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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살의 은폐, 왜곡

학살은 한 바탕 피바람으로 그치지 않았다. 학살의 땅에 선 대한민국과 그 후견인인 미국, 그리고 학살자들은 자신들의 손에 묻은 벌건 피를 하루 빨리 씻어내야만 했다. 그래도 사람 사는 땅에서 존경받고 권위를 인정받고 지도자로 행세하자면 학살자라는 멍에를 벗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일차적으로 취한 방법은 학살 자체를 없던 일로 하는 것이었다. 전쟁중에 죽은 민간인의 수는 터무니없이 축소되었으며, 그조차도 전투나 학살과는 무관한 병사, 객사 따위로 처리되고, 다수는 그저 실종자나 행방불명자로 간주되었다. 그것으로도 문제를 덮을 수 없는 사람들에겐 학살이 아닌 그럴듯한 명분을 씌워 사실을 호도했다. 이제 오갈 수 없는 장벽이 된 휴전선이 그런 은폐를 도와주었다. 어쩌면 북에 생존해 있는지도 모른다, 북으로 ‘납북’된 건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들이 그런 모호한 통계를 뒷받침해주었다.

나아가 모든 피학살자들은 ‘악질 빨갱이’로 둔갑하거나 아니면 외려 민족의 원수인 공산당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한 ‘착한 인민들’로 탈바꿈되었다. 자기네가 죽인 사람들을 함께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철천지원수나 선한 희생양으로 만들어야만 자신들의 행동이 합리화되고 자신들의 존립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열살 박이 아이도 댕기머리 소녀도 모두 ‘악질 빨갱이’가 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거꾸로 ‘불순한 이념의 희생양’이 되었다. 많은 피학살자들이 죽어 마땅한 인종으로 둔갑했고, 그 ‘인간 송충이’들을 잡아 처치한 것은 결코 죄가 아니었다. ‘선한 희생양’들은 국가가 나서서 그 원을 풀어주어야 마땅할 텐데,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그 이면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 손도 대지 못한 채 긴 세월을 침묵으로 버텨왔다.

학살자들은 정부의 절대적인 비호하에 애국자로 둔갑했다.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빨갱이 사냥’은 영웅적인 행위였고, 그 일을 서슴없이 행한 사람은 ‘애국자’였다.

멀쩡한 기록, 멀쩡한 호적이 없다

심지어는 학살을 자행한 국군 부대를 공비로, 우익단체원들을 변장한 인민군으로 조작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살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모두 인민군이나 공비라는 터무니없는 등식이 모든 공식 기록과 교육 자료에 버젓이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사람을 죽인 것은 인민군이요 빨치산이요 지방 빨갱이였다. 자신들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선량한 사람이거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악당들을 물리친 ‘정의의 사도’였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간간이 확인되는 피학살자들은 정말 한 지붕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악질 빨갱이’였다.

호적이 둔갑된 사례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전쟁 전 공비 토벌의 와중에서 일어난 문경 석달리 학살이다. 1949년 12월 문경 산북면 석달리에서는 어린이와 노인이 다수 포함된 남자 43명, 여자 43명의 86명이 단지 국방군을 환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국군들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현지 부대를 지휘한 국군 장교와 경찰은 무장공비들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상부에 허위보고했다. 당시 산북면 면서기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피학살자들의 호적에 공비에게 죽었다고 기록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증언한다.

널리 알려진 거창 신원면 학살사건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1951년 2월 당시 진주에 주둔해 있던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신원면 주민 약 1천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소집한 뒤 경찰과 지방유지 가족을 제외한 719명 전원을 박산골짜기에서 집단사살한 뒤 시체를 불태웠다. 그중 태반이 14세 이하의 어린이거나 60세 이상의 노인이었다. 군은 이 학살을 은폐하려고 외부와의 왕래를 일체 차단하고 생존자들에게 발설하면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럼에도 상황이 워낙 명백한지라 사단본부에서는 “학살된 주민의 대부분이 민간인이어서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부녀자 강간, 물품강요, 재산약탈 등으로 주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라는 보고서를 올렸으나,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는 “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이 같은 비행이 외국에 알려지면 전쟁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군의 사기를 해친다”면서 “희생자 수는 187명이며 모두 통비분자였다”고 사건을 조작했다.

역시 유명한 함평학살의 경우에도 군인들이 민간인을 죽인 다음 ‘공비’를 토벌한 것으로 보고했고, 나주 세지면과 다도면, 담양 대덕면, 장성 황룡면 등 수많은 지역에서 똑같은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진실을 알 권리조차도 유린하다

동토를 헤집고 존재를 드러내려는 사실은 밟아 으깨버렸다. 학살자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비호하는 사실은 대서특필하고 그에 반대되거나 그럴 우려가 있는 사실들은 무시하거나 왜곡하여 없어버렸다. 은폐와 조작에 용감하게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사람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만 끓였다. 피학살자들의 목숨에 이어 유족들의 알 권리까지도 유린당했던 것이다. 가장 큰 은폐, 왜곡은 진실규명운동의 무자비한 탄압으로서, 이는 피학살자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행위였다.

4.19 직후 영남 지방을 비롯한 전국에서 양민학살 진상규명 운동이 봇물처럼 터졌으나, 1년 뒤 5.16쿠데타로 철퇴를 맞았다. 많은 유족과 사회운동가들이 투옥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다. 전쟁기의 학살과 무관하지 않은 쿠데타 세력은 아예 학살의 흔적조차 없애버리고자 했다. 곳곳에서 위령비를 박살내고 무덤을 파헤쳐서는 유골을 내다버렸다. 사실은 물론 역사마저도 깨끗이 지우고자 했던 것이다.

5.16 직후 남제주의 백조일손 묘역에서, 거창 신원면 묘역에서, 경남 진영의 피학살자 묘역에서, 그밖의 수많은 곳에서 위령비가 파손되고 공동묘역이 파헤쳐지고, 희생자 명단과 많은 증거문서들이 압수돼갔다. 하수인은 4.19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난 이승만 정권의 앞잡이 경찰들이었고, 명령자는 쿠데타의 주역들이었다. 참고로, 5.16 쿠데타의 핵심 주역인 장도영, 박정희, 김종필 등은 6.25 당시 육군 정보국장과 그 요원들이었다. 유족회에서 자체 조사한 자료, 4.19 직후 국회와 정부에서 조사한 자료는 거꾸로 연좌제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외면과 망각의 합의’

학살의 은폐와 왜곡은 불행히도 가해집단만의 소행이 아니었다. 이 땅에서 살 만한 위치를 선점한 온갖 인간들이 그에 가세했고, 이 땅의 민초들도 살기 급급하여, 혹은 살기 위하여, 혹은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침묵으로 그에 동조했다. 심지어는 피학살자의 가족도, 친족도, 이웃들도 자신의 삶을 위해 그에 함께 했고, 이 땅의 양심들도, 이 땅의 지식인들도, 이 땅의 사회운동가들도 ‘현안이 시급하므로, 어려운 문제라서, 먼 일이라라서’ 운운하며 진실 밝히기에 나서지 않았다.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야만의 사회에서 그 고통스런 기억들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져가며 재구성되었다. 악의적으로 재구성된 이야기들이 버젓이 교과서에 등재되며 자라는 세대들의 정신마저도 옭아맸다. 우리 사회는 거대한 정신병동이 되었고, 한국전쟁기의 100만 민간인학살은 병든 사회의 제일 금기가 되었으며, 언론도 학자들도 심지어는 사회운동가들까지도 이 문제를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학살은 없던 일이 되었고, 사라진 100만의 고귀한 생명은 기록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부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또 다른 학살이었다. 피학살자들을 두 번, 세 번 죽인 것이었다. 한국 사회는 진실을 찾아 밝힐 힘을 잃고 깊은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계속)

(글: 이무열, 그림: 박건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