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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고 번역하며 사는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쓰거나 옮긴 책을 읽어주는 일일 것이다. 책을 많이 사 경제적 도움까지 준다면 물론 금상첨화다.

조금만 틈이 났다 하면 딴짓을 하느라 글쓰기와 번역에 전념하진 못했지만, 한 깜냥에 비해서는 나도 아마존과 남양주의 나무를 뭉터기로 베어내는 데 일조해온 글쟁이인 셈이다. 저술가로서는 시원치 않았지만 번역가로서는 과분할 만큼 책이 많이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일일이 들먹이면 책선전하는 것 같아 보일 테니 생략하고, 올 한해 동안 낸 책, 특히 최근 출간서를 중심으로 책을 소개하면서 그 소회를 간단히 읊어보려 한다. 블로그를 열자마자 책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게 솔직한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실 최근 2년 동안은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아 사회활동은 거의 중단하다시피 하고 번역에 매달려왔다.

한동안 강도 높은 사회운동에 개인 사정까지 겹쳐 몸을 혹사한 탓에 건강도 여의치 않고 책 내용도 만만치 않아 번역하는 데도 꽤 애를 먹었다. 그러다 보니 작년에 내려던 책이 올해로 밀리고 올해 내려던 책은 또 내년으로 밀리면서 올 들어 지금까지 세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두 권은 번역서고, 한 권은 15년 전에 지은 책의 개정판이다.

그중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은 제프리 삭스가 지은 책 <커먼 웰스 - 붐비는 지구를 위한 경제학>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대충 이런 모양의 묵직한 책인데, 동네 고양신문사에서 사진을 이런 각도에서 찍어 소개한 것이 인상적이어서 그대로 퍼왔다. 아마도 여러 관계상 사진저작권 시비는 걸지 않을 테니 안심해도 괜찮을 것 같다.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지은이가 이대로 살다 함께 죽을래, 아니면 있는 놈들이 한턱 내서 이참에 지구를 살리고 살아난 지구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래, 하고 세상에 대고 경고하는 것이다. 저자가 나름 내로라 하는 인물이고 세상에서도 인정하는 세계적인 경제학자이니 그 경고에 무게가 실린다.

저자의 경고는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 온난화와 물 부족 문제, 인구팽창, 전세계적 빈곤 문제 등, 거의 전방위에 걸쳐 강도 높게 펼쳐진다. 지금 인류가 각성하여 문제를 해결하면 인류 앞에 탄탄대로가 열리지만, 시기를 놓치면 해결이 아예 불가능해지거나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경제학자답게 여러 가지 통계와 수치를 거론하며 자신의 주장과 추론을 전개해간다. 요컨대, 현재의 선진국들이 당분간 국민소득의 2.4퍼센트만 투자하면 전지구적인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선진국들이 자신과 인류의 행복을 위해 그만큼 자신의 현재의 이익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그래야 자신들도 살 수 있으므로 합당하기 그지없는 주장이지만, 어디 인간의 행동이 그렇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던가? 인류가 그렇게 합리적이라면 경제위기도 공황도 오지 않을 텐데, 10년이 멀다 하고 경제위기와 공황은 닥치고, 특히 약한 자들이 그 파편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그런 광경을 몇 차례 지켜보다 보니, 삭스의 경고를 사람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 합리적으로 행동할지 심히 의심스러워진다. 위기가 실제로 들이닥친 뒤에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사태 수습에 나서려 들지 않을지. 아니, 그 이전에 다른 각도의 다른 해법이 나와 다른 방향으로 사태를 수습해가지는 않을지.

어쨌든 반년 이상 공들인 책이 나와 언론과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간의 맘고생, 몸고생이 조금은 씻겨나가는 것도 같다. 역시 유명한 저자에 유명 출판사의 파워는 막강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더 자세한 정보는 인터넷 서점 등에서 확인해보시길.


지난 7월에는 예상치 못한 책이 한 권 나왔다. 15년 전인 1994년에 쓴 <러시아사 100장면>이라는 책이 <러시아역사 다이제스트100>이라는 제목으로 전면 개정되어 나온 것이다. 소련 붕괴 후 착잡한 심경에 소련 붕괴의 원인도 한번 돌아볼 겸, 러시아사 전반을 훑어보며 러시아와 혁명, 소련에 대해 애도사를 쓴다는 마음으로 썼던 책인데, 이제 수명이 다했나 할 즈음 전면 개정되어 재출간되니, 마치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온 듯한 느낌이다.

이 책이 내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 것은, 그전에 물론 짧은 글은 여럿 썼고 번역서도 여러 권 낸 뒤였지만, 혼자서 책 한 권을 통으로 맡아 쓰면서 책을 쓴다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이고 이토록 뿌듯한 일이라는 걸 처음 느끼게 해준 책이기 때문이다. 개정 작업을 하면서 새삼 느낀 점은 만일 이 책을 지금 쓴다면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천착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나름대로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 두뇌가 그만큼 굳은 건지, 아니면 자세가 흐트러진 건지...

어쨌든 아직까지도 이 책을 찾아주는 독자들이 고맙고, 다시 내준 출판사도 고맙다. 이것으로 그 출판사(내 저서를 세 권 낸 출판사)에 대해 갖고 있던 다소 섭섭한 마음도 조금은 덜어졌다.


올 초에는 맨 앞에 소개한 <커먼 웰스>보다도 더 많은 공을 들이고 고생도 더 많이 했던 책이 출간됐었다. 이런저런 일로 한눈을 판 서너 달 빼고 작년 2008년을 통째로 투입하여 번역한 파라그 카나의 <제2세계>라는 책이다.

66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오늘날의 새로운 세계 지형을 돌아보는 국제관계서로, 세계의 권력이 미국 단극 체제에서 미국, 중국, EU의 3극 체제로 전환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의 진입로 상에 있는 '제2세계' 국가들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음을 풍부한 관찰 결과를 토대로 역설하고 있는 책이다. 참고로, 저자는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지칭하던 제2세계라는 용어는 이제 한물 갔고, 제2세계라는 말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국가군을 가리키는 말로 바꾸어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출간 즉시 언론의 대대적인 관심을 한몸에 받았는데, 마침 닥친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받고 28,000원이라는 책값도 만만치 않아 기대만큼 많이 팔리진 않았다. 그러나 경제가 호전된다면 다시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책이라고 위안을 해본다.

번역자로서 힘들었던 것은 분량보다도 오히려 저자의 미려한 문체였다. 문학서에나 쓰임직한 비유와 인용 등, 골머리를 썩이지 않는 문장이 사실상 하나도 없을 정도였는데, 그것을 또 나름대로 유려한 우리말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술술 읽히는 이 책에서 역자가 느꼈을 고충을 독자들이 혹시 이해하려나?


마지막으로, 에피소드 하나

한달쯤 전에 느닷없는 메일 한 통을 받았다. 당신 글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것이다. 무슨 글이냐 했더니, 위 책에 실린 글이란다. 10년 전쯤 번역한 아이들 책(뇌과학을 아이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 책)인데, 번역하면서도 참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미있게 일한 기억이 생생하고, 그 덕분에 그뒤 이 출판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번역을 하는 계기가 된 책이기도 하다.

확인을 요청했더니, 팩스로 교과서 두 페이지를 보내왔다. 이 책 두 페이지가 중학교 국어 교과서 '쉬어가는 페이지'에 실려 있었다. 덕분에 공돈으로 원고료도 조금 챙겨 받고,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나 싶어 잠시나마 시름을 잊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내게도, 사람들에게도, 세상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