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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창졸간에 부모형제자매를 잃고 살아남은 유족들의 삶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생명 위협과 재산 약탈, 애비 없는 설움에 이웃의 손가락질, 지독한 가난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거미줄처럼 따라다니던 연좌제의 꼬리표는 그나마 힘겨운 삶을 더욱 옥죄었다.

불법을 저지른 이들이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떵떵거리며 사는 세상에서, 도매금으로 ‘빨갱이 가족’으로 몰린 희생자 유족들은 모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자신을 재포장하기도 했다.

군대나 우익단체에 들어가 신분을 ‘세척’하고, 권력의 실세가 된 가해자 집단과 어울려 그들과 교분을 쌓기도 했다.

자신을 핍박하는 고향을 등지고 아는 이 아무도 없는 곳에 새롭게 정착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도 많았다.

유족들은 자신의 2세들에게까지 할아버지 세대의 죽음의 진상을 함구하면서, 오히려 ‘입조심, 몸조심’을 가훈으로 물려주었다.

일일이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그 단면이라도 조금 들여다보자.


연좌제라는 천형


우선 유족들의 삶을 이중삼중으로 더욱 옥죈 연좌제부터 살펴보자.

연좌제는 당사자들이 의식하건 못하건 거의 모든 유족들에게 공통의 덫이었다.

연좌제란 본디 모반 등의 중죄를 범한 자의 친족들에게까지 그 죄를 묻는 전근대적 제도로서 근대법에서는 자취를 감춘 것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전쟁 직후에 기세 좋게 되살아나 많은 사람들의 앞길을 막았다.

공공연히 시행된 연좌제의 적용 대상자는 전쟁 전후의 사상범, 처형자, 부역자, 월북자들의 친족으로서, 연좌제에 걸린 사람들은 공직에 진출하거나 해외에 나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심한 제약을 받았다.

연좌제의 시작은 사건 직후 신분증 발급 제한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 10-11월, ‘사상불순분자’를 제외한 만 14세 이상 남녀에게 시민증과 도민증을 발행했다.

시민증·도민증을 발급받지 못한 좌익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은 통행을 제한받으며 생존권을 위협당하고 신분상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심지어는 집을 떠나지 못해 친인척의 장례식에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

부역자 명부는 1950년 11월 초에 이미 작성되었는데, 1953년부터 이를 ‘처형자 명부’와 ‘부역자 명부’로 체계화한 뒤 각 기관에 배포하여 신원조사 등에 활용하게 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알았는지, 이 명부는 존재 자체를 비밀에 부쳤고 열람은 철저히 통제했다.

소속기관의 장과 극소수의 인원만 이 명부를 열람할 수 있었다.

이른바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진’ 사람들로서, 그 유족들에게는 연좌제의 굴레가 씌워졌다.

또한 내무부 치안국에서는 이와 별도로 ‘좌익 부역행위로 인한 처형자의 가족’과 ‘3촌 이내의 친족’을 시찰대상자로 지정하여 조사, 보고하라는 지시도 내린 바 있다.

1980년 부역자 및 처형자 명부가 ‘신원기록 편람’으로 재정비되면서 비로소 연좌제는 공식 폐기되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도 부분적으로 활용된다.

연좌제는 30여 년 동안 희생자 유족들의 삶을 위협했다.

직업 선택, 취업, 출국 등을 제한당하면서 유족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

대다수의 유족들은 아예 공직은 몰론 버젓한 직장에조차 지원할 꿈도 꾸지 못했고, 지원한 경우에도 신원조회에 걸려 탈락했으며, 해외에도 나갈 수 없었고, 사업 허가에서도 제약을 받았다.

연좌제가 유족들의 마지막 생존 수단인 사회적 지원과 보호조차도 박탈했던 것이다.

연좌제로 인한 금정굴 유족들의 피해를 몇 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김상길 : 군 정보기관에서 매달 집으로 찾아와 조사를 하고 가니 고향에서 살 수가 없어 대전에서 10년을 피해 살았고, 큰아들이 3군사관학교 시험에 합격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불합격되었다.

이종민 : 공무원 서기관에 오르니 나와 동생의 전력이 확인되면서 정기적으로 사찰을 받았고, 더 이상의 승진을 할 수 없었다.

마임순 : 남편은 공무원도 할 수 없었고 측량기사 자격증으로 외국에 나가려 했으나 출국을 할 수 없었으며, 큰시누이 아들도 육사에 진학하려다 포기했다.

심재희 : 작은아이가 원자력학과 졸업 후 고리원자력발전소로 가게 돼 있었으나, 아버지 때문에 탈락했다.


병들고 멸시당하고 가정은 파탄나고


연좌제의 피해 사례는 수없이 많은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학살 자체의 피해와 마찬가지로 연좌제의 피해 역시 당사자의 앞길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당사자와 가족 전체의 응어리가 되어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덧내면서 가정을 파탄지경으로 몰고 간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학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병으로 지독하게 고생을 하거나 결국 죽음을 맞은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유족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그때를 생각하면 말문이 막히고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져온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서병규 전 금정굴유족회장의 경우 학살의 충격으로 귀가 어두워졌으며, 고통을 견디지 못해 알코올 중독자가 된 이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실성하여 죽은 이들, 속앓이를 하다가 홧병으로 돌아간 이들도 부지기수다.

유족들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 중 하나는 ‘빨갱이 자식’ 또는 ‘(애비 없는) 호로 자식’이라는 호칭이었다.

불문곡직 부모형제를 잡아다 죽이고는 오히려 ‘빨갱이 가족’이라는 천형을 뒤집어씌우고 손가락질하며 멸시했으니, 이보다 더 통탄할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유족들은 이런 멸시와 비난 속에서 그것을 천형으로 받아들이고 죽어지내거나, 그게 싫거나 견딜 수 없으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가정파탄의 사례도 각양각색인데, 그중 가장 극악한 경우는 가해자가 남편을 죽이고 그 부인을 첩이나 후처로 삼아 함께 산 경우다.

여자는 남편의 원수를 지아비로 대하며 살고, 아들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마을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런 가운데서 생기는 문제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금정굴 유족 중에도 그런 사례가 있다.


여자와 아이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약자인 여자들의 피해는 남자들보다도 더욱 심각했다.

남편 잃고 손가락질받으며 삯바느질이나 식모살이로, 또 여자의 몸으로 남정네들의 근육을 필요로 하는 일 모두 감당해가며 혼자서 아이들을 키워온 의지의 한국 여성들, 창졸간에 부모를 모두 잃고 느닷없이 ‘가장’이 되어 동생들 보살펴가며 그 험난한 세월을 견뎌온 우리의 맏딸들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데, 그런 소설 같은 일이 너무도 많아 소설의 소재도 되지 못한다.

그뿐인가?

금정굴 유족 최모 씨의 경우에는 알고 보니 빨갱이 집안이라고 결혼 석달 만에 소박을 맞고 쫓겨난 뒤 평생을 외롭게 살았다.

새댁 때 남편이 죽자 시댁의 권유로 복중의 태아를 떼거나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개가한 경우 일생이 편안했을까?

남편이 살해당한 뒤 젖먹이 아이를 떼어놓고 개가한 경우는 또 어땠을까?

금정굴 유족 중에도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파탄 난 가정의 아이들이 겪은 고통 또한 그보다 덜하지 않았다.

가부장제가 완강한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지붕도 바람막이도 없는 한데에 내동댕이쳐진 꼴이었다.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돼버린 아이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개가한 뒤 남겨진 아이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졸지에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친척집을 전전하고 집도 절도 없이 살아가면서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온갖 궂은 일 다해가며 모진 목숨 이어가던 중에 ‘아버지,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하는 절규를 토해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성석리 박성례 씨네처럼 남은 아이들마저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그나마도 이산가족이 돼버린 사례도 적지 않은데, 그러는 중에 영양실조로 죽고 병에 걸려 죽는 일이 어디 이야깃거리나 될까?

친척집의 양자로 들어간 경우는 그래도 행복한 편인데, 그들 중에는 최근까지도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석연치 않은 느낌을 갖고 산 사람들이 많았다.

아버지를 잃고 남겨진 아이들에게 홀로 된 어머니를 바라보며 그에 의지하는 것 또한 편할 리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을 속으로 삭인 채 어머니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혹은 어머니에게 가망 없는 반항을 하며 살아가야 했던 아이들의 삶이 어떠했을지는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집도, 땅도, 가재도구도 다 빼앗기고


유족들은 가산마저도 거의 박탈당한 채 알거지 신세가 된 경우가 많았다.

고양지역의 경우 희생자의 자산은 고양군 시국대책위원회(위원장 이경하)에서 몰수하여 관리했으나(유족이나 친족이 있는 경우 이는 위법 행위였다), 치안대원과 경찰들이 사적으로 나누어 가진 경우도 적지 않다.

당시의 법령으로도 희생자의 재산은 유족들이나 친족들의 소유가 돼야 했다.

그럼에도 전국적으로 부역자 재산의 무단 약탈이 횡행하자, 정부는 ‘권력을 빙자하여... 합법적 절차 없이... 국가재산이나 개인재산을 불법점유 또는 파괴’하는 자는 극형에 처한다는 계엄포고령까지 내렸으나, 밑바닥에서는 그런 명령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역산 한도 내에서 부역자 가족의 생활을 보장’하라는 조치까지 취했으나, 빼앗은 가재도구 일부를 돌려주었을 뿐 집과 땅은 돌려주지 않았다.

고양지역에서도 경찰과 치안대가 부역혐의 희생자의 재산을 빼앗은 사례는 수없이 많다.

일가몰살 또는 월북자가 많았던 구산리에서는 치안대원들이 그 재산을 차지하여 나눠 갖고서는 적당히 관리하다 팔아먹고 내빼버렸다.

성석리의 박씨 집안, 덕이리의 김씨 집안과 안씨 집안과 박씨 집안, 백석리의 고씨 집안, 행주리의 이씨 집안, 수색리의 김씨 집안, 일산리의 이씨 집안 등등, 집과 땅과 가재도구를 모두 빼앗기고 알거지 신세가 되어 쫓겨난 유족들도 많다.

1980년대 이후 몇몇 유족이 재산을 되찾고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사법부는 ‘20년 이상 점유’ 어쩌고 하며 유족들의 재산권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집과 토지가 대부분 이미 제3자에게 팔려 넘어간 상황이라서 권리를 주장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

희생자와 유족들에게는 대한민국의 법률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재산권마저도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고문, 생명 위협, 성폭행, 부역자 재판


불법으로 사람들을 잡아다 죽인 이들에게 유족들의 존재는 눈엣가시였다.

경찰과 치안대원들은 부역혐의자만이 아니라 유족들에게도 고문과 폭력을 자행했다.

현천리 희생자 황뇌성 씨의 가족들은 그들을 죽이려는 치안대원들에게 끌려가다 마을 사람들의 만류로 겨우 목숨을 구했다.

사리현리의 서영자 씨 집안도 비슷한 일을 겪었고, 구산리 희생자의 아들 이병희 씨도 주민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피신한 가족을 찾아내라며 고문을 당한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

성적 모욕과 유린 또한 일상적으로 저질러졌다.

부역혐의를 받고 있던 당사자는 물론, 희생자의 처나 딸, 누이들은 성적 모욕과 폭력에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또한 9.28수복 초기의 연행자와 수복 후 한 달 동안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연행된 사람들 중에는 합동수사본부를 거쳐 정식 재판에 회부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재판이지 재판의 꺼풀을 쓴 ‘사법살인’에 가까웠다.

‘빨갱이는 씨를 말려야 한다’는 사회적, 정치적 압력 하에서 부역혐의자들은 단심으로 운영되던 군법회의에 회부되어(후일 위헌 판결을 받는다) 줄을 서서 재판을 받은 뒤 가혹한 형벌에 처해졌다.

사형이 아닌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에 행방불명된 이도 적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이송 중에 임의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역혐의자 즉결처분(임의처형)과 재판에 의한 합법적 처리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였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법적 절차를 따랐다는 재판조차도 기본적 인권을 지키기에는 턱없이 미약한 장치였던 것이다.


가난, 원망, 출향, 자기 부정


대다수 유족들에게 지독한 가난은 평생을 따라 다니는 동반자였다.

많은 유족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는 하늘의 별이었고, 수십 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많은 유족들은 가난까지 대물림할 수는 없다며 이 악물고 억척같이 살아 웬만하면 자식들 대학교육은 다 시키는 ‘의지의 한국인상’을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모두 ‘인간승리’요 ‘감동 드라마’다.

물론 모든 유족들이 돌아가신 부모나 남편을 원망만 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올곧은 삶을 살다가 비명횡사한 부모나 남편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색깔은 비록 다를지언정 이들이 품은 한 또한 얼마나 깊었을까!

학살 이후 유족들의 삶을 이야기하자면 실로 끝이 없다.

고향을 등진 사람들, 특히 고국을 등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자신의 존립기반을 부정하고 재포장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깊은 한은 가슴속에 켜켜이 묻어두고 아무 일 없는 듯 묵묵히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짓들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유족들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들에 대해 우리 국가와 사회는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더불어 사는 인간세상의 가치는 이런 처참한 현실을 앞에 두고 어떻게 그 길을 찾아갈 수 있을까?

시간은 무서운 것이어서 그 끔찍한 기억도 조금은 빛이 바래고,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유족들의 의지와 더불어 기억은 서서히 단절돼갔다.

유족들의 자기 부정과 피학살자의 존재 부정이 학살 사실 자체의 부정으로 이어지면서 사건은 수면 밑으로 잠복했다.


민주화가 다시 유족들을 일으켜세우다


그러나 ‘왜 죽었는지 그 이유라도 알자’는 유족들의 소박한 소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사실, 번번이 압살되긴 했지만 피해자와 유족들의 진실을 알 권리는 국제 인권법에서도 명확히 규정하고 있는 천부적 권리로서, 알 권리의 침해 역시 심각한 인권침해로 간주된다.

피해자를 두 번, 세 번 죽이는 행위였던 진실의 은폐와 왜곡, 그리고 진상규명요구 압살도 천부적 권리를 완전히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1960년 4.9 직후의 학살진상규명운동이 5.16쿠데타로 철퇴를 맞은 이후 한동안 묻혀 있던 민간인학살 문제가 침묵을 깨고 다시 제기되는 것은 1987년 6월 항쟁이후 민주주의 공간이 서서히 열리면서부터다.

제주 4.3과 거창을 중심으로 다시 뚜껑이 조금씩 열리고, 다른 곳에서도 잇따라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예전의 유족이 아니었다.

‘건국’의 제물이 된 피학살자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기보다는 국가의 보살핌과 시혜를 촉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게 보통이었다.

그조차도 유족들 단독으로는 요구도 못하고 사회단체들의 지원을 받으면서야 모기 소리만한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러다가 1996년에 거창 특별법, 2000년에 4.3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노근리 사건이 크게 언론을 타면서 유족들은 다시 힘을 얻었다.

전국적으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요구가 빗발치고, 민간 차원에서나마 학살진상조사 작업이 시작되고, 학살진상규명을 목표로 하는 전국연대기구도 만들어졌다.

금정굴 유족들은 비록 수는 많지 않지만, 전국 차원의 통합특별법 제정과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에도 앞장섰다.

5년간에 걸친 이들의 줄기찬 노력은 정치권의 외면과 사회 일각의 반대로 거듭 좌절을 겪다가 마침내 2005년 5월 통합 과거사법으로 결실을 보았다.

그리고 2005년 12월 진실화해위가 발족하여 진실규명 작업에 착수했고, 2007년 6월 마침내 금정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진실규명은 아직 미흡하고 피해 및 명예회복 등의 후속조치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가운데, 2011년 12월에는 1심 법원에서 금정굴 유족들에 대한 국가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행정부와 사법부 모두 국가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새로운 시작...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간의 피해의식을 벗고 주권자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유족들은 아직 소수다.

대다수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평생 자신을 짓눌러온 피해의식이나 좌절감, 자포자기, 냉소, 방관의 틀에 갇혀 있다.

그리고 이는 단지 유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끔찍한 학살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고 진실 은폐를 사실상 용인해온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영향은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 곳곳에 배어 있다.

금정굴 사건을 비롯한 전쟁기 민간인학살 문제의 완전한 해결에서 한국사회의 새로운 출발점이 만들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