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0. 과거청산은 시대의 명령

한국전쟁전후 100만 민간인학살 문제의 본질은 국가권력이 수많은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죽이고도 그에 대해 반성도 않고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오랜 기간의 진실규명 요구에도 묵살로 일관해왔다는 것이다. 즉, 국가권력의 도덕성의 문제이고, 직무 유기의 문제이며, 국가권력의 존재 의의의 문제이고, 나아가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물을 수밖에 없는 문제다. 국가가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또 문제를 묵살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버린다면, 수백만 유족들에게, 그리고 현장을 지켜보고 이야기를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국가란 무엇이겠는가? 국가에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막중한 임무는 없을진대, 하물며 국민, 그것도 전투와 무관한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죽이고 또 이를 묵살하는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성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된다”

불행히도 우리의 최근 역사는 50여 년 전의 그 과오를 씻지 못하고 똑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해왔다. “반성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된다”는 금언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그 잔해와 여파가 곳곳에 널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을 불법적으로 죽인 사람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 피의 살육 명령을 내린 사람들이 당당하게 어깨 펴고 사는 세상에서 정의니 인권이니 하는 것들이 어떻게 비치겠으며, 바로 옆에서 가족들이, 이웃들이 무더기로 끌려가 죽는 걸 지켜본 사람들에게 웬만한 인권유린이나 폭력이 무슨 대수겠는가? 그런 속에서 어떻게 인권과 민주주의와 평화의 꽃이 피기를 바라겠는가? 나아가 그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국가와 사회 차원의 일대 반성을 하고 넘어가지 못하는 한, 우리는 머지 않아 다시 우리 주변에서 50여 년 전의 피바람이 다시 불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특히 한반도 안팎에서 여전히 전쟁의 기운이 가시지 않고 있는 지금, 이것은 결코 과거사가 아니고 오늘의 문제이고 또 미래의 문제다.

한국전쟁전후 집단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우리 국가와 사회의 기초를 다시 세워 피로 얼룩진 이 죽음의 땅을 삶의 땅으로 거듭나게 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작업이다. 이제라도 가해자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사죄, 반성하면서 진실을 털어놓고, 가해책임자이자 해결책임자인 국가는 그 책임을 통감하고서 진실을 밝히고 합당한 후속조치를 취하며, 피해자는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며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그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학살의 최종 책임자이자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국가는 학살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그 후속 조치를 취하고, 지난날의 과오를 사죄하고, 그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고, 그 뼈아픈 교훈을 길이길이 후세에 물려주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만 그 책임을 다하게 되고, 그를 통해 학살의 국가가 인권과 평화의 국가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과거청산의 주요 과제들

지난 세기, 우리 민족은 참으로 많은 질곡을 헤쳐왔다. 그런만큼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그럼에도 정부 수립 이후 반백년이 훨씬 지나도록 우리는 한 번도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돌아보면서 성찰해본 적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문제들이 계속 덧쌓이면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꼬이게 만들어왔다. 해방 후 60년이 지난 이 시점에 와서야 우리는 비로소 과거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았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과거청산의 주요 과제는 크게 일제강점기의 친일과 강제동원, 한국전쟁기의 민간인학살, 독재정권 시절의 인권탄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청산되지 않은 친일잔재를 청소하고 일제강점기의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것, 그리고 해방과 전쟁, 국민국가형성기에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학살의 진실찾기, 또 군사독재정권의 통치하에서 발생한 무수한 인권탄압 및 조작의혹 사건, 군의문사 사건의 해결과 재발방지책 마련 등이 과거청산의 주요 과제들이다.

이제라도 이들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가며 새로운 미래의 주춧돌을 놓아야 하는 임무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과거청산은 오늘의 한국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린 시대의 명령이다. 이 기회를 다시 놓친다면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기회를 다시 맞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씻고 거듭나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느냐, 과거의 잘못을 계속 되풀이하며 좌충우돌하느냐가 오늘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상처는 숨기면 곪아터진다

민간인학살 문제를 비롯한 각종 과거사 진상규명 과정에서 소란이 있을 수도 있다. 숨겨진 진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충격도 있을 테고, 이의 해결방안과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도 분분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국민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서 생성되는 긍정적인 에너지이지 결코 퇴행이나 답보가 아니다. 상처는 드러내야 치료할 수 있다. 숨기기에만 급급하다면 곪아터질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민간연구를 통한 문제해결방식은 사실상 ‘과거청산’을 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민간연구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조사권한과 정부 각 기관의 협조 없이는 진실을 밝힐 수도 없고, 오랜 세월 동안 고통받아온 피해 국민의 구제 장치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국가가 나서서 국가의 책임하에 조사를 진행해야만 바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경우, 과거청산의 또 다른 목적인 잘못된 공권력의 자기반성의 기회, 즉 국가가 자기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공권력을 불법 행사하여 국민에게 피해를 입힌 과거를 반성하며 자기 정화할 기회도 갖지 못하게 된다. 공권력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뿌리깊은 불신은 국가가 공권력을 국민 다수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권력자의 편의대로 사용한 과거의 잘못에 기인한다. 그리고 친일 인사들이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기념관이 세워지는 등 친일잔재가 곳곳에 드리워져 있는 오늘의 상황은 조사 연구가 미흡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국가의 공식 조사와 공식 입장이 없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의 뒷받침을 받는 국가기구에서 공식적으로 과거사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역사적 평가는 그 다음의 일이다.

온전한 진실규명만이 더불어 사는 길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보나, 지난 4.3위원회나 의문사위원회의 조사활동을 통해서 보나, 국가조사기구의 미약한 조사는 자칫 가해자와 국가에 면죄부만 줄 가능성이 크므로 제대로 된 조사를 통해 완전한 진실규명을 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야 하고 그 권한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진실을 온전히 밝히지 못하는 조사는 또 다른 왜곡과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2005년 12월 1일 발족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현재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먼저,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만들어짐으로써 그 일차적 임무인 온전한 진실규명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민원해결성 접근방식과 타협의 기류가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정치적 타협의 결과인 위원 구성시부터 이미 예견됐던 문제긴 하지만, 위원회 구성준비시 민간 의견의 배제, 위원회의 특수한 역할과 임무를 감안한 조정 운영 능력 부재 등이 문제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그 결과, 진실규명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인력과 예산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법에 미비했던 조사권한의 강화에는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거사들의 경중을 헤아려 조사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편제를 갖추고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그 존재의의를 부각시켜가기는커녕 기계적인 조직 편제와 운용으로 오히려 조사효율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그렇다고 현재 진실화해위가 떠맡고 있는 역할과 임무가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가장 큰 임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만 보아도, 위원회는 어쨌든 신청이 들어오는 모든 사건들을 두루 조사하여 피해, 가해, 책임, 배경, 전개 등의 사건 전모를 밝히고, 피해자와 유족도 선정해야 하며, 조사보고서를 발간하여 국가의 공식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의 유골 수습 안치, 피해자에 대한 위령사업과 명예회복 등의 후속조치, 또 이런 피해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한 각종 기념사업, 교육 프로그램 등의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위원회의 과제이고, 그 임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의 일차적 책임도 위원회에 있다. 어떻게든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내고 권한을 확보하여 그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때 그 자리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는가?”

아무리 어려워도, 어떤 난관이 닥쳐도 과거의 묻혀진 진실을 밝혀 미래를 비추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과제다. 진실화해위는 위원회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임무를 똑바로 자각하고서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전쟁기의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 등 과거사 관련 피해자들이 이제 고령이 되어 하루가 다르게 유명을 달리하는 분들이 부쩍 늘고 있는 이때, 피해자나 유족 1세, 직접 경험자들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 있는 동안에 진상조사를 서둘러야 할 이때, 그 책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훼방을 놓거나 시간만 축내는 자는 역사의 돌팔매를 맞는다.



11. 전쟁과 학살을 넘어 인권과 평화의 나라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은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진상조사의 궁극적 목적이 결코 가해자․피해자 개인간의 화해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사 진상조사의 중심은 과거의 국가폭력에 대한 국가의 책임 인정과 그 사죄이고, 과거청산의 핵심은 국가와 피해자인 국민간의 화해다.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국가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만일 오늘 우리가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밝히고 그를 통해 국가와 국민들간의 진정한 화해를 끌어내는 일에 실패한다면, 매우 부정적인 상황이 초래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법치주의에 대한 회의, 국가권력에 대한 냉소와 미래에 대한 불신이 더욱 확산될 것이다. “법이 종료되는 곳에서 폭정이 시작된다”는 말처럼, 폭정의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다. 사회적 피해자의 편에 서서 그 눈물을 닦아주고 그 권리를 찾아주는 정의의 구현에 실패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세력의 은근한 비토권이나 그 정치적 영향력을 재확인시켜주는 셈이 된다.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태에 절망감을 느끼게 되고, 정부의 정치 능력이 여러 각도에서 의심을 받게 된다. 전환기의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치유와 화해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은 학살의 대지 위에 살아남은 우리의 몫이다. 피해자들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고 있고 유족들은 통한을 가슴에 품은 채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다시는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이 없도록, 풀지 못한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등지는 사람이 없도록, 차마 토로하지 못할 반인도적인 범죄를 합리화하고자 한평생 몸부림치는 사람이 없도록,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람이 없도록, 지금 우리가 나서서 잃어버린 역사와 사회정의를 복원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반백년 전에 일어난 불법적인 민간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서 그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을 구제하며 국민 개개인으로 하여금 그 진실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성찰하여 다시는 그런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경주해야 한다. 그래야만 전쟁과 학살의 나라가 인권과 평화의 나라로 거듭날 수 있다.

책장을 덮기 전에 모두 함께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 국군과 경찰이 동족에게 저지른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제쳐둔 채 외국 군대의 만행만을 문제삼는 우리의 모습을 외국인들은 어떻게 볼까? 한국전쟁 전후의 100만 민간인학살 문제는 외면한 채 유태인 홀로코스트와 남경 대학살과 코소보 학살과 이라크 민간인학살에는 큰 관심을 보이는 자세는 올바른 태도일까? AP통신이 노근리 사건에 대해 한번 떠들면 온 나라가 시끌벅적해졌다가 물결이 한 차례 지나간 뒤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자세는 또 어떠한가? 6.25 당시 인민군의 죄상만 부각시키고 우리 군경이나 미군에 의한 학살은 배제하고 있는 우리의 교과서 왜곡은 외면한 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는 벌떼처럼 달려들어 성토하는 태도는 올바른 자세일까?

눈앞의 작은 피해들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역사적, 사회적으로 큰 죄악에는 둔감한 것은 옳은 태도일까? 6.25를 전후한 시기의 대규모 민간인학살은 좌시하면서 인권을 논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길은 이런 곳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연전에 쓴 글을 다시 읽다 보면, 인간과 사회와 역사가 진보한다는 대명제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한다. 특히 요즘처럼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듯한 때에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장기적으로는 역사와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진보를 믿는다. 세상에는 지만 잘 살겠다고 날뛰는 인간들만 있는 게 아니고, 다 함께 더불어 살려는 사람들도 적지않이 있으며, 그 사람들로 인하여 결국 세상이 구원을 받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 끝)

(글: 이무열, 그림: 박건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