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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금정굴 사건, 그 처음과 끝 - 금정굴 10문 10답


사건이 있은 지 무려 57년 만에야 국가기관의 공식 조사로 진실이 밝혀진 금정굴 사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그렇게 오랜 동안 없는 듯 묻혀 있었을까?

세상 밖으로 드러난 뒤에도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국가에서 진실을 밝힌 뒤에도, 왜 아직까지도 합당한 후속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걸까?

거기에 금정굴 사건의 비밀이 있다.

거기에 금정굴 사건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국가 형성 과정에 숨겨져 있는 안타깝고도 끔찍한 비밀이다.

그 비밀을 10문 10답으로 풀어보자.





물음 1. 어떤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끌려가 죽었나?


금정굴에 끌려가 죽은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인민군 점령기에 마을 단위의 인민위원회나 사회단체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다.

군이나 면 등 상급 단위에서 일한 사람들은 이미 피신한 뒤였고, 이전의 동네 이장이나 청년회장이 그 연장선상에서 동네 인민위원장이나 청년위원장을 맡는 등, 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둘째는 부역혐의자의 가족이나 친인척이다.

피신하거나 붙들려간 부역혐의자의 가족과 친인척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했다.

한 사람의 부역자로 인해 온 가족이 거의 몰살당한 경우도 있었다.

명백한 연좌제로서, 씨를 말려야 후환이 없다는 의식, 재산 약탈 목적 등이 작용했다.

셋째는 개인감정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평소에 개인감정을 품고 있던 사람들을 무고하여 잡아다 죽였다.

이전에 좌익 활동을 하거나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 활동을 한 적이 있는 사람들 중 수복 후에 의용경찰대원이나 치안대원으로 변신하여 일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전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붙잡아다 죽인 경우도 있었다.

고양지역에서 사람들이 부역혐의로 끌려가기 시작한 것은 수복 직후부터다.

9월 20일 수복된 능곡·행주 지역에서는 그 직후부터 마을 치안대 등에 의해 부역혐의자들이 연행되어 마을 창고 등에 갇혔다.

9월 28일 고양지역 전체가 수복된 직후에는 고양군 전역에서 사람들이 경찰서와 각 지서, 마을 창고에 끌려오기 시작했다.

각 지서나 마을 창고에 갇힌 사람들 중 일부는 경찰의 묵인하에 마을 치안대원들이 한강변이나 계곡으로 끌고 가 직접 죽이고, 일부는 고양경찰서로 이송했다.

고양경찰서로 끌려온 사람들은 경찰서 유치장과 창고에 눕지도 못할 정도로 빽빽이 갇힌 채 사흘에서 일주일 정도 고문을 당하며 조사를 받은 뒤, 주로 연줄이 있는 일부는 석방되고 나머지는 금정굴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총살은 경찰 책임하에 5-6명 1개 조로 굴 밖에 묶어세운 뒤 총을 쏘아 굴속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죽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물음 2. 잡아간 사람들은 누구이고 죽인 사람들은 누구인가?


희생자들을 잡아간 사람들은 주로 마을 치안대원들이었고, 초기에는 태극단원도 많았으며, 경찰서장 복귀 후 일산 지역에 우익단체원 중심으로 의용경찰대가 구성된 뒤에는 의용경찰대원들도 전면에 나섰다.

총살은 경찰 책임하에 이루어졌다.

고양경찰서장이 직접 진두지휘한 경우도 있었다.

경찰 복귀 이전에는 태극단이 즉결처분을 행했다는 기록과 증언도 있다.

총살 집행과정에서 의용경찰대원, 치안대원, 태극단원들은 주로 경비, 호송, 보초, 총살 보조 역할을 수행했다.

경찰은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에게 부역한 일이 있는 전 우익단체원을 다수 의용경찰대원으로 끌어들여 ‘더러운 일’을 많이 맡겼고, 부역 전력이 있는 의용경찰대원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고자 더욱 광분하며 희생자 연행, 호송, 총살 집행에 앞장섰다.

부역혐의로 죽거나 피신하거나 쫓겨난 이들의 재산 처리(사실상의 재산 약탈)는 고양군 시국대책위원회에서 주로 맡아 했다.

가해자에 대해서는 뒤에서 조금 더 상세히 알아보자.


물음 3. 금정굴 사건은 어떤 배경 하에서 일어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한반도는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독립 준비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한반도에는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3년 동안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군정을 실시하게 된다.

1948년 초 미군정, 그리고 미군정이 밀던 이승만 세력이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남한 각지에서 단선단정 반대투쟁이 일어난다.

단선단정이 얼마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가는 당시 5.10 선거에 참여한 정당과 사회단체의 비율이 10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참고로, 당시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을 지지하는 비율이 80퍼센트에 육박했다.

이에는 당시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에 성공한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친일파들이 재산과 공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친일파 청산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도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남한만의 단선단정을 밀어붙였고, 그것은 곧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다.

미군정과 1948년 8월 15일 들어선 이승만 정부는 국민들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제주도와 지리산 일대의 산간 지역에서는 6.25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미 ‘작은 전쟁’이 시작되었고, 도시에서도 파업과 폭력이 잇따르고 좌우대립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부는 국민들의 저항을 누르고자 1948년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1949년에는 친일파 청산기구인 반민특위를 공격하고, 좌익 활동 전력이 있는 이들을 밝은 길로 인도한다는 명분하에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 각종 우익 청년단체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하여 준군사조직으로 만들었다.

준전시 병영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북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좌우대립을 더욱 격화시켰다.

이승만 정부와 미국은 전쟁을 최소한 남한 지역에라도 확고한 반공국가를 세워 자본주의의 교두보를 구축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속성상 사람들을 ‘아’와 ‘피아’의 두 진영으로 갈라놓는 전쟁은 ‘우리’가 아닌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섬멸’하려는 충동을 갖는다.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인물들은 법을 무시한 채 조직적으로 제거했고, 승리라는 목표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걸림돌들은 무자비하게 치워 없앴다.

한 술 더 떠서, 체제에 순응할 것 같지 않거나 이질적인 존재들 중 일부를 제거하고, 남은 이들에겐 재갈을 물렸다.

요컨대,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이질적인 존재의 일부를 걸러내고 남은 국민들을 체제에 순치시켜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9.28수복 직후에 일어난 금정굴 사건도 인민군 점령 하에서 피난을 가지 않거나 가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소극적이나마 인민군에게 부역을 하며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정부가 색안경을 쓰고 부역 혐의를 씌우면서 일어난 불행한 사건이었다.

더욱 슬픈 사실은 적극적인 부역자들은 이미 피신한 뒤로서, 고향을 떠날 이유도 없었던 순박한 민초들이 최소한의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무참하게 끌려가 죽어갔다는 것이다.





물음 4. 부역혐의 사건이란?


6.25전쟁기에 민간인이 불법으로 집단살해된 사건은 학살은 크게 6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전쟁 상황과 전선의 이동을 감안하여 이를 시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전쟁 이전 학살 : 6.25전쟁 이전 제주도와 여수·순천 지역, 지리산 중심의 ‘작은 전쟁’이 일어났던 지역에서 주로 군경 토벌대에 의해서 민간인들이 집단살해당한 사건

• 군경에 의한 예비검속자 및 형무소 재소자 학살 : 전쟁 발발 직후 국민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예비검속자, 형무소 재소자들이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집단처형당한 사건

• 미군 폭격에 의한 학살 : 유엔군(95% 이상이 미군) 참전 후 미군의 공중 폭격 등으로 피난민 등이 집단살해된 사건

• 점령기 인민군 등에 의한 학살 : 인민군 점령 직후와 후퇴 직전에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우익인사들이 학살당한 사건

• 부역혐의 학살 : 주로 9.28수복 직후와 1.4후퇴기에 군경과 우익 치안대에 의해 인민군 점령지에 남아 있던 민간인들이 불법으로 집단살해된 사건

• 토벌작전 중 군경에 의한 학살 : 전선이 북상한 후 제2전선이 형성된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일대 등지에서 군경 토벌대에 의해 민간인이 집단살해당한 사건


이중 금정굴 사건은 부역혐의 학살에 해당하는데, 6가지 유형 중에서도 전국에 걸쳐 가장 폭넓게 진행되었고 희생자 수도 가장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경찰의 책임이긴 해도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경우가 많아, 수십 년이 흐르는 사이에 금정굴 사건처럼 없었던 일로 덮어진 경우가 많고, 그 후유증도 가장 크다.

부역혐의 사건은 ‘전쟁기 민간인학살의 바다’라 할 만큼 부산-대구 일대의 미점령 지역을 빼고는 전국 방방곡곡 모든 곳에서 일어났다.

부역혐의 학살의 규모는 자수자와 검거자를 포함해 총 부역혐의자 수가 총 55만 915명으로 집계됐다는 ‘한국경찰사(1973)’의 기록을 통해 간접 확인할 수 있는데(이중 일부는 사형, 일부는 징역, 일부는 훈방), 여기에는 마을 안에서나 이송 과정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빠져 있을 테니 그 수가 실로 어마어마했을 거라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의 행방은 제대로 기록, 정리돼 있지 않다.

부역혐의 학살에서 가장 슬픈 지점이자 그 본질을 알 수 있게 하는 에피소드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관료들이 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 이미 서울을 다 빠져나간 상태에서 국군이 북진중이며 서울을 기필코 사수할 것이니 서울 시민을 비롯한 국민들은 집에서 안전하게 대기해달라는 거짓 방송을 하고는 6월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여 국민들의 피난길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전용기를 타고 경남 진해까지 날아갔다가 대구로 올라왔으나, 너무 멀리 왔다는 진언에 따라 다시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와 대전을 임시 수도로 정했다.

그러고서는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이른바 ‘도강파-잔류파’ 논쟁을 벌인다.

서울 수복 후, 소수의 ‘도강파’는 다수의 ‘잔류파’에게 부역혐의를 씌우고 압박했다.

이에 잔류파는 전황을 거짓 선전하고 한강 다리를 끊어 피난길을 막은 채 자기네만 빠져나간 정부가 오히려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서울에 입성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했으나, ‘도강파는 애국자, 잔류파는 부역자’라는 마타도어가 득세하면서 대대적인 부역자 처벌 및 약탈이 자행된다.

정부의 이런 태도가 전국에 걸쳐 부역자에 대한 엄중 처벌과 대대적인 불법학살을 조장하고 부추겼던 것이다.

부역자 심사는 수복 후 전국적으로 진행됐으나 실제 좌익세력과 부역자들은 대부분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 또는 도피한 뒤였기에 부역자 처벌 명목으로 벌어진 약탈, 살해 등 불법행위의 피해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적극 부역과는 관련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부역행위를 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부역 사실을 아는 사람을 오히려 부역행위자로 몰아 제거하려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렇다 보니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다수 서민들만 부역자 처단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피해자 중에 부녀자들이 적지 않았던 점, 연좌제의 가장 극악한 형태인 일가몰살, 대살(代殺)이 빈번하게 자행된 점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요컨대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대통령과 정부가 그들의 말을 믿고 인민군 점령지에 남아 있던 국민을 적대시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 부역혐의자 학살의 배경이자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물음 5 : 왜 법도 안 지키며 사람들을 죽였을까?


부역혐의 사건은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혐의를 씌워 다수의 민간인을 불법으로 집단살해한 사건이다.

전투중이라 하더라도 민간인은 보호해야 하고, 비록 적군이라 해도 전투능력을 상실한 경우나 포로가 된 경우에는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교전 수칙이다.

이런 규칙을 어기고 민간인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 이는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작전수행중이 아닌 경우에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전투중이 아닌 상황에서, 민간인을 즉결처형하거나 불법 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하는 죄’에 해당한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범죄를 저질렀다는 뜻이다.

9.28수복 후 한 달 동안 고양군 일대는 치안을 회복한 상태로서 전투 상황이 아니었고, 금정굴 희생자들은 전투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설사 인민군 점령기에 크고 작은 부역을 한 정황이 있다 하더라도 조사하여 재판에 부치고, 재판 결과에 따라 처벌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금정굴 희생자들은 정식 재판에 부쳤을 경우 대부분 훈방될 정도의 미미한 부역을 한 사람들이거나, 아예 재판에 넘기지도 않고 훈방할 사람들이었다.

적극 부역자들은 모두 피신한 뒤였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경찰서장이나 경찰의 즉결처분은 정당했다고 주장하나, 후일 위헌 판정을 받은 당시의 법령들, 즉 <국가보안법(1948. 12. 1. 공포)>,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1950. 6. 25. 공포)>, <비상시 향토방위령(1950. 7. 22. 공포)>, <계엄하 군사재판에 관한 특별조치령(1950. 7. 26. 공포)> 등 어떤 법령에 따르더라도 전투중이 아닌 상황에서 민간에 대한 즉결처분을 허용한 조항은 없다.

비록 단심일지언정(후일 위헌 판정을 받음), 민간인의 처벌은 반드시 재판을 거치도록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고양경찰서장과 경찰들, 그리고 그들을 도운 의용경찰대원, 치안대원, 태극단원들은 법을 어겨가며 다수의 민간인을 끌고 가 무참하게 학살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불법인지를 몰랐을까?

적어도 경찰들과 일부 지도급 인사는 자신들의 행위가 불법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희생자들을 금정굴로 끌고 갔고, 희생자와 주변에는 다른 곳으로 이송한다고 말했으며, 나중에 행방을 묻는 가족들에게도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참사 이후 금정굴 사건은 입에 담지도 못하게 했다.

정당한 법집행이었으면 그렇게 쉬쉬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왜 이들은 불법을 저지르며 사람들을 잡아다 죽였을까?

인민군에게 죽은 사람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나중에라도 적에게 협력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

불순분자들의 씨를 말려 대한민국의 순수 혈통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죄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죽여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모두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생명을 지킬 책임이 있는 국가, 사건의 궁극적 책임이 있는 국가의 태도다.

명백한 민간인 불법 집단살해인 금정굴 사건을 비롯한 부역협의 사건들에 대한 당시 정부의 태도는 몹시 실망스러웠다.

1950년 10월 말 ‘왜 니들 맘대로 사람들을 잡아다 죽이느냐’며 들이닥쳐 고양경찰서와 의용경찰대원들의 불법 행위를 조사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의용경찰대원 일부의 과거 좌익 및 부역 전력을 문제삼아 이들을 처벌했을 뿐, 고양경찰서장을 비롯한 경찰, 이를 도운 민간 치원대원들의 민간인 집단살해에 대해서는 불법 행위가 광범하게 저질러졌음을 조사, 확인하고도 결국 불문에 부쳤다.

금정굴 민간인 불법 집단살해 혐의로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금정굴 사건은 없던 일이 되었다.

무분별한 부역혐의자 처벌을 막기 위해 제정된 ‘부역행위자특별처리법’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보면, 당시 정부의 태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개시 이후 인민군 점령지의 일부가 수복됨과 동시에, 수복지구에서 적에게 협력했던 민간인들에 대한 불법 학살이 광범하게 벌어지기 시작하자, 국회는 무분별한 부역자 처벌을 막기 위해 1950년 9월 29일 제49차 본회의에서 ‘부역행위특별처리법’을 통과시켰다.

법의 취지는 “6 ·25사변을 계기로 북한괴뢰정권에 협력함으로써 대한민국에 반역적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함에 있어 그 처리에 신중을 기하여 반역행위가 경미한 자는 포섭하는 동시에 억울한 처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재의를 요청하고 재가결되는 등의 진통을 겪는 사이에 전국 각지에서 이미 수많은 불법학살이 자행되었다.

결국 12월 1일 법이 공포되었으나 부역자 처벌에 신중을 기하자는 법의 취지를 정부가 애초부터 반기지 않았으니, 잘 시행될 리 만무했다.

거기에다 한 달 후 1․4후퇴로 전황이 다시 급변하면서 무분별한 집단살해 행위를 막기 위한 법률은 제대로 시행되지도 못한 채 1952년 3월 19일 폐지되고 만다.

정부의 태도가 이러했으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통곡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던 것이다.





물음 6. 희생자 유족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학살 이후 유족들의 반백 년 삶은 실로 형언하기 힘들다.

생명 위협과 재산 약탈, 애비 없는 설움에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 지독한 가난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거미줄처럼 따라다니던 연좌제의 꼬리표는 그나마 힘겨운 삶을 더욱 옥죄었다.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질시를 피해 고향을 등졌고, 그나마 외국에라도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고국을 등졌다.

왜 죽었는지 이유라도 알자, 유골이라도 찾아 제사라도 떳떳이 지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은 번번이 압살, 배반당했고, 많은 유족들은 억울하게 죽은 부모형제와 자신의 삶까지도 부정하면서 자신을 거짓 포장하며 살 길을 꾀했다.

살기 위해 군에 입대하여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 길도 택했고, 가해자 집단과 어울리며 신분 세탁을 꾀하기도 했다.

대물림을 하지 않으려 자식들에게 사실을 함구하니 가해자 집안과 피해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끔찍한 악몽을 다시 꾸지 않으려면 그 사실 자체를 잊어야 했다.

도리질치고 떨어내어 덮고 잊어야만 살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학살 이후 유족들의 삶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물음 7. 누구의 책임인가?


사건의 직접 책임자는 당시 고양경찰서장 이무영 경감이었다.

고양경찰서 경찰은 물론, 경찰을 도운 의용경찰대원, 치안대원, 태극단원 모두 고양경찰서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한편, 고양경찰서장은 경기도 경찰국장, 내무부 치안국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또한 정부는 계엄사령부의 지휘하에 군, 검찰, 경찰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본부장 김창룡)를 꾸려 부역행위자 처리를 전담케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합동수사본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 조직처럼 활동했으며,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해온 합동수사본부를 계속 옹호했다.

김창룡 합동수사본부장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통로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민간인 집단살해를 막을 의지가 없었음은 당시의 여러 명령과 지시, ‘비상조치령’과 부역행위특별처리법에 대한 태도 등에서 거듭 확인된다.

따라서 사건의 책임은 경기도경찰국장과 내무부 치안국장,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을 거쳐, 대통령 이승만과 국가에 최종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 계엄하의 한국군을 지휘하고 있던 유엔사령부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물음 8. 사건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묻혀 있었고, 세상 밖으로 드러난 뒤에도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국가에서 진실을 밝힌 뒤에도 왜 합당한 후속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걸까?


사건의 책임이 국가에 있었는데, 전쟁 이후 50년 가까이 국가를 지배한 것은 수구냉전 이념에 사로잡힌 극우반공 세력이었다.

대립과 전쟁의 논리에 사로잡힌 그들의 의식 속에 인권과 평화는 설 자리가 없었고, 심지어는 ‘평화통일’주장까지도 불온시하는 맹신적 반공주의가 판을 쳤다.

극우반공 체제하의 국가에서 전쟁기 민간인학살, 특히 군경과 미군, 우익에 의한 민간인 집단살해는 없던 일이 되었다.

4.19 직후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양민학살 진상규명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지만, 5·16쿠데타로 철퇴를 맞았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군사정권은 부모형제자매의 신원 운동까지도 불순하게 여겼다.

진상규명에 앞장선 유족들이 붙들려가 징역을 살고, 유해를 거두어 모신 묘와 위령비는 파헤쳐졌다.

전쟁기 민간인 집단살해는 다시 한 번 땅속으로 묻혔다.

전쟁기 학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까지는 다시 20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의 바람이 일면서 제주4.3사건과 거창사건 등에 다시 빛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산청 사건, 고양금정굴 사건, 문경 사건, 함평 사건, 여순 사건 등이 잇따라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까지는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2000년을 전후하여 유족들이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한 거창 사건, 제주4.3 사건, 영동 노근리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개별법들이 제정되어 조사가 시작되었으나, 유사한 다른 사건들은 여전히 찬밥 신세였다.

이에 전국의 유족들과 사회단체들이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통합특별법 제정에 나섰고, 2005년 5월 마침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었다.

이윽고 그 법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가 만들어져 금정굴 사건 등에 대한 진상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7년 5월부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결정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사건이 있은 지 60년이 다 돼서야 국가 차원에서 국가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는 결정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4년여가 흘렀으나, 국가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희생자 및 유족들의 피해 및 명예회복, 희생자 위령사업, 기록 및 교육사업, 재발방지 대책 강구 등의 후속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준다.

국가의 잘못으로 저질러진 범죄, 즉 국가범죄의 피해는 그만큼 가혹하고 그 시정은 그만큼 어려우며,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와 유족들의 피해는 그만큼 가중된다.

국가가 진정한 국민의 정부가 되어 국민의 삶을 보살핀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국가가 후속조치의 이행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유족들은 자구책으로 대규모의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최근에 와서 사법부는 거듭 유족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행정부에 이어 사법부에서도 국가의 명백한 책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대립과 전쟁의 국가가 인권과 평화의 국가로 거듭나야만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기약할 수 있다.





물음 9. 금정굴을 비롯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종전 후 한국은 자유와 민주, 평등, 평화 같은 적극적 이념이 아니라 단지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반공이 ‘국시’로 간주되는 맹목적인 반공 국가가 되었다.

반백 년 이어진 극우반공 체제하에서 전쟁기에 학살당한 이들은 대부분 ‘빨갱이’가 되었고 그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 되었으며, 학살 사실을 입에 담는 사람들은 ‘불순분자’가 되었다.

그야말로 ‘멸균실’ 수준의 순수한 극우반공 체제하에서는 중립도 상식도 통할 수 없었고, 민주니 인권이니 평화니 통일이니 하는 것들에도 색안경이 씌워졌다.

대학살의 그늘은 실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짙었다.

책임자의 다수가 우리 정부와 사회의 권력자들이니, 그 정황이 어땠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개처럼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유족들은 억울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오히려 사실 자체를 숨겨야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다.

유족이건 아니건, 사실을 본 그대로 이야기하고 밝히다가는 다시 ‘빨갱이’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갈 판이었다.

우리 사회의 인권과 생명 경시 풍조, 폭력 불감증, 상호 불신, 가진 자나 힘센 자에게 굴종하는 비굴함, 극도의 보신주의와 가족주의, 민주주의 냉소,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진보에 대한 회의, 극우반공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그 폐해들, 극성을 부리는 국가폭력과 권위주의와 패권주의 등등이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전쟁 전후의 대학살은 일제 40년 지배보다도 더 무서운 여파를 남겼다.

사람이 개처럼 떼거리로 죽어가는 판에 사람이 조금 두들겨 맞는 것이 무슨 큰 문제겠는가?

고문 좀 당하는 것, 억울하게 잡혀가는 것, 차별 좀 받는 것, 불이익 좀 당하는 것 등등이 무슨 대수겠는가?

사람들이 떼로 죽어가는 걸 보고도 입도 뻥긋 못했는데, ‘대수롭지 않은’ 부정과 불의에 대해 어찌 목소리를 높이겠는가?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거고, 죽는 놈, 맞는 놈만 서러운 거지.

재수 없이 그런 꼴 안 보고 살려면, 권력에 붙어서 안전막을 쳐놓든지, 그게 싫으면 여기저기 끼어들지 말고 내 가족이나 챙기며 조용히 살아야지.

그런 사고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지면서, 우리는 인권 후진국, 민주주의 후진국이 되었다.

전쟁 후 반백 년 동안, 희생자 가족은 물론 그 이웃들에게도 ‘입조심, 몸조심’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제일의 가훈이었다.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교과서 한 구석에나 힘없이 박혀 있는 빈말일 뿐이었다.

요컨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극우반공 체제, 인간의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여기는 생명경시와 인권유린 풍조, 웬만한 폭력은 폭력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국가폭력의 사회, 이것이 우리가 전쟁과 학살을 통해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극우반공 체제하에서 인권유린과 국가폭력은 그 뒤로도 계속 되풀이되었다.

4.19와 5.18의 무자비한 진압에서, 수많은 의문사와 고문치사, 각종 의혹사건, 민중 생존권의 폭력적인 진압 등등에서 국가폭력은 계속 기승을 부렸다.

그것은 국가가 다수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던 전쟁 중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국가의 거듭나기 시도가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니,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전쟁기의 민간인학살은 이렇듯 우리 사회를 불구로 만들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야만과 폭력, 반인권·반인륜 범죄가 일제의 폭압과 그보다 한 술 더 뜬 전쟁기 학살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물음 10. 고양지역에서 민간인이 불법으로 집단살해된 곳은 금정굴뿐일까?


전쟁기에 민간인이 집단으로 불법 살해된 곳은 금정굴만이 아니다.

어찌 보면 금정굴 사건의 희생자들은 그나마 고양경찰서를 거쳐 고양경찰서장의 책임하에 살해된, 조금은 걸러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변이나 마을 안 골짜기 곳곳에서 훨씬 더 처참하고 더 비정하며 더 무분별한 학살이 숱하게 자행되었다.

송포면 구산리부터 이산포 너머까지의 한강변에서는 최소 6곳에서 최소 2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마을 치안대에 끌려와 죽임을 당했다.

심지어는 갓난아기를 포함하여 일가몰살된 집안도 여럿 있었다.

성석리 귀일안골에서도 최소 20여 명이 끌려가 죽었고, 현천·화전리에서도 최소 20여 명이 희생당했다.

덕이리 새벽구덩이에서도 금정굴 희생자의 어린 아들들을 포함하여 여러 명이 끌려와 죽었다.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도 많은데, 신도면 일대에서 100여 명, 행주리에서 최소 63명, 수색리에서 10여 명, 고양리에서 35명, 원당면 성사리에서 수십 명, 용두리에서 5명 이상이 죽었다는 증언들이 있다.

한편, 인민군이나 좌익세력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된 경우도 있는데, 송포면 덕이리에서 수십 명의 태극단원이 희생당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선유리에서도 오금리 치안대원 13명 등 18명이 정체가 불분명한 집단에 의해 희생당한 사건이 있다.

다시 말해서, 금정굴 사건은 고양지역 민간인 집단살해의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마을마다 크고 작은 학살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사실상 없다시피 한 것이다.

진실을 온전히 밝혀 후세에 교훈을 남겨야만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