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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컴컴한 금정굴에 볕이 들기까지


1950

1950년 10월 금정굴 사건이 있은 직후, 당시 부역자 처리 책임을 맡고 있던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유족들의 청원과 호소가 잇따르자, 10월 말 고양경찰서에 수사반을 파견했다.

부역자 처리를 주 임무로 하고 있던 수사반은 관계 경찰과 의용경찰대원, 치안대원, 태극단원을 연행하여 조사한 뒤, 집단살해 및 경찰의 책임은 불문에 부치고, 의용경찰대원 중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 행위를 한 자들만을 선별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총 7명이 기소되어 그중 두 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당시 고양경찰서장 이무영이 다른 이유로 직위 해제되면서, 금정굴 사건은 덮어지고 없던 일이 되었다.

이후 금정굴 사건은 금기가 되었다.

금정굴 사건을 입에 올리는 것은 그 자체로서 불순한 행위였다.

유족들은 자신의 부모형제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심지어는 자식들한테까지 혹시 피해가 갈까 봐, 부모형제의 죽음을 알리지도 못했다.

마을 사람들도 침묵을 강요당했다.

금정굴 사건을 발설하는 순간 사상을 의심받는 세월이 사람들을 한없이 주눅들게 했다.

핍박받던 유족들 중 상당수는 고향을 등지고 떠났고, 남은 이들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금정굴 사건은 귀신 이야기가 간간이 나오는 전설로 변해갔다.

사람들도 사라지고, 사건도 잊혀졌다.

사람들도,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라졌던 존재가 다시 고개를 삐죽 내밀기까지는 무려 4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전쟁 때의 갓난아이가 40대 장년이 되고, 20대 청상과부가 60대 할머니가 돼서야 사라졌던 진실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0

전쟁 당시 많은 희생자가 난 송포 덕이2리(할미 마을)에 살던 열혈장년 김양원이 향토사를 발굴하며 마을 지를 만들던 중 ‘새벽구덩이’사건을 접한다.

금정굴 사건이 진행되던 당시, 할미 마을 안에 있던 한 굴(새벽구덩이)에서 비슷한 이유로 10여 명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경찰의 지휘감독을 받던 마을 치안대원들이 경찰서도 거치지 않고 사람들을 임의로 잡아다 죽여서는 굴속에 처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김양원 씨는 3년간의 수소문 끝에 새벽구덩이 사건보다 훨씬 큰 금정굴 사건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1993

1993년 김양원 씨가 고양시민회장이 된 후, 고양시민회에서는 백기완 선생 등의 격려 하에 사건의 진상규명에 적극 나서기로 하고 지역의 다른 4개 단체와 함께 고양금정굴 사건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여 공식 활동에 착수한다.

그와 함께 확인된 몇몇 유족이 모여 고양금정굴유족회를 결성한다.

1993년 9월 금정굴진상규명위와 유족회는 금정굴 현장에서 첫번째 위령제를 올리며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금정굴 희생자 위령제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치러지면서 금정굴 문제를 알리는 동시에 고양지역의 평화운동을 상징하는 중심축으로 자리잡아간다.

사건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관계기관의 반응은 냉담했다.

경찰서와 경찰청, 고양시, 경기도, 내무부, 총리실, 국회 모두 자기 소관이 아니라며 책임 떠넘기기에 바빴다.

지역에서도 사건의 실체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거기서 유골이 하나라도 나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거나 ‘악질 빨갱이’ 수십 명이 즉결처분당한 것뿐이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내뱉으며 물타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95

1995년 9월, 유족들은 3회 위령제를 마친 후 금정굴 현장 발굴에 나섰다.

15미터쯤 파내려가자 뒤얽힌 유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유족들의 오열과 통곡 속에 며칠 만에 온 산이 유해와 유품들로 뒤덮였다.

금정굴의 참상이 MBC 뉴스와 <피디수첩> 등을 통해 상세히 보도되며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책임 있는 관계기관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유족들은 길거리 변사자라 해도 인도적 차원에서 가두어주는 법인데, 이렇게 수많은 유해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는데도 모두 다 외면하면 우린 누굴 믿고 사느냐, 우린 대한민국 국민 아니냐고 울부짖으며 하소연했건만, 돌아온 건 냉담과 외면, 무관심뿐이었다.

49일 동안 당번을 정해 밤샘하며 지키던 수천 점의 유해와 유품들은 고양경찰서와 국회 앞에서 마지막 울분을 토해내고는 서울의대 창고로 실려갔다.

딱한 사정을 들은 서울의대 법의학과 이윤성 교수가 고맙게도 ‘잠시’ 보관하며 희생자의 수 등 1차 감정을 해주겠노라고 제의해온 것이다.

감정 결과, 희생자의 수는 최소 153명 이상, 여자가 약 10%, 10대의 뼈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잠시’가 지나기까지는 무려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야 했다.


1999

유족들은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과 위령사업 시행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관계기관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외면 속에 유족들과 고양지역 시민단체들은 금정굴 사건에 대한 자체 조사에 나섰다.

금정굴 사건진상규명위원회를 범국민추진위원회로 확대개편하고 진상조사 작업에 나서서 ‘금정굴 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내는 한편, 경기도의회에 사건 진상조사 청원을 제출했다.

경기도의회에서 마침내 1999년 1월 ‘고양시 일산금정굴 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1년간의 조사 끝에, 금정굴 사건을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하에 경찰의 주도로 다수의 민간인을 불법 살해하여 암매장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중앙정부에는 책임 있는 진상조사를, 지방자치단체에는 위령사업의 시행을 건의한다.

그러나 중앙정부와 국회는 답이 없고, 고양시에서는 2000년 3월 단 한 차례의 간담회를 가진 뒤 이견이 있어 위령사업을 시행할 수 없다고 경기도에 통보한다.





2000

고양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보다 조직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2000년 9월 ‘고양금정굴 사건 공동대책위’를 꾸리고 금정굴 현장 보존, 위령제의 시민행사화, 독자적인 조사 활동, 전국 연대사업 등 조직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삭막하던 금정굴 현장에도 장승, 신목, 솟대, 표목, 표지판 등을 민간 모금으로 세워가며 평화공원의 바탕을 다져간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처지에 있던 전국 각 지역의 유족회와 사회단체, 연구자들이 모여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를 결성하고 전국 단위의 조사 작업과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전국통합특별법 제정 운동에 착수한다.

금정굴유족회와 금정굴공대위도 전국 단위의 운동에 적극 합류한다.

국회에서 거창사건과 제주4·3사건, 노근리 사건만 각각 개별 특별법을 만들어 진상조사에 착수하자, 전국 각 지역의 다른 유족회와 관련 사회단체들은 2001년 11월 마침내 전국통합특별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농성투쟁에 돌입했다.

유족들의 농성은 2005년 5월 ‘진실·화해를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될 때까지 장소를 옮겨가며 계속된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시민단체 출신 시의원들이 고양시의회에 대거 진출한 것을 계기로 고양시 차원에서 금정굴 유해안치 등 일차적인 위령사업이라도 시행하고자 시의원 31명 중 22명의 공동발의로 ‘금정굴 위령사업 촉구결의안’을 제출했으나, 무려 12명의 시의원이 보훈·안보단체의 압력에 굴복하면서 결의안이 부결되었다.

2003년 3월에는 금정굴공대위 주최로 제1회 고양파주지역 민간인학살 심포지엄을 열어 민간 차원의 금정굴 조사결과를 정리하고 해결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를 가졌다.


2005

4년여의 농성투쟁 끝에 2005년 5월 국회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통과되었다.

한국전쟁기의 민간인학살과 권위주의 시대의 의문사건들, 일제하 독립운동 등을 두루 조사하여 진실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세칭 ‘과거사법’이었다.

법률에 따라 그해 12월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되어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금정굴 사건은 진실화해위의 우선조사 사건으로 선정되었다.

2005년 7월에는 고양시에서 충북대 박선주 교수팀에 의뢰하여 금정굴 현장 발굴 마무리 조사를 한 뒤, 더 이상의 유해는 없는 것으로 잠정 결론지었다.

금정굴 문제에 고양시 예산이 처음 쓰인 사례였다.





2007

2007년 6월 진실화해위는 1년여의 조사 끝에 마침내 금정굴 사건을 고양경찰서장 책임하의 민간인 불법 집단살해로 규명했고, 이어서 11월에는 한강변 등 고양지역 5개 사건(‘고양부역협의사건’)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사건이 있은 지 57년 만에 금정굴 사건이 국가의 책임하에 저질러진 불법 행위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국가 차원의 진실규명이 이루어졌으니 이제 위령사업과 희생자 명예회복 등은 시간문제일 줄 알았다.

그러나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진실규명 후속조치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심지어는 매년 봉행하는 위령제 비용도 지원하지 않아, 진실규명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와 2007년 위령제까지도 민간 모금으로 치러내야만 했다.

국가는 1년도 더 지난 2008년 10월 제58주기(제16회) 위령제에서야 경찰청장 명의의 추도문을 보내 고양금정굴 사건과 고양부역혐의사건에 대해 유감과 애도의 뜻을 밝혔다.

국가의 진정한 사과로 보기도 힘든 모호한 의사표명이었다.

2009년에는 그해 위령제 비용을 국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원했다.

국가는 그 밖의 진실규명 후속조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눈을 감고 있다.

고양시 차원에서는 2008년부터 위령제 등의 경비를 사회단체보조금 형식으로 지원하고 있다.

2009년부터는 그동안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전시회와 영화상영회 등을 한데 모아 높빛평화예술제를 올리고 있다.


2010

2010년 6월 고양지역 야5당과 시민사회단체의 지원하에 금정굴 유해안치와 고양평화공원 조성을 공약한 시장후보가 당선되면서 금정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2011년 9월에는 61주기 위령제를 맞아 16년 만에 금정굴 유해를 서울의대 창고에서 고양시로 모셔와 청아공원에 임시 안치했다.

그와 함께 유품 손질 예산을 확보하여 유품 보존처리 작업도 하고 있고, 고양시 평화공원·평화교육관 설립 타당성조사도 실시했다.

서울대 정근식 교수팀의 타당성조사에서는 고양시 주도의 1단계 소규모 핵심시설 설치, 정부 지원하의 발전단계 추가시설 설치의 2단계 방안을 제시하면서 평화공원과 부대시설을 고양시의 종합적인 평화산업 마스터플랜의 일환으로 발전시켜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유해안치와 평화공원 조성을 위한 토지 매입과 평화공원·평화교육관 실시설계 예산이 세워지지 못하면서 금정굴 위령사업과 평화공원 조성사업은 난관에 부닥치고 있다.

한편, 2011년 12월 15일 금정굴 희생자 유족 92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피해배상 소송 1심 공판에서 재판부는 국가의 중대한 불법 행위에 대한 위자료로 희생자 1억 원, 배우자 5천만 원, 부모 또는 자녀 2천만 원, 형제자매 1천만 원씩을 지불하라는 국가 ‘배상’ 판결을 내렸다.

공소시효 논란이 있는 61년 전의 사건에 대해서도 국가의 책임은 피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2012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무엇보다도 유해안치, 희생자와 유족들의 피해 및 명예회복 등의 진실규명 후속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금정굴 사건 등에 대한 보완 조사, 고양시의 다른 사건들에 대한 추가 조사는 계획조차도 없다.

금정굴이라는 뼈아픈 역사 유산을 평화운동이나 평화산업, 평화문화예술 활동의 자산으로 삼아 승화시키려는 노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금정굴 현장을 보존하고 평화공원을 조성하는 사업, 책임자의 사죄와 유족의 용서를 전제로 하는 화해 사업, 각종 기록물 정비사업, 반인권적인 각종 법령 재정비 사업, 평화인권교육 사업 등도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2012년, 뼈아픈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인권과 평화를 우리 사회의 중심 가치로 삼아 더불어 사는 공동체 세상을 열어가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과제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