리스에 상륙한다. 그리스 문명의 주역은 발칸 반도 북부에서 남하해 온 여러 갈래의 그리스 인들로서, 그들은 전 시대의 문명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면서도 그 정수는 계승, 발전시켜 고대 세계에 가장 찬연한 빛을 발하는 문화를 꽃피운다.

그리스 세계는 집주에 의해 형성된 폴리스들과 그들이 해외에 건설한 수많은 식민시로 이루어지는데, 폴리스마다 식민시마다 나름대로 독특한 정치 형태들을 발달시키며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때로는 힘을 합쳐 외부 세력의 침입에 맞서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강력한 군국주의 체제를 구축한 스파르타와 탁월한 직접민주정치 체제를 발달시켜 간 아테네의 경쟁과 대립은 유명하다. 그런 자유롭고 진취적인 기풍 속에서 철학과 문학, 역사, 연극, 건축 등 거의 모든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들이 쏟아져 나와 오늘날의 서구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다.

그러나 오해하기 쉬운 한 가지, 민주주의를 고도로 발달시킨 아테네조차도 다른 고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말하는 도구’로 여겨지던 노예의 노동에 생산의 주요한 부분을 의존하고 있던 노예제 사회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던 중 그리스 세계의 북방 변경이던 마케도니아에서 BC 4세기에 알렉산더라는 걸출한 인물이 출현하여 오리엔트 세계까지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알렉산더의 제국은 비록 단명으로 끝났지만, 동방 세계에까지 그리스 문화를 확장시키는 한편 거기에 동방의 제도와 문화를 적극 흡수하여 동서 융합 문화인 헬레니즘 문화를 창출해 냄으로써 동방과 서방 모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탈리아 중앙부에서 일어난 로마는 BC 3-2세기에 카르타고를 격파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고, BC 1-AD 1세기에 대서양 연안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팍스 로마나’를 구현한다. BC 27년에 제정 체제를 구축한 로마 제국은 이후 수백 년 동안 노예 노동을 근간으로 하는 라티푼디움 체제를 발전시키며 강력한 국가 권력을 다지는 한편, 발달한 그리스와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한 위에다 웅대한 토목건축술과 라틴 어 문학, 정치한 로마 법 등 다방면에서 로마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켜 유럽 세계의 주춧돌을 놓는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로마 제국의 지배도 4세기를 전후하여 노예의 격감으로 대농장 경영이 위기를 맞고 북방 게르만 민족의 침입과 하층민들의 반란이 잦아지면서 휘청거리기 시작하여, 395년에는 동서로 갈라지고 476년 게르만의 한 용병대장에게 서로마가 무너지면서 마침내 종말을 고한다.

한편, 모진 박해 속에서도 끈질기게 세력을 확장해 오던 크리스트 교는 로마 제국의 쇠퇴기에 제국의 통일을 꾀하던 지배층과 결합하여 일약 로마의 국교가 되고, 이후 유럽과 지중해 세계 전역에 널리 퍼져 그리스.로마 고전 문화와 함께 유럽 문화의 양대 원천으로 자리잡는다.


제4장  남아시아 세계의 형성

BC 2500년경 서북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에도 고대의 4대 문명의 하나로 꼽히는 찬란한 문명이 일어났다. 다른 문명과 달리 발굴이 미진하고 문자도 해독되지 않아 문명을 일으킨 민족 등 그 실체가 분명하게 밝혀지진 않았으나, 모헨조다로 등 몇몇 곳에서 드러난 도시 유적들은 이 지역에 메소포타미아에 뒤지지 않는 고도의 문명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어서 BC 1500년경에 아리아 인의 일파가 서북 인도에 들어와 인더스 문명의 건설자들을 제압하고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인도 고전 문화의 초석을 놓는다. 완강한 신분 제도인 카스트 제도와 힌두 교의 토대인 브라만 교가 출현한 것이 바로 이때이다.

인도에서는 오랜 동안 부족사회가 이어지다가 BC 6세기에 이르러서야 왕국이 형성된다. 그중 마가다 국에서 일어난 마우리아 왕조가 BC 3세기 아쇼카 왕 때 남부를 제외한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하며, 그뒤를 이어 서북 인도 일대에는 쿠샨 왕조, 중남부의 고원 일대에는 안드라 왕조가 수립된다.

BC 6세기에 북인도에서 일어나 그 자비 평등 사상으로 말미암아 제1신분인 사제 외에 모든 신분으로부터 환영을 받은 불교가 체계를 갖추고 널리 보급되는 것은 이 무렵이다. 불교는 이후 힌두 교의 위세에 눌려 인도에서는 크게 성행하지 못하고, 그 발상지에 간다라 미술과 굽타 미술의 독특한 불교 미술을 남긴 채, 커다란 두 줄기 중 소승불교는 실론과 동남 아시아 일대에, 대승불교는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과 동아시아에 전파된다.

인도에 힌두 교가 발전하면서 산스크리트 문학과 인도풍 미술양식이 꽃을 피워 인도 고전문화의 황금기를 선보이는 것은 AD 4세기에 수립되는 굽타 왕조에 이르러서다. 인도의 민족 종교인 힌두 교는 브라만 교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 종교로서, 인도의 생활 관습 및 카스트 제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발전하여, 지금까지도 대다수 인도인들의 삶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고대의 동남 아시아는 인도의 불교와 힌두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을 했는데, 캄보디아 지역에는 크메르 인의 부남과 진랍, 앙코르 조 등이 번영을 누렸고, 미얀마 지역에는 파간 조, 인도차이나 동남부에는 참파, 인도네시아 지역에는 스리비자야 왕국과 사일렌드라 조, 마자파히트 왕국 등이 각기 한 시대를 주름잡는다.


제5장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과 전개

중국의 황하 문명은 BC 4000년경 전기 신석기 문화인 양사오 문화로 시작되어 룽산 문화로 이어지고, BC 2000년경 청동기 문명이 대두하며 은.주의 역사 시대로 접어든다. 은나라는 수도인 은허에서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이 발견되어 그 실체가 알려졌으며, 이어서 BC 11세기에 주의 무왕이 은을 멸하고 황하와 양쯔 강 일대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주의 천자는 종법에 입각한 봉건 제도를 채택하여 넓은 땅을 다스렸는데, BC 8세기에 이민족의 침입과 제후들의 반항을 견디지 못해 동천하면서 지배력을 잃고, 중국은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는 춘추전국 시대로 접어든다.

춘추전국 시대는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 간 과도기로서, 이후의 중국 세계를 결정짓는 거의 모든 싹들이 이 시기에 태동했다. 이 시대를 거치며 중국의 판도가 크게 넓어지고 국가의 기틀이 다져졌으며, 철기의 보급으로 생산력이 크게 늘어나고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는 한편, 제자백가로 알려진 각양각색의 사상가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와 인간과 사회를 논하며 부국강병책을 개진했다.

난세를 마감한 것은 전국7웅의 하나인 진나라로서, BC 221년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운 진시황이 황제를 칭하며 중앙집권제를 추진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서둔 탓에 그의 사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은 단명으로 끝나고, 유방이 반란을 수습한 뒤 한나라를 세운다.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 약 400년간에 걸쳐 중국의 고대 사상.정치.문화의 전성기를 일구어 내면서, 중국의 대명사로서 자리를 매김한다. 유교가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자리잡고 한자가 제모습을 갖추며 문장과 역사 기술의 모범이 세워지고 제지법이 발명되는 것이 모두 이때이다. 그러나 한나라 역시 수많은 노비와 농민들의 피땀 위에 세워진 왕조로서, 악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반란이 계속 이어지서 마침내 무너지고 만다.

이후 중국은 위.오.촉이 분립하는 3국 시대를 거쳐 남북이 분열하여 다른 길을 가는 남북조 시대를 맞는다. 북조에서는 강력한 황제권을 배경으로 토지.조세.군사 제도를 확립하여 수.당에 물려주었고, 남조에서는 귀족정치하에서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한 우아한 6조 문화가 개화하며 노장 사상이 크게 유행하고 불교가 정리, 보급된다.

589년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는 과거제와 균전제를 시행하고 조.용.조의 세제와 부병제를 확립하며 중앙.지방 제도를 완비하는 등 중앙집권 체제의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단명으로 끝나고 만다.

그뒤를 이은 당나라는 수의 제도를 계승 발전시키고 율령격식의 법제까지 완비하여 지배 체제를 굳건히 다진 뒤 동아시아의 대제국이 되어 주변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수도인 장안은 인구 100만의 국제 도시로 번성했고, 불교와 회교를 비롯한 세계의 온갖 종교가 들어와 퍼졌으며, 이백과 두보의 당시가 성행하는 등 귀족 문화가 꽃을 피웠다. 그러나 중기 이후 대토지 소유가 진행되어 균전제와 부병제가 무너지고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지면서 멸망의 길로 들어선다.

한편, 고대의 한반도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부족국가 시대를 거쳐 고구려.신라.백제가 4세기경에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추고 3국이 정립하는 시대를 맞았으나, 7세기에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3국을 통일한 뒤 신라와 발해가 남북에 대치한 채로 당의 문물을 수용, 발전시킨다. 일본에서는 4-5세기에 야마토 조정이 들어선 뒤 7세기 중엽에 다이카 개신을 통해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의 건설을 꾀하고 나라.헤이안 시대를 거치며 당의 문화를 적극 받아들인다.


제6장  내륙 아시아 세계의 형성과 전개

중앙 아시아의 초원 지대, 동쪽으로는 몽고 고원, 남쪽으로는 인도와 이란 접경, 서쪽으로는 남러시아에 이르는 드넓은 초원 지대는 예로부터 유목민들의 터전이었다. 인류의 역사가 처음 기록되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그곳에는 투르크 계와 이란 계, 몽골 계의 숱한 유목 민족들이 양과 산양, 낙타를 방목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씨족 집단을 토대로 군사적인 부족국가를 이루고 있었는데, 평시에는 주변의 아시아.유럽 농경 민족들과 평화적인 교류를 가졌으나, 관계가 악화될 경우에는 기마를 이용하여 약탈과 정복에 나서곤 했으며, 주변의 농경 민족이 강력한 국가를 형성했을 때에는 그들에게 정복당하여 속국이 되기도 했다.

유목 민족들은 유사 이래 그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 만큼 흥망과 부침이 빈번했으나, 그중 몇몇은 대유목 국가를 형성하여 동아시아와 서남 아시아는 물론 유럽에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또 이들 유목 민족에 의해 동서 교류가 추진되어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의 상호 침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몇 갈래의 동서 교통로상에는 많은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이 발달하여 무역을 중계했는데, 유목민들간에, 그리고 유목 민족과 주변의 농경 민족 국가들간에 이 도시들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곤 했다.

고대 세계의 역사에 크게 이름을 올린 유목 민족으로는, BC 7-6세기에 남러시아 초원 지대에 대유목 국가를 건설한 스키타이 인과 그뒤를 이은 사르마트 인, BC 4세기부터 중앙 아시아의 소그디아나를 지배하며 자신들의 문자까지 만들어 다른 유목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준 소그드 인, BC 4세기부터 약 500년 동안 몽고 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하며 대유목 국가를 세워 중국을 위협하고 그 후예인 훈 족이 중유럽까지 진출하여 게르만 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흉노, 진.한 시대에 중앙 아시아를 누빈 월지, 2세기부터 몽고 고원을 지배하며 중국의 5호16국 중 가장 강성했던 북위를 세운 선비와 그뒤를 이은 유연, 5-6세기에 중앙 아시아와 서북 인도에서 활약한 에프탈, 6-8세기에 몽고 고원과 투르키스탄을 지배하며 대유목 국가를 세운 돌궐과 그뒤를 이은 위구르, 7세기에 카스피 해 북안에서 번영을 누린 하자르와 그뒤를 이은 페체네그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티베트 고원에서는 7세기에 손첸 감포라는 인물이 티베트의 여러 민족을 통일하여 토번(티베트)을 세운 뒤, 인도와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티베트 문자를 만들고 티베트 불교(라마 교)를 일으키며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일구어 갔다.


제7장  이슬람 세계의 형성과 전개

대부분 사막 지대인 아라비아 반도는 고대 세계에서는 이름없는 한 변방에 불과했으나, BC 7세기에 반도의 서해안에서 이슬람 교가 일어나 각지로 확산되면서 일약 중세의 주역 중 하나로 등장한다. 아랍 중심의 이슬람 세력이 그렇게 급속도로 확장할 수 있었던 데는 이슬람 교의 특성이 크게 작용했다.

이슬람 교는 유일신 알라에게 절대 복종을 맹세하는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이슬람 교도들의 생활은 물론 사회와 국가의 틀까지도 규정한다. 이슬람 교도들은 이슬람 교를 지키고 전파하기 위한 싸움을 성전으로 여기고 그 성전에 참가하는 것을 의무로 여겼다. 거기에 신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것을 앞세우는 이슬람 교리가 아랍은 물론 다른 지역들의 민중들에게 폭넓은 호응을 얻으면서, 이슬람 세력은 금세 중동 지역을 장악했고, 이어서 무서운 기세로 아프리카와 남아시아로 뻗어 나갔다.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생전에는 이슬람 세계가 아라비아 반도에 그쳤으나, 그의 뒤를 이은 4대의 정통 칼리프 시대를 거치며 아랍 제국으로 성장하고, 7세기 말에 수립된 옴미아드 조 때에는 서북 인도에서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이어서 8세기 중엽에 수립된 아바스 조에서는 아랍 인과 비아랍 인 무슬림간의 차별을 해소하고 중앙집권적인 행정제도를 정비하여 대제국의 통치 기반을 다지는 한편, 산업 진흥과 무역.문화 창달에 힘써 이슬람 문화의 황금기를 맞는다. 10세기 이후에는 지방분권화가 추진되었으나, 제국 내부의 교류는 활발하여 한동안 이슬람(사라센) 제국의 전성기가 이어진다. 전성기인 9-10세기의 바그다드는 인구 150만에 세계의 온갖 문물이 모여드는 당대 최대의 도시였다.

10세기 이후에는 지방 정권이 자립하여 왕조의 계보가 복잡해지는데, 동쪽의 아바스 조, 서쪽의 후 옴미아드 조, 중앙의 파티마 조의 3개 칼리프가 정립하는 시대를 거쳐, 11세기에는 투르크의 이슬람화가 진행되어 셀주크 조가 세워지며, 12세기 이후에는 각지에 많은 이슬람 왕조가 세워져 제국의 통일성은 사라지지만, 이슬람 세력은 그뒤로도 확장을 계속하여 중서부 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 중앙 아시아, 인도, 동남 아시아에까지 그 영역을 넓힌다. 그중 인도에서는 10세기에 가즈니 조가 서북 인도를 장악한 이래 16세기에 무굴 제국이 수립될 때까지 델리 술탄 왕조 등 여러 개의 이슬람 왕조가 흥망을 거듭한다.

동서양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이슬람 세력은 아랍 문화의 토대 위에 각지의 제도와 문화를 수용하여 독특한 사회 문화를 발전시켰다. 10세기 부와이 조에서 시행한 이래 각 지방에서 정착한 이크타 제는 군인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슬람 특유의 봉건 재도였고, 아라비아 상인들은 제국의 법적 보호하에 각 대륙을 활발히 왕래하며 당대의 세계 무역을 지배하고 동서 문화의 교류를 촉진했다. 문화 면에서는 코란 연구를 계기로 수준 높은 신학.법학.문법학.역사학 등 그들만의 고유한 학문을 발전시키고 아랍 어 문학과 이슬람 미술을 확립하는 한편, 그리스에서 철학과 의학.천문학.기하학.광학, 그리고 인도에서 의학.천문학.수학 등을 받아들여 한 차원 끌어올림으로써 근대 유럽의 학문과 과학의 발달에 크게 공헌한다.


제8장  유럽 세계의 형성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하며 고도의 문명을 자랑할 때에만 해도 서북 유럽 일대는 발달한 지중해 세계의 한 변방일 뿐이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게르만 족이 대이동을 개시하여 유럽 전역에 밀려들어오고,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의 남쪽 해안인 북아프리카를 휩쓸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장악해 오면서, 유럽 역사의 주무대가 서북 유럽으로 이동한다. 유럽의 중심 이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프랑크 왕국의 발전인데, 5세기 말에 세워진 프랑크 왕국은 8세기에 전성기를 맞아 서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한 뒤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수여받는다. 그러나 그뒤 왕국이 3분되면서 왕권은 약화되고 각지에 제후들이 분립한다.

서유럽 세계는 형성 초기부터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화와 크리스트 교에 게르만적 요소가 결합한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발전시켰다. 사회 제도로는 봉건 제도가 자리를 잡았는데, 유력자가 주군이 되어 가신에게 봉토를 주고 가신은 주군에게 군역 등의 봉사를 서약하는 층층의 주종 관계와 각급의 영주가 농노를 부려 장원을 경작하는 농노제를 두 기둥으로 하는 제도였다. 왕권은 약하여 지방분권적이고 자급자족적인 사회가 형성되었으며, 대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하여 일상 생활은 물론 정치에까지 깊숙이 개입했다. 교황의 권위는 실로 막강하여 11-13세기에는 황제를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한편, 동유럽에서는 서로마 제국이 망한 뒤에도 약 천년 동안이나 비잔틴(동로마) 제국이 고대 로마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전통을 지켜 갔다. 전성기인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에는 한때 지중해를 다시 로마의 내해로 만들기도 했으나 그후 이슬람 세력이 확장되면서 예전의 영광을 잃는다.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를 이어받고 거기에 그리스 정교의 전통을 결합하여 독자적인 비잔틴 문화를 발전시켰다. 비잔틴 문화는 초창기 서유럽 문화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고, 또 동북 유럽의 슬라브 세계에 널리 전파되어 동유럽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중세의 슬라브 세계에서는 비잔틴 문화의 영향하에 러시아와 폴란드가 부침을 계속하며 국가의 기틀을 잡아 갔다.

13세기를 고비로 중세 유럽 사회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도시와 상공업이 발달하고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봉건 사회의 기틀이 무너져 갔고, 농민 봉기가 빈발하는 가운데 농노 해방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교황권이 쇠퇴하면서 여러 나라에서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형성되어 갔다. 그 선두 주자는 프랑스와 영국이었는데, 두 나라는 백년 전쟁을 거치며 절대 왕정 체제를 구축해 간다. 반면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수많은 영방국가나 도시국가로 분리된 채로 근대를 맞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해외 진출을 준비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크리스트 교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이어서 모든 학문이 신학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겨질 정도였으나, 12-13세기 이후 대학을 중심으로 새 기운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건축 부문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식, 비잔틴 식의 독특한 건축물들을 곳곳에 남겼다.


제9장  동아시아 세계의 전개

대규모의 민란이 빈발하고 모병 군단의 지휘자인 절도사들의 이반이 계속되는 가운데 마침내 지방의 한 절도사에게 당이 멸망한 뒤, 중국은 5대10국의 혼란기로 접어든다. 5대10국 시대에 각 나라는 힘을 배경으로 무단정치를 펴는 가운데 경쟁적으로 지역 개발을 추진하여 특히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생산력의 획기적인 증진을 일구어 낸다. 이 과정에서 전통 귀족 세력이 몰락하고 신흥 사대부 세력이 토지와 권력을 차지하는 시대적 변화가 일어난다.

10세기 후반에 5대10국 시대를 마감한 송은 과거를 통해 진출한 사대부 계층을 중심으로 관료제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무단정치를 대신하여 문치주의를 펼친다. 농업에서는 지주-전호의 소작제가 일반화되고, 발달한 상공업을 기반으로 귀족 문화를 대신하여 서민 문화가 크게 유행했다. 유학에서는 훈고학을 극복한 성리학이 대두하여 왕조의 이념과 윤리 규범으로 자리잡았고,  청자와 백자 등 도자기 공예의 황금기가 펼쳐졌으며, 화약.나침반.활판 인쇄술이 실용화되어 유럽에까지 전파되었다.

한편, 문치주의를 펼친 송대에는 어느 때보다도 북방 민족의 활동이 활발했는데, 거란.탕구트.여진.몽고족이 차례로 자신의 부족 체제를 정비한 뒤 중

국에 침입하여 요.서하.금.원의 정복 왕조를 세운다. 송나라는 12세기 초 그중 하나인 금의 공격을 받아 황제가 포로가 되는 수모를 당한 뒤, 그 일족이 강남에 남송을 세워 송의 명맥을 이어간다. 이들 정복 왕조는 중국의 일부 혹은 전역을 차지한 뒤 그들 고유의 풍습을 지키면서 중국의 문물과 제도도 존중하는 2중 체제를 채택하여 중국을 지배했다. 그중 요.서하.금은 비교적 단명에 그치고 영역도 북중국 일대에 그쳤으나, 원의 경우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2/3를 지배한 대몽고 제국의 일부였다.

몽고의 칭기즈칸은 13세기 초에 몽고 고원을 통일한 뒤 중앙 아시아와 남러시아를 장악하여 몽고 제국을 세웠고, 그뒤를 이어 그의 자손들이 정복 활동을 계속한 결과 13세기 후반에는 동으로 중국 전역에서 남으로 서남 아시아, 서로 러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공전의 대제국이 건설되었다. 5대 황제인 세조가 중국에 원 왕조를 세운 뒤 각지에 세워진 4한국이 독립하여 제국의 통일성은 사라지지만, 그뒤로도 1세기 남짓 몽고 제국의 신화는 이어져 전세계에 깊은 인상을 심었으며, 몽고 지배하에서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송.원 대에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왕조가 수립되어 금속활자와 고려청자 등의 뛰어난 문화를 창조했으며, 일본에서는 문화의 일본화가 진행된 헤이안 시대를 거쳐 12세기에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하여 무사 정권 시대로 나아간다.


제10장  유라시아의 동서 교류

동아시아와 서남 아시아와 유럽은 한 대륙에 걸쳐 있으면서도 중세 이전의 교류는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못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험준한 산과 사막이 지리적인 장벽을 형성하고 있었던데다, 중앙 아시아의 초원 지대를 지배하고 있던 유목 민족들이 동서양의 교류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문물이 발전하여 외부로의 확산 기운이 무르익으면서 사막과 초원에도 물길이 뚫려 실낱 같은 교통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길은 크게 세 갈래로 좁혀졌는데, 하나는 남러시아에서 몽고와 북중국을 잇는 초원길이고, 하나는 중국의 황하 유역에서 동서 투르키스탄과 이란 고원을 거쳐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에 이르는 비단길이며, 나머지 하나는 홍해와 아라비아 해와 인도 연안을 거쳐 동남 아시아와 남중국에 이르는 바닷길이었다. 세 갈래의 길은 지역 사정에 따라 번갈아 성쇠를 거듭하면서도 고대 이래로 동서 교류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여 동서양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중국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 한나라 때에는 장건과 반초의 서역 경영을 발판으로 중국의 비단이 서역과 서방 세계에 건너가고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는 등 동서 교류가 촉진되었으며, 당.송 시대에는 바닷길을 중심으로 이슬람 상인이 크게 활약하면서 상아.보석류.향료 등이 중국에 전해지고 견직물과 도자기가 서방에 수출되는 한편, 육로와 해로를 통해 서방의 여러 종교가 중국에 전파되고 제지법이 이슬람 세계를 거쳐 서양으로 건너갔다.

동서양의 교류가 눈에 띄게 활발해진 것은 몽고가 동서양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 제국 시대였는데, 그 시기에 서방의 많은 크리스트 교 수도사와 여행가들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동양 사정이 서양에 알려지고, 중국의 화약.나침반.인쇄술 등이 서양에 전해졌다. 그뒤 명나라 때 정화의 남해 원정을 계기로 다른 세계에 관한 중국인의 지식이 확대되고 화교가 남방 세계에 대거 진출하는 한편, 15세기 말에 서양에서 동양에 이르는 인도 항로가 열리면서 동서 교류는 이제 한 차원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게 된다.


제11장  아메리카.태평양 지역의 문화

아메리카 대륙과 태평양 지역이 세계사에 자취를 드러내는 것은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착과 16세기 초 마젤란의 세계 일주를 통해서인데, 그렇다고 그 땅이 그전에 인간이 살지 않는 불모지였던 것은 아니다. 그 땅에도 우리가 햇수를 정확히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이 우리와 별반 다름없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었다. 요즘에 와서는 그들의 독특한 생활 모습이 우리가 오랜 동안 잊고 있던 단순한 진리를 일깨워 주기도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있지만 없는 존재, 이 세상에 더불어 있기에는 너무나 미개한 존재, 그래서 사라졌어도 그다지 아쉬울 것이 없는 존재 취급을 받아 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본디 승리자의 기록이라서, 코르테스와 피사로, 메이플라워 호와 쿡 선장은 깊이 각인되어 있지만, 그들에게 스러져간 수많은 원주민들의 기록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둔 밤하늘에도 별은 빛나듯이 승리자의 기록들 속에 간간이 배어 있는 그들의 가냘픈 숨소리가 새어나와 우리에게 그들의 생활상을 전해 주고, 그 후예들의 고달픈 삶이 우리의 상상력을 부추겨 그 시대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라고나 할까. 더욱이 요즘에 와서는 그들의 자연친화적인 삶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그들의 목소리가 갈수록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의 얄팍한 감상을 압도해 오니, 우리의 눈과 귀도 이제 새롭게 씻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지금의 멕시코와 과테말라 일대에서는 BC 1000년경부터 AD 16세기에 에스파냐 인들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올메카.마야.톨테카.아스테크 문명이 번갈아 일어나 수준 높은 도시 문명을 일구며 독특한 신전 문화와 역법.천문학을 발전시켰으며,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지에서도 BC 11세기 이래 차빈.모치카.나스카.티아와나코.와리 문화를 거쳐 잉카 문명이 일어나 안데스 산맥 일대를 조직적으로 지배했다. 그보다는 조금 뒤지지만, 북아메리카에서도 BC 1000년경부터 농경 문화가 일어나 유럽 인이 식민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 나름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태평양 지역에서는 오스트로네시아 계의 여러 민족들이 서남부의 멜라네시아, 서북부의 미크로네시아, 동부의 폴리네시아에 폭넓게 확산되어 저마다 독특한 농경.어로 문화를 일구어 갔다. 가장 오래 된 유적과 유물의 연대는 역시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제12장  근대 유럽으로 가는 길

14-16세기의 유럽에서는 중세 봉건 사회의 기반이 흔들리면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기운이 무르익어 갔다. 그 흐름은 크게 세 갈래로 나타났는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독일과 스위스에서 막이 오른 종교 개혁,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선도한 해외 진출이 그것이다. 이런 움직임들이 정신과 물질 양면에서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이끌어 16세기에는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주의 체제를 성립시키고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에서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면서, 유럽은 이후 근대 사회로 넘어간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촐발하여 빠른 속도로 서유럽 국가들에 확산된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화를 모범으로 인간 중심의 문화와 인간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한 대대적인 문화 운동으로서, 여기에서 자신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려는 정신이 싹터 대항해 시대와 종교 개혁을 추동한다. 이 무렵에 동양에서 전해져 온 화약과 나침반.제지법.인쇄술 등이 크게 개량되어 널리 보급되고 지동설과 지구 구형설이 공공연히 주장된 것도 중세의 굴레에 매여 있던 사람들의 정신을 깨어나게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찾으려는 유럽 상인들의 오랜 노력이 빛을 본 것도 이 무렵으로서, 15세기 말에는 마침내 인도 항로가 열리고, 또 서쪽으로 돌아 아시아에 가려는 콜럼버스의 시도는 엉뚱하게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이어져 유럽 인들의 세계를 확장한다. 16세기 초 마젤란 일행이 세계 일주를 완수한 뒤에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경쟁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서 유럽 바깥의 세계를 절반씩 나누어 차지하고 이어서 네덜란드.영국.프랑스가 그뒤를 따르면서 마침내 세계화의 발걸음이 시작된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시작되는 것이 이때로서, 그것은 달리 말하면 유럽 인의 경쟁적인 해외 침략사이기도 했다.

또, 봉건 사회의 해체와 유럽 인들의 깨어나는 정신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교황의 지배에 대한 반발로 이어져 독일 등지에서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난다. 그 결과 카톨릭에서 떨어져 나온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중북부 유럽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카톨릭도 자기 혁신을 꾀한다. 그중 칼뱅 파의 개신교는 신흥 상공업자들의 이해와 일치하여 이후 시민계급에게 폭넓게 수용되어 간다.

이러는 가운데, 봉건 질서의 붕괴를 틈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던 국왕이 도시의 대상인과 손잡고 절대 왕정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왕권 신수설과 관료.상비군과 중상주의로 무장한 절대 왕정은 강력한 왕권을 축으로 국가를 통일해 가며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에 나선다. 이 절대주의 체제를 거치며 자본주의가 봉건제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경제.사회 제도로 자리잡으며, 마침내 새로이 성장한 시민계급이 절대 왕정을 해체하면서 유럽에 근대 사회가 정착한다.

절대주의 체제가 구축된 시기와 양태는 나라마다 다른데, 15세기 말에 절대 왕정을 수립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16세기 후반에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계기로 영국과 네덜란드에게 패권을 넘기고, 여기에 17세기 초에 강력한 절대 왕정을 구축한 프랑스가 경쟁에 가세한다. 뒤늦게 발동이 걸린 독일과 러시아에서는 계몽 전제군주가 출현하여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는 계몽절대주의가 나타난다. 한편, 다른 나라들에서는 절대주의 체제가 오히려 더 강화돼 가던 17세기의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의 두 차례 시민 혁명이 일어나 일찍부터 시민계급의 지배체제를 굳히고 유럽의 근대화를 선도하는 한편, 이후 100여 년에 걸친 프랑스와의 패권 다툼을 승리로 이끌어 마침내 세계의 지배국으로 자리잡는다.

근대화의 막이 열리던 17.18세기의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의 흐름을 이어받은 고전주의 예술과 문학이 확립되어 꽃을 피웠다. 그와 더불어 과학 혁명이 진행되면서 근대 과학이 태동하고, 경험론과 합리론을 두 축으로 하는 근대 철학이 형성되었으며, 자연법 사상이 대두하여 사회계약설과 계몽주의로 발전하고,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고전파 경제학이 등장한다.


제13장  아시아 여러 나라의 번영

16-18세기에 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전통 문화의 완숙 단계에 이르렀다. 14세기 후반에 몽고족의 지배를 종식시킨 명과 17세기 초에 만주족에서 태동했으나 이내 중국화한 청의 두 왕조는 한대 이래의 중국 문화의 전통을 부흥, 발전시켜 가장 정비된 정치 제도와 사회 규범을 만들어 냈다. 또 경제 면에서도 상업 작물의 재배가 확대되고 차.비단.도자기 등의 산업에서 초보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이 나타났으며, 농업 생산력도 발전하여 급증하는 인구를 능히 감당할 정도였다.

학계에서는 실천을 중시하는 양명학과 실용성과 과학성을 강조하는 고증학이 일어나 유교의 관념적인 경향에 새 바람을 일으켰고, 영락대전과 4고전서 등 방대한 편찬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영토와 민족 구성에서도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지금의 중국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16세기 초 인도 대륙에 등장한 무굴 제국은 인도 역사의 중심에서 제외돼 온 데칸 고원과 카슈미르 등 여러 지역을 합쳐 대제국을 형성한 뒤, 역대 왕조 중 가장 효율적인 중앙집권 행정 체제를 형성, 가동하는 한편, 전통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융합하여 인도-이슬람 문화를 발전시켰다.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오스만 제국은 15세기에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16세기에 서아시아에서 아프리카와 동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다. 오스만 제국은 이후 국가 조직을 잘 정비하여 잡다한 종교와 민족에서 나오는 차이를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동서 무역을 장악하여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는 한편, 이슬람 문화에 비잔틴 문화와 이란 문화.투르크 문화를 수용하여 오스만 투르크 문화를 창출해 낸다.

그밖에 티무르 제국의 뒤를 이어 이란 고원을 지배한 사파비 왕조, 근세 조선과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등도 사회.정치.문화 등 여러 면에서 전에 없던 통합을 일구어 내며 번영을 구가했다.

이런 점에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충분히 자체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당시 근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유럽 세계와 달리, 지배자 중심의 통치 체제와 전근대적인 경제 구조를 그대로 간직한 채로 느린 발걸음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선교사들을 선두로 유럽 세력의 해외 진출이 시작되어, 16세기에는 포르투갈, 17-18세기에는 네덜란드.영국.프랑스가 아시아에 대거 진출하여 본격적인 상업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통 사회의 완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18세기 이후 내부의 취약성과 전통을 달리하는 유럽 세력의 침략으로 쇠약해져 가면서 19세기를 맞는다.


제14장  구미 근대 사회의 성립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치며 근대 사회가 확립된다. 이후 서구에서는 정치적으로는 의회제 민주주의와 국민 국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빠른 속도로 발달함과 더불어, 봉건 잔재가 사라지고 종전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 일반화되면서 그것이 바깥 세계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봉건제와 자본제의 과도기 체제인 절대 왕정이 무너진 시기와 양태는 서구 각국에서도 제각기 다르다. 영국에서는 이미 17세기에 두 차례의 시민 혁명을 거쳐 근대화의 커다란 진전을 본 뒤, 18세기에는 시민사회의 원리와 제도가 사회 전반에 침투하며 시민계급의 지배 체제가 굳게 확립된다. 영국의 식민지이던 미국에서는 1776년 독립 운동에 반봉건 운동이 결합된 형태의 시민 혁명이 성공을 거두어 오늘의 미국을 예비했으며, 프랑스에서는 1789년 가장 전형적인 형태의 시민 혁명이 일어나 절대 왕정과 구제도를 타파하고 국민 주권의 근대 국가를 탄생시킨다. 독일이나 러시아 등지에서는 시민계급의 성장이 늦어 위로부터의 불완전한 근대화가 추진된다.

그중 혁명의 격화와 반동기를 거쳐 나폴레옹의 군사독재로 귀결된 프랑스 혁명은 유럽 각국의 반발에 나폴레옹의 야심이 결합하여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진다. 나폴레옹은 한때 유럽을 제패한 뒤 1815년에 유배당하며 권좌에서 물러나지만, 유럽 각국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과 나폴레옹의 지배에 자극받아 자유주의와 국민주의의 물결이 출렁인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어 19세기에 구미 여러 나라로 파급된 산업 혁명은 생산 방법에 근본적인 변혁을 가져오면서 경제와 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 농업 혁명.동력 혁명.기술 혁신과 더불어 공장제 기계공업이 성립하며, 인구가 도시에 집중되고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자본주의가 확립된다. 그 결과, 산업 혁명을 선도한 영국이 다른 나라들을 멀찌감치 따돌리며 세계의 지배국의 자리를 더욱 굳히고, 산업자본가를 중심으로 하는 시민계급(부르주아지)이 권한을 더욱 강화하며 지배적인 지위를 확보하는 한편, 이에 대한 반발로 노동운동이 싹트기 시작한다.


제15장  19세기의 유럽과 아메리카

19세기의 유럽과 미국에서는 발달하는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국민국가 단위의 시민사회가 성숙해 갔다. 19세기 들어 서유럽 전역과 미국에 확산된 산업 혁명은 오랜 농업 사회를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사회로 탈바꿈시켜 갔고, 산업화의 주역을 맡은 산업자본가(부르주아지)는 구 지배층을 몰아 내며 사회의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굳혀 갔다. 나폴레옹 몰락 후 복고주의와 정통주의를 들이대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도도한 흐름을 막아 내려고 하던 빈 체제도, 프랑스의 2월 혁명을 시작으로 전 유럽에 파급된 1848년 혁명의 강풍에 무너져 내리고 서구 시민사회의 토대는 더욱 단단해진다.

외국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한 민족 한 국가의 수립을 지향하는 민족주의는 1848년 혁명 이후 그 파고가 더욱 높아져 1860년대의 이탈리아와 독일 통일에서 절정을 이룬다. 프로이센 주도하에 통일을 달성한 독일은 이후 강력하게 중공업화를 추진하며 일약 유럽 열강의 하나로 도약한다. 반면에 뒤늦게 눈을 뜬 러시아의 근대화 작업은 지지부진하고, 다민족 국가인 오스만 제국은 연신 외세에 시달리며 발칸 반도를 문제의 땅으로 남겨 놓는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는 1820년대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지배력 약화를 틈타 대거 독립을 달성하며, 영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미국은 남북 전쟁을 거치며 연방의 결속력을 다지고 산업화와 서부 개척을 통해 또 하나의 강국으로 떠오른다. 한발 앞서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친 영국은 19세기에 고도의 산업 기술과 수준 높은 의회 정치를 발전시켜 가며 19세기를 영국의 세기로 만든다. 7월 혁명, 2월 혁명 등으로 19세기 유럽사의 이정표를 제시해 온 프랑스도 반동과 개혁을 거듭하며 근대화 작업을 완수한다.

발달하는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새로운 사회 계급을 만들어 냈다. 부르주아지와 함께 시종 시민 혁명의 공동 주역이었으나 그 성과물에서 항상 소외된 채 억압만 당해 온 노동자 계급이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그 수가 늘어나고 신분이 고착되면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조직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노동 운동은 일각에서는 참정권을 요구하는 선거법 개정 운동으로 나타나고, 일각에서는 사유 재산과 이윤 추구의 폐지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추진하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패한 직후의 파리에는 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권인 파리 코뮌이 등장하여 70일 동안 철저한 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이기도 한다.

19세기의 유럽에서는 또한 자연과학과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산업화의 진전을 이끌었고, 그 성과를 토대로 문학과 예술에서도 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자연주의 등 여러 사조가 등장하여 인간 중심의 근대 문화를 꽃피웠으며, 새로운 삶의 양식과 사회를 설명하고 개척하고자 하는 철학과 사회과학도 폭넓게 대두했다.


제16장  19세기의 아시아

성숙한 전통 문화를 발전시켜 온 아시아 사회는 18세기 이후 본격화되는 유럽 세력의 진출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아시아의 거의 전역이 서구의 영향권하에 들어가며 전통 사회의 기반이 흔들리는 대위기를 맞는다. 거기에 전근대적인 경제 구조와 전제적인 정치 체제라는 내부의 취약성이 가세하여, 아시아 각국은 예외없이 내우외환의 진통을 겪는다. 서구 사회에 한없이 뻗어 나가는 듯한 진보의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오를 때, 그에 앞서거나 적어도 대등한 문명을 이룩해 온 아시아 사회는 오히려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는 것이다.

위기에 직면한 아시아 각국의 내부에서는 서구 세력의 침략에 맞서려는 민족 운동과 봉건적인 정치.경제 질서를 개혁하려는 근대화 운동이 태동하며, 나라와 민족을 지키고 힘을 기르려는 방책을 둘러싸고 보수와 개혁의 두 진영이 대두하여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이런 고민과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일본을 뺀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서구 세력의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가 되어 그들의 원료 공급지나 상품 시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한때 대제국을 세우고 동서 무역을 독점해 온 오스만 제국은 17세기 말 이후 쇠락을 거듭하여 19세기에 이르면 무역 독점권을 잃어버리고 영국을 비롯한 서구 세력의 간섭에 시달린다. 그제서야 뒤늦게 근대화 개혁을 추진해 보지만 실패로 돌아가며, 그 틈을 타고 이집트가 자립하고 여러 민족의 반란이 빈발하면서 제국은 열강의 세력권하에 들어간다. 사파비 조의 뒤를 이은 이란의 카자르 조도 19세기 이후 영국과 러시아의 침략을 받아 반식민지가 된다.

인도는 마라타 전쟁과 시크 전쟁에 패한 뒤 19세기 중엽에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한다. 1857년에 일어난 세포이 항쟁이 인도 전역에 확대되면서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맞선 대반란이 일어나지만, 항쟁이 실패로 끝난 뒤 무굴 제국의 명맥마저 끊기고 영국의 직접 통치하에 들어간다.

동남 아시아에서는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본격화하여 1860년대에 베트남과 캄보디아 일대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간다. 한때 청이 종주권을 주장하며 그에 제동을 걸려 하지만, 진군해 오는 서구 세력을 막기에 청은 이미 너무도 취약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미얀마는 영국 지배하의 인도 제국에 편입되고, 말레이 반도도 영국이 차지하며, 인도네시아에서는 네덜란드의 지배가 더욱 강화된다.

18세기 말 이래 소수민족과 농민들의 반란이 빈발하며 급격하게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청나라는 19세기 중엽 두 차례의 아편 전쟁에서 영국.프랑스에 패하며 종이 호랑이임을 드러낸다. 이를 계기로 민족주의와 평등주의를 내건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 일대 변혁을 꾀하나 10여 년 만에 진압되고, 뒤이어 자각한 관료들을 중심으로 서양의 기술 문명을 적극 수용하려는 양무 운동이 펼쳐지지만 곧 그 한계가 드러나면서 중국은 열강의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단 하나의 예외로, 일본이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여 중앙집권 체제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 국왕제 국가로 다시 태어나지만, 일본은 이후 자신들이 서구 열강에 당한 굴욕을 주변의 여러 민족에게 그대로 전가하는 동방의 새끼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한다. 근대화 작업에 뒤진 우리 나라는 일본의 압력으로 강제 개항한 후 일본과 청과 러시아 세력의 각축장이 된다.


제17장  제국주의의 성립과 민족 운동

발달하는 자본주의는 세계를 완연하게 다른 둘로 갈라 놓았다. 한발 앞서 산업화를 이룬 몇몇 나라와 그러지 못한 나라들간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져 갔다. 어떻게든 자신을 불려 가려는 자본의 놀라운 팽창욕은 인간의 삶과 세계 구석구석에서 욕구의 실현처를 찾아 냈고, 불어난 자본은 국가의 강력한 지원하에 서로 다투고 경쟁하며 세계를 자신의 발 아래 무릎 꿇려 갔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을 전후한 수십 년 사이에, 세계는 공격적이고 탐욕스런 몇몇 제국의 말발굽 아래 수많은 나라들이 유린당하는 체제로 재편된다. 제국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자본주의와 서구 세력 침략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6세기 무렵인데 19세기 종반 이후를 유독 제국주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1870년을 전후하여 자본주의의 성격과 해외침략의 양과 질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무렵 대자본간에 사활을 건 경쟁이 시작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은행의 매개하에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심화되어 독점자본이 형성된다. 그런데 노동자의 낮은 임금 등에 따른 구매력 부족으로 이제 국내에서 만족스런 이윤을 낼 수 없게 된 독점자본은 식민지나 반식민지에 잉여자본을 투자하여 고율의 이윤을 얻고자 했고, 또 확대되는 생산의 원재료 공급과 상품 시장을 확보하는 데에도 더 많은 식민지와 착취가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독점자본의 요구에 부응하여 노골적인 대외팽창 정책을 취하며 세계 분할 경쟁의 강도를 높이게 된다. 이것이 제국주의이다.

제국주의의 지배는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반발과 부작용을 불러왔다. 식민지.종속국에서는 민족 운동이 격화하여 반제국주의.반봉건 운동으로 타올랐고, 제국 내의 노동자는 불평등과 무권리 상태에 끊임없이 저항했으며, 제국과 독점자본 상호간에는 식민지와 시장을 둘러싼 대립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1차 대전 전 40여 년간의 역사는 제국주의의 확장과 그에 맞선 저항의 역사였다.선두에 선 제국은 영국이었고, 프랑스 등이 그뒤를 이었으며, 근대화가 늦어 식민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독일.일본.이탈리아가 세계의 재분할을 요구하며 경쟁에 뛰어들었고, 미국도 1890년경 프런티어의 소멸을 기점으로 동등한 기회를 주장하며 시동을 걸었다. 그리하여 세기가 바뀔 때쯤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남은 땅은 물론 태평양상의 고도에 이르기까지 온 세계가 7-8개 제국주의 국가에게 과점당하며 세계 분할이 완료된다.

한편,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은 독점자본 및 국가권력과 싸워 참정권과 노동권을 확보하는 등 사회권력을 어느 정도 쟁취하는 반면, 식민지 초과착취 이윤의 일부를 하사받으며 체제 내에 흡수돼 간 대신, 러시아와 같은 후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혁명적인 민중 운동이 태동하고, 식민지와 종속국의 민족 운동이 개혁 운동.혁명 운동과 결합하며 반제국주의 운동의 핵심 보루로 자리잡아 간다.

제국주의 성립기에 식민지.종속국에서 활발하게 펼쳐진 반제.반봉건 운동은 전세계 곳곳에서 쉼없이 계속되어 제국주의의 지배에 파열구를 냈다. 멕시코와 투르크 등지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근대화 작업을 추진했고, 인도에서는 국민회의파를 주축으로 광범한 자치 운동이 펼쳐졌다. 열강에 의해 갈가리 찢겨진 중국에서는 변법자강 운동.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개혁과 혁명을 꾀하다가 1911년 신해 혁명으로 중화민국을 세우고 민족 자주권 확립과 근대화를 향한 몸부림을 치며, 우리 나라에서도 반제.반봉건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 운동 등이 펼쳐진다.

그러는 사이,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간에는 비밀 외교를 통한 합종연횡이 진행되어 3국 동맹과 3국 협상을 주축으로 하는 동맹국과 협상국간의 대립이 고착.격화되고, 거기에 투르크의 약화로 힘의 공백 상태에 빠진 발칸 반도의 민족 대립이 가세하여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조성된다. 20세기에 들어서며 대전쟁의 위기를 감지한 지식인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전쟁을 막으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지만, 눈앞에 고기를 둔 야수들의 탐욕을 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1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베르사유 체제

탐욕스런 제국주의는 기필코 전쟁을 불러왔다. 협상국과 동맹국간의 대립을 축으로 집요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해 온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발칸 문제를 빌미삼아 온 국민을 유례 없는 총력전으로 몰고갔다. 4년 여에 걸친 전쟁 끝에 천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고 유럽 대륙의 많은 지역이 폐허로 변했다. 일본이 독일 식민지 몇 군데를 접수한 것 등 몇몇 소규모 전투를 빼고는 전장은 비록 유럽에 국한되었지만, 그 영향은 가히 세계적이었다. 당대에 세계를 주름잡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모두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전쟁의 와중에 획기적인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전근대적인 전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후진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볼셰비키를 주축으로 한 소비에트 정부는 국내의 반혁명 책동과 외국의 대소 간섭 전쟁을 물리치고 소비에트 연방을 세계 지도 위에 올려놓았다.

1918년 말의 독일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무너지며 제1차 대전은 결국 협상국 측의 승리로 끝나고, 유럽과 세계에는 베르사유 체제가 구축되었다. 베르사유 체제는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공고히 하고자 만들어진 체제였으나, 전쟁 책임을 몽땅 독일에 지우는 등 독일을 지나치게 압박하고 엄연히 실재하는 소련을 배제하며 민족자결주의를 불철저하게 시행하고 미국 의회가 고립주의 원칙을 내세워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는 등 많은 문제점과 분쟁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그래도 1920년대에는 국제 연맹이 설립되고 군축 조약이 체결되는 등 협조 외교가 성과를 거두며 국제 질서가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으나, 1929년 세계 공황의 대두와 함께 표면적인 안정은 깨지고 다시 전쟁의 기운이 일기 시작한다.

제1차 대전 후 독일은 군비를 엄격하게 제한당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오스트리아는 중부 유럽의 소국으로 전락했으며, 전쟁의 진원지인 발칸 반도에는 유고슬라비아가 세워졌다. 전쟁의 최대 수혜국이던 미국에서는 자동차 혁명.매스컴의 발달과 더불어 기계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대중 사회가 열렸으며,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고 독일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지는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진일보했다.

중국에서는 반제국주의 운동인 5.4운동의 물결이 대륙을 휩쓴 후 1928년 북벌이 완료되어 국민 혁명이 완수되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3.1운동이 일어난 후 다양한 민족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인도에서도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을 비롯한 민족 운동들이 활발하게 펼쳐졌고, 동남 아시아 각국에서도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의 지배에 맞서 독립을 달성하려는 운동들이 힘차게 전개되었다. 투르크에서는 혁명으로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세워졌으며, 중동 지방에서는 이집트.이라크 등 여러 나라가 완전 독립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제19장  파시즘과 제2차 세계대전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은 1차 대전 후의 짧은 호황과 그를 바탕으로 한 유럽과 세계의 상대적 안정을 한순간에 날려 버렸다. 자본의 과잉 축적과 투자에 따른 생산 과잉으로 경제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경제가 장기 침체 국면에 빠져든 것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공황은 곧바로 전세계로 파급되어,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생산이 격감하고 실업자가 격증하며 경제가 대혼란에 빠졌다.

미국은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는 뉴딜 정책을 펴 위기를 미봉하는 한편 중남미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이를 돌파하고자 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본국과 식민지.세력권의 경제를 하나로 묶는 보호무역주의적 블록 경제의 수립을 꾀했다. 이에 반해 식민지가 별로 없던 독일과 일본은 새롭게 발칸 국가 및 아시아 국가들과 단일 경제권을 수립하여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들 상호간에 다시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했고, 잠복해 있던 전쟁 기운이 다시 피어오르며 경제의 군사화 경향이 가속되었다.

강대국 중에서는 단 하나의 예외로, 러시아 혁명 후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추진하고 있던 소련만이 대공황의 영향에서 비켜나 있었다. 이 시기에 소련은 1,2차 5개년 계획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강대한 공업국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지나친 중앙집중과 계획화, 당.국가 우위 체제와 관료주의,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와 반대자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 등 사회주의의 이상으로부터 이탈하는 조짐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대공황의 위기를 타고 파시즘 세력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중산계층의 불만과 자본가들의 위기감, 실업자의 격증을 배경으로, 위기를 국가주의적 독재로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대두한 것이다. 파시즘 집단은 국내의 사회주의 세력과 노동 운동은 물론 자유주의 세력까지도 혹독하게 억누르면서 노골적인 대외 침략 정책을 취했다.

파시즘 체제가 처음 확립된 것은 1922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하에서인데, 그후 유럽 여러 나라에 확산되어, 1933년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가장 야만적인 형태를 드러냈다. 히틀러의 나치스 정권은 반공주의.국수주의.보복주의를 강화하고 인종주의를 부추기며 미친 개처럼 국민들을 전쟁으로 몰고갔다. 그 무렵 동방의 일본에서도 위기 탈출책으로 군국주의화가 진행되어,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키는 등 노골적인 침략을 강행한다. 독일.일본.이탈리아의 3국은 1936년 파시스트 블록을 형성하여 세계 정복의 야망을 드러냈다.

파시즘의 공세와 전쟁 위협에 맞서 진보적인 노동자와 지식인들은 인민전선의 결성에 나서, 1935년 프랑스, 1936년 에스파냐에서 잇달아 진보적인 공화 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는 파시스트 독일.이탈리아의 지원하에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켜 공화 정부를 무너뜨리고 만다. 에스파냐 내전에서 서방 각국은 불간섭 정책을 취했고, 공화 정부는 국제 의용병의 지원하에 분투를 계속했지만 결국 분루를 삼켜야 했다. 한편, 일본의 전면적인 침략에 직면한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이 이루어져 항일 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된다.

파시스트 세력은 1935년 독일의 재군비 선언 후 대외 진출을 본격화했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한 나머지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마침내 그 불안한 타협이 깨어지며 제2차 대전이 터졌고, 1941년에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온 세계가 전쟁에 휩싸여 들어갔다. 2차 대전에서는 1차 대전 때보다 더한 총력전이 펼쳐져 경제력과 기술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커졌고, 그 파괴 양상도 더 참혹했다.

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전쟁인 동시에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전쟁, 식민지.종속국의 민족독립 투쟁이기도 한 복합적인 성격의 현대전이었다. 1945년 독일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며 제2차 대전은 마침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전쟁중에 미.영.소를 비롯한 연합국의 수뇌들은 여러 차례의 회담을 가져 전후 세계의 새로운 틀을 짰다.


제20장  냉전 체제하의 황금기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스트 추축국에 대한 민주주의 연합국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고, 국제 연맹보다 훨씬 더 짜임새를 갖춘 국제 연합이 국제 평화 유지 기구로 설립되었다. 두 차례의 대전쟁에 질려 버린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와 안정을 갈망했다.

그러나 전쟁중의 소련의 활약과 희생,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피압박 민족들의 투쟁에 힘입어 사회주의가 큰 세력을 얻으면서, 전후의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의 두 편으로 다시 갈라지고 말았다. 두 진영간에는 언제 불붙을지 모르는 ‘냉전’이라는 이름의 대립과 긴장 상태가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서 간간이 6.25와 인도차이나 전쟁 등 뜨거운 국지전이 벌어졌으며, 미.소간 핵무기 경쟁의 과열로 지구를 수십 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 양의 시한폭탄이 곳곳에 장치되었다. 그러나 요지부동으로 보이던 냉전 체제도 스탈린의 죽음을 계기로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하여 1970년대 초 데탕트 물결과 함께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에 이른다.

오랜 동안 제국주의의 압박에 시달려 온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민중들은 전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압제의 틀을 깨고 해방과 독립을 쟁취했다. 인도는 종전 직후 세 나라로 갈라져 독립했고, 중동과 동남아에서도 대부분의 나라가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며,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다수 인민의 지원하에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여 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아프리카에서는 1960년을 전후하여 대부분의 민족이 이전의 종주국을 몰아 내고 독립을 쟁취했다.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임을 자각한 이들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까지 끌어들여 제3세력을 형성, 발언권을 강화한 뒤 선진국을 향해 남북 문제를 공식 제기한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정치적 독립이 경제적 독립으로까지 이어지질 못하고 이전의 종주국이나 다른 선진국에 경제가 예속당하는 상태가 계속되었으며, 베트남에서는 프랑스 대신 미국이 개입하면서 치열한 민족해방 전쟁이 벌어진다.

한편, 엄청난 전쟁 피해의 복구, 전시 자원 전환으로 인해 부족해진 민간 수요의 충당, 군사 목적으로 개발된 기술의 이용은 서방 자본주의 세계에 새로운 황금기를 가져다 주었다. 거기에다 냉전과 그에 따른 군사 수요도 오히려 자본주의의 발전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전후 자본주의 세계는 미국 자본의 뒷받침과 미국의 주도하에 공전의 황금 시대를 맞으며 거의 한 세대 동안 실업 없는 고도 성장을 계속한다. 서유럽과 일본은 빠른 속도로 전쟁의 잿더미를 헤치고 일어났고, 서방의 여러 나라에서 케인스주의에 뿌리를 둔 사회민주주의 정치이론이 힘을 쓰면서 ‘복지국가’를 출현시켰다.

소련과 신흥 사회주의권에도 이 시기는 황금기였다. 소련은 그간의 계획경제가 빛을 보면서 빠른 속도로 전쟁 피해를 극복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기반을 다졌으며, 동유럽 등 사회주의권의 여러 나라도 소련을 전범으로 삼아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갔다. 소련은 또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갓 벗어난 제3세계의 신흥 국가들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상당수의 나라가 완전 독립을 달성해 사회주의 쪽으로 발전 방향을 잡도록 이끌었다.

동서 두 진영은 ‘해빙’ 이후 평화 공존 정책을 취하며 체제 경쟁에 돌입했다. 두 진영은 서로를 비방하고 견제하며 때로는 변방에서 대리전을 치르면서도, 알게 모르게 서로를 닮아 갔다. 서는 동에서 계획과 복지의 개념을 받아들였고, 동은 서에서 경쟁과 이윤 요소를 도입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중.소 대립이 격화되고 제3세계의 발언권이 커지며 서유럽과 일본이 자립하여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권으로 자리를 잡아 가면서, 세계는 미.소 양극 시대에서 다극화 시대로 접어든다.


제21장  오늘날의 세계

4반세기 동안의 유례 없는 고도 성장은 1973년 고정환율제 붕괴와 석유 파동을 계기로 종막을 고했다. 자본주의 경제는 1974년에 전후 최초의 공황을 맞은 이래 다시 주기를 타며 큰 폭의 오르내림을 반복하기 시작했고, 성장률도 황금기에 비해 눈에 띄게 떨어졌다. 고도 성장기에 과잉 축적된 자본은 무한 경쟁을 부추기며 세계화의 속도를 높여 갔고, 갈 곳 없는 자본은 돈 자체에 대한 투자를 시작하여 금융시장을 팽창시켰다. 거기에다 1970년대에 들어 한층 더 속도가 빨라진 과학기술혁명은 생산과 유통, 정보통신 부문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며 인간의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는 한편, 무한 경쟁과 이윤 추구의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황금기의 종말은 그 시대를 풍미한 케인스주의에도 사망 선고를 내리고, 그뒤를 이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출현시켰다. 신자유주의는 축적의 위기에 몰린 자본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부여하여 위기를 타개케 하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는 이데올로기로서, 그 과정에서 많건 적건 자유 시장의 원리를 거스르는 민족국가와 복지제도, 노동운동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자본간, 국가간, 개인간의 무한 경쟁이 가속되면서, 불평등과 불안정성이 확대되고 실업이 늘어나며 사회보장은 후퇴하고 환경과 공동체는 파괴된다.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지난 20여 년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며 세계를 주물러 온 결과물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무한 경쟁을 다시금 제일의 지도 원리로 받아들인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재빨리 흡수하여 위기를 돌파하는 데 일단은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한때 독일 경제가 이끄는 서유럽과 일본에 추격당하는 듯하던 미국이 다시 주도권을 거머쥐었고, 선진 자본주의국과 제3세계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져 갔다.

반면에 평화 공존의 모토하에 서방 세계와의 교류를 강화해 온 사회주의권은 관료주의에 질식되어 사회주의의 이상도 구현하지 못하고 자본주의권의 엄청난 성장 속도도 따라잡지 못한 채, 마침내 체제 경쟁에서 손을 들고 말았다. 1990년을 전후하여 사회주의권은 사회주의의 혁신 목소리와 함께 자유화의 광풍이 밀어닥치는 가운데, 부실하나마 그간 쌓아 온 탑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다시 자본주의의 변방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와 더불어, 미.소 양극의 냉전 체제는 완전히 해체되고, 자본주의가 이제 승리한 체제임을 주장하며 전세계를 무한 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렇지 않아도 점점 더 벌어지고 있던 자본주의 선진국과 후진국간의 격차는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거세진 1980년대 이후 더욱 급격하게 벌어지면서, 남북 문제를 인류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부각시킨다. 한쪽에서는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건이 만들어져 갖가지 문제가 빚어지는 반면에, 한쪽에서는 10억이 넘는 인구가 기아 상태로 죽어 가는 상황이 벌어지기에 이른 것이다. 드문 예외로서 몇몇 신흥 공업국이 착실하게 산업화를 진전시켜 선진국에 버금가는 상태에 이르는가 싶었으나, 1980년대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나라가, 1990년대 후반에는 동아시아의 선두 주자들이 거센 경쟁의 파고와 금융시장의 농간에 휩쓸려 시지프의 바위처럼 굴러떨어지며 그 가능성에 짙은 회의를 안겨 주었다.

인류는 지금 국가간, 지역간, 집단간, 민족간, 자본간, 개인간에 그야말로 사활을 건 경쟁을 치르며 21세기를 맞고 있다. 그와 더불어, 이러다가는 공멸할지도 모른다며 더불어 사는 세상의 근본 원리를 돌이켜보자는 이성과 양심의 소리 역시 갈수록 높아 가긴 하지만,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야수성의 고삐를 틀어쥐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듯하다. 인류의 21세기는 그 야수성을 부추기는 요인들을 어떻게 제어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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