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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꺾은 사람들


금정굴 사건을 비롯한 고양지역 부역혐의자 학살의 직접 주체는 고양경찰서와 휘하의 민간치안조직이었다.

이들은 경기도 경찰국과 경인지구 계엄사령부, 그리고 사실상 대통령의 직속기관처럼 행동하고 있던 군검경 합동부사본부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고양경찰서


고양경찰서는 희생자들을 금정굴로 이송하여 처형하는 과정을 주도했다.

고양경찰서의 하부조직인 각 지서 및 출장소는 희생자들을 연행, 선별하는 일을 했다.

각 지소는 사무실 일부를 치안대에 제공하기도 하고, 곡물창고 등 임시유치시설을 이용하여 부역혐의자들을 감금, 고문, 조사했다.

지서에 감금된 주민들의 일부는 고양경찰서로 보내지고, 일부는 한강변이나 마을 계곡으로 끌려가 죽었다.

당시 고양경찰서장은 김포경찰서를 거쳐 온 이무영 경감으로, 김포에서 가족 일부가 인민군에게 희생당한 후 그 원수를 갚는다며 금정굴 사건을 비롯한 고양지역 부역혐의자 학살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10월 20일의 학살은 이무영 서장이 직접 총살을 하며 지휘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고양경찰서에는 경무계, 사찰계, 수사계, 보안계, 통신계의 5계와 직할지서(중면), 벽제지서, 능곡지서, 신도지서, 원당지서, 송포지서의 6개 지서가 있었고, 덕은출장소, 행주출장소, 고양출장소의 3개 출장소가 있었다.

사찰주임은 이영근 경위, 경비주임은 석호진 경위, 경무주임은 고영준 경위였다.

자료와 증언을 통해 학살에 직접 가담한 것으로 확인된 경찰관은 고양경찰서장 이무영 경감, 사찰주임 이영근 경위, 경무주임 고영근 경위, 사찰계 김한동 경사와 송병용, 김종순, 박용길, 김천국, 오기섭 순경 등이다.


치안대와 의용경찰대


치안대라 부르는 민간치안조직 활동의 법적 근거는 1950년 7월 22일 선포되어 8월 4일 국회의 승인을 얻은 ‘비상시 향토방위령’이었다.

‘비상시 향토방위령’에는 ‘자위대’를 설치하도록 돼 있는데, 고양군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는 이미 조직돼 있어 사람들에게 익숙한 ‘치안대’라는 이름으로 ‘자위대’를 조직,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고양지역의 치안대는 9월 20일 맨 먼저 수복된 능곡 지역에서 처음 조직되었다.

또한 수복지인 능곡 지역에 모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중면 치안대와 송포면 치안대가 차례로 조직되었다고 한다.

이후 능곡과 수색 지역의 치안대원 50여 명과 태극단원 30여 명이 9월 28일 고양경찰서를 수복하고 곧이어 경찰이 복귀한 후 고양군 전역에 치안대가 조직된다.

치안대의 핵심 간부는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 간부들이 맡았다.

고양군 치안대장은 대한청년단 고양군 단장 이학동이었고, 벽제면 치안대장 홍기세는 벽제면 대동청년단장이었으며, 신도면 현천리 치안책임자는 태극단원 정상국이었다.

고양경찰서 복귀 후 고양경찰은 중면 치안대원을 중심으로 의용경찰대를 조직, 운영했다.

고양경찰서 의용경찰대에는 취조반까지 두고 있었다.

의용경찰대원은 이후 금정굴 사건에서 경찰을 도와 취조, 고문, 호송, 총살 등‘더러운 일’을 도맡아 수행한다.

고양경찰서 의용경찰대원으로는 이진, 촤상순, 차계원, 엄진섭, 강흥환, 피원용, 최상철, 이영환, 김완배, 양재남, 최명진, 이영식, 김효은, 강금로, 김금룡, 김영배, 김영조, 김정식, 박종철, 신현섭, 오흥석, 이광희, 이계득, 이근희, 이근용, 이은철, 조병세, 최우용, 허숙 등의 이름이 확인된다.

이중 대한청년단 간부 김완배는 경찰과 함께 연행자 명부를 작성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이진은 인민군 점령기에 죽은 형제에 대한 복수심에서 금정굴 학살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확인된다.

치안대는 각 마을을 기본 단위로 조직되어, 부역혐의자 감시활동과 야간 경비활동 등 경찰 치안활동을 보조하는 일을 했고, 치안대의 간부는 대한청년단 등의 우익단체 간부들이 맡았으며, 고양경찰서장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마을 단위의 각 치안대는 가까운 경찰시설이나 마을 공회당에 사무실을 두었으며, 여의치 않은 곳에서는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을 점거하여 사무실로 썼다.

그리고 사무실 부근의 양곡창고나 공회당, 얼음창고 등을 임시유치시설로 이용했다.

치안대원들은 각 마을의 부역혐의자를 사무실이나 유치시설로 1차 연행하여 감금, 고문했다.

치안대원들의 무기는 평상시에는 몽둥이였으나,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든 M1이나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

경비나 부역혐의자 연행, 살해에 필요한 실탄은 지서에서 지급했다.

치안대원의 주 임무는 부역혐의자 감시 및 연행과 야간경비 활동이었으나, 때로는 부역혐의를 받고 있는 주민들을 직접 살해하기도 했다.

구산리, 성석리, 행주리 등에서는 치안대원들에 의해 꽤 큰 규모의 학살이 자행된다.

치안대원들은 인민군 점령기에 자신들이 탄압받은 것에 대한 보복심, 그리고 자신의 부역 전력을 지우고 ‘살아남기 위한 변신’의 몸부림으로 다른 주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악행을 저질렀다.

고양지역 치안대원들은 모두 고양경찰서장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보통 경찰관 한 명이 몇 개 마을의 치안대를 감독했다.

부역혐의 학살에서 가장 서글픈 사실은 경찰의 무분별한 공권력 남용을 도운 치안대원과 의용경찰대원들 중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에 부역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피난길을 막고 자신들만 피신한 정부와 경찰로서는 점령지에서의 부역행위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부역자 중 전향한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큰 물고기는 다 빠져나간 상태에서 목숨을 담보로 ‘피라미’ 부역자 중 일부를 압박, 전향케 하여 또 다른 ‘피라미’ 부역혐의자를 색출, 연행하게 했던 것이다.

특히 고양경찰서 의용경찰대원들은 대부분 금정굴 사건 직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조사 과정에서 인민군 치하에서의 부역행위에 대한 조사를 받았는데, 그중 치안대원 이계득, 이경하, 이은칠, 피원용, 조병세, 조병태와 태극단원 강금로가 좌익 및 부역 활동 사실로 인해 ‘비상조치령’ 위반으로 실형 선고를 받았다.

고양경찰서 의용경찰대 조직 과정에서도 중면 치안대원 중 강신원 등 4명을 부역혐의로 체포, 조사한 후 강신원을 의용경찰대에 근무케 했다.

이 밖에 강흥환, 김영조, 김정식, 허숙, 김금룡, 박종철 등 대다수 의용경찰대원이 인민군 점령하에서 민주청년동맹원이나 자위대원 등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 전 우익단체 활동을 한 터라 인민군 점령기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부역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우익에서 좌익으로, 또 좌익에서 우익으로 변신을 거듭한 것이다.

다른 마을의 치안대원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악명 높았던 구산리 치안대원 피영권, 문상덕, 덕이리 정수연, 성석리 이각 등도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을 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고자 더욱 광분하여 희생자 연행, 호송, 총살 보조 등 ‘더러운 일’에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이나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 사상검사 오제도는 이들을 ‘박쥐같은 주민’이라며 가장 싫어했다는데, 이들의 행위가 아무리 ‘더러운 짓’이라 하더라도, 국민들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이, 국민들이 버림받은 상태에서 몇 번이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게 한 데 대한 책임이 있는 정부 당국자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정부는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이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정치의 연장인 전쟁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이렇게 땅바닥에 떨어진다.


태극단


태극단은 대한청년단, 호국군, 전국학생연맹 등의 우익단체원에다 경찰과 잔류 국군까지 가담하고 있던 인민군 점령기의 우익 비밀결사였는데, 이들이 스스로 정한 임무 중 하나가 인민군 점령기의 부역자 명단 작성이었다.

점조직 상태로 활동하던 태극단원들은 고양경찰서 복귀 이전부터 치안활동에 적극 가담하여, 고양경찰서 직할지서를 태극단 본부로 쓰면서 일산리 치안대원들과 함께 부역혐의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록인 ‘태극단투쟁사’에 따르면, 유엔군의 수복 직후 미 해병대 임시장교 석호진 중위(미 해병대에 배속된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관)로부터 일산지역의 치안권을 위임받아 고양경찰서 복귀 전까지 치안을 담당했다고 한다.

태극단원들은 금정굴 학살 과정에서 주민 감시와 연행, 호송 역할만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복기와 금정굴 사건 초기에 태극단에서 직접 즉결처분을 행했다는 증언도 여럿 나와 있다.

형사사건기록에서도 이장복 단장 등 태극단원 20여 명이 학살(10/10, 10/13 등)에 직접 가담한 것이 확인된다.

이를 종합해보면, 태극단이 금정굴 사건을 지휘하거나 주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금정굴 사건 등 학살에 깊숙이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태극단장은 이장복이었고, 사건기록에 나오는 태극단원으로는 강금로, 김영배, 이장성 등의 이름이 보인다.

또한 태극단 행주지단장 황인수는 국군 수복 당시 100여 명을 생포하여 치안대 본부로 옮겼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한편, 부역혐의로 죽거나 피신하거나 쫓겨난 이들의 재산 처리, 사실상의 재산 약탈은 고양군 시국대책위원회에서 주로 맡아 했다.

당시의 법률로도 행방불명자의 재산은 연고자를 찾아 인도해주도록 돼 있었다.

당시 고양군 시국대책위원장은 이경하였고, 시국대책위원 이병학 등은 학살에 직접 가담하기도 했다.


지휘명령 관계


민간인의 불법 집단살해를 집행한 고양경찰서 경찰은 물론, 경찰을 도운 의용경찰대원, 치안대원, 태극단원 모두 고양경찰서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사건의 직접 책임자는 당시 고양경찰서장 이무영 경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양경찰서장은 한경록 경기도 경찰국장, 선우종원 내무부 치안국 정보수사과장, 김태선 내무부 치안국장, 조병옥 내무부장관, 그리고 경인지구 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또한 정부는 계엄사령부(계엄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의 지휘하에 군과 검찰, 경찰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를 꾸려 부역행위자 처리를 전담케 하고 있었다.

김창룡 합동수사본부장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 통로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민간인 집단살해를 막을 의지가 없었음은 당시의 여러 명령과 지시, ‘비상조치령’과 부역행위특별처리법에 대한 태도 등에서 거듭 확인된다.

9월 말부터 약 한달 동안 대규모의 부역혐의자 불법 학살을 사실상 묵인한 뒤, 10월 말부터 재판에 의한 부역자 처리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고양금정굴 사건의 경우에도, 유족들의 탄원에 따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서 나와 조사를 했으나, 민간인 불법 살해는 불문에 부치고 오히려 학살을 보조한 의용경찰대원 일부의 부역 혐의를 조사하여 재판에 회부하고 만다.

사건에 직접 책임이 있는 고양경찰서장과 경찰들은 1950년 12월 1일 제정된 ‘사형(사형) 금지법’에 따라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해졌어야 함에도, 단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는 이승만 정부가 불법적인 부역혐의자 학살을 묵인, 방조하고 오히려 사건을 은폐, 조작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따라서 사건의 책임은 고양경찰서장, 경기도경찰국장과 내무부 치안국장,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을 거쳐, 대통령 이승만과 국가에 최종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계엄하의 한국군을 지휘하고 있던 유엔사령부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