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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스러져간 사람들


이제 금정굴의 낙화로 스러져간 희생자들을 돌아볼 시간이다.

우선 확인된 이름부터 새겨보고, 그 사유를 들어보자.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유를 들어보면 정식 재판에 부쳤을 경우 사형은커녕 훈방될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먼저 2007년 6월 진실화해위에서 금정굴 사건 희생자로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연번

희생자

거주지

성별

나이

직업

1

최의현

중면 마두리 215

37

농업

2

고산돌

중면 백석리 507

52

농업

3

유해진

중면 백석리 507

32

농업

4

한복영

중면 백석리 507

32

농업

5

허정임

중면 백석리 507

22

가사

6

정한희

중면 일산리 96

52

농업

7

정대철

중면 일산리 96

20

농업

8

정영학

중면 일산리 101

21

농업

9

김석권

중면 일산리 585

24

상업

10

이봉린

중면 일산리 602

46

농업

11

박순조

중면 일산리 610(추정)

25

양복점

12

박순환

중면 일산리 610(추정)

23

13

한창석

중면 일산리 613

40

대서소

14

서상용

중면 일산리 650

46

교장

15

서병철

중면 일산리 650

24

교사

16

서병욱

중면 일산리 650

19

학생

17

이규봉

중면 일산리 655

51

농업

18

이정례

중면 일산리 655

17

가사

19

윤영규

중면 일산리 655-317

25

20

안희준

중면 일산리

26

농업

21

이기철

중면 일산리

42

농업

22

김광제

중면 일산리 968

24

23

박근식

중면 장항리

40

농업

24

박인식

중면 장항리

19

농업

25

권학길

중면 장항리 438

23

농업

26

최종석

중면 장항리 483

30

농업

27

박희문

중면 주엽리 815

27

농업

28

김용남

송포면 가좌리 103

39

농업

29

김영선

송포면 구산리 405

57

농업

30

전옥자

송포면 구산리 405

17

31

이돌섭

송포면 대화리 849

19

32

김천흥

송포면 덕이리 405

45

농업

33

김영환

송포면 덕이리 419

27

철도근무

34

김재환

송포면 덕이리 419

29

농업

35

유희철

송포면 덕이리 420

30

철도근무

36

안점봉

송포면 덕이리 430

59

철도근무

37

안형노

송포면 덕이리 430

35

장사

38

안상노

송포면 덕이리 430

21

39

안용노

송포면 덕이리 430

20

농업

40

이용우

송포면 덕이리 735

26

농업

41

최재옥

송포면 덕이리 937

24

교사

42

최연

송포면 덕이리 1006

27

교사

43

최담

송포면 덕이리 1006

22

44

박만협

송포면 덕이리 1093

28

농업

45

조병호

송포면 덕이리 1193

39

농업

46

김진섭

송포면 덕이리 1193

30대

농업

47

김명산

송포면 덕이리 1198

30대

농업

48

방용섭

송포면 덕이리 1198

20대

농업

49

김만성

송포면 덕이리

30대

농업

50

김진홍

송포면 덕이리 1199

24

농업

51

심기만

송포면 법곳리 71

23

농업

52

심우현

송포면 법곳리 71

26

농업

53

심준섭

송포면 법곳리 71

26

농업

54

유필준

송포면 법곳리 97

35

농업

55

노인성

송포면 법곳리 381

24

농업

56

심재천

송포면 법곳리 448

25

농업

57

노춘석

송포면 법곳리 449

39

농업

58

홍기원

벽제면 성석리 892

20

회사원

59

김상국

벽제면 내유리 650

21

농업

60

김호연

벽제면 내유리 657

23

농업

61

서정희

벽제면 사리현리 390

35

농업

62

김대봉

벽제면 사리현리

20대

농업

63

이봉훈

벽제면 사리현리

40

농업

64

이태우

지도면 강매리 188

40

농업

65

이병희

지도면 신평리 19

27

악기점

66

이금현

지도면 행주외리 261

46

가사

67

장기연

원당면 도내리

27

농업

68

장석용

원당면 도내리

29

농업

69

장기철

원당면 도내리

25

농업

70

박중원

원당면 주교리 323

40

71

박상하

원당면 주교리

18

72

김순동

은평면 수색리 125

38

73

정씨

은평면 구산리

53

74

안종건

은평면 구산리

19

75

안복례

은평면 구산리

17

76

채기동

교하면 야당리 22

36

농업

<표> 진실화해위에서 금정굴 사건 희생자로 신원을 확인한 명단


이 밖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금정굴 희생자로 추정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1. 설문현, 남, 30대, 중면 마두리

2. 김영석 부, 남, 중면 일산리

3. 이창선, 남, 30대, 중면 장항리

4. 최영실, 남, 20대, 송포면 덕이리

5. 최원영, 남, 송포면 덕이리

6. 최대철, 남, 벽제면 사리현리

7. 원종선 외삼촌 이씨, 20대, 벽제면 사리현리

8. 김화진, 남, 20대, 벽제면 사리현리

9. 심언섭, 남, 30대, 지도면 강매리


다음으로, 2007년 11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고양부역혐의사건(고양금정굴 외 5개 사건)의 희생자로 신원을 확인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1. 이범인, 남, 46, 송포면 구산리, 한강변(희생지)

2. 피원기, 남, 38, 송포면 구산리, 한강변

3. 피원순, 남, 27, 송포면 구산리, 한강변

4. 김영연, 여, 62, 송포면 구산리, 심학산

5. 피경애, 여, 14, 송포면 구산리, 심학산

6. 피순성, 남, 28, 송포면 구산리, 한강변

7. 양용한, 남, 송포면 구산리, 한강변

8. 안종덕, 남, 16, 송포면 덕이리, 새벽구덩이

9. 안종옥, 남, 12, 송포면 덕이리, 새벽구덩이

10. 박상진, 남, 41, 벽제면 성석리, 뒷골

11. 현아순, 여, 39, 벽제면 성석리, 뒷골

12. 박성인, 남, 17, 벽제면 성석리, 뒷골

13. 김현세, 남, 35, 벽제면 성석리, 뒷골

14. 차제순, 여, 38, 벽제면 성석리, 뒷골

15. 김태규, 남, 13, 벽제면 성석리, 뒷골

16. 김봉규, 남, 6, 벽제면 성석리, 뒷골

17. 이해용, 여, 23, 벽제면 성석리, 뒷골

18. 김용배, 남, 벽제면 성석리, 뒷골

19. 김현남, 남, 벽제면 성석리, 뒷골

20. 안일례, 여, 벽제면 성석리, 뒷골

21. 황을성, 남, 37, 신도면 현천리, 현천공동묘지

22. 황뇌성, 남, 42, 신도면 현천리, 다락고개

23. 황재덕, 남, 신도면 화전리, 화전리치안대 사무실

24. 황온순, 남, 신도면 화전리, 현천공동묘지

25. 정범성, 남, 30, 신도면 현천리, 현천공동묘지

26. 지희덕, 남, 30, 신도면 화전리, 화전뒷산


이 밖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금정굴 외 고양부역혐의사건 희생자로 추정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1. 임복성, 남, 33, 송포면 구산리, 한강변(희생지)

2. 한경임, 여, 31, 송포면 구산리, 한강변

3. 임경학, 남, 6, 송포면 구산리, 한강변

4. 임복남, 남, 23, 송포면 구산리, 한강변

5. 임복만, 남, 18, 송포면 구산리, 한강변

6. 홍제관 일가, 송포면 구산리, 한강변

7. 강은성 일가, 송포면 구산리, 한강변

8. 어수갑, 남, 김포군 하성면 석탄리, 금정굴

9. o 시원, 남, 벽제면 성석리, 뒷골

10. 신명복, 벽제면 성석리, 뒷골

11. 김순범, 신도면 화전리

12. 허찬, 남, 41, 신도면 화전리, 화전리

13. 서병숙, 남, 21, 중면 일산리, 대구형무소(재소자인명부)

14. 원정기, 남, 27, 신도면 삼송리


그리고 2007년 금정굴 사건 진실규명 이후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형사사건기록이 발견되었다.

금정굴 사건이 끝나가던 즈음인 1950년 10월 말부터 11월 사이에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서 유족들의 신고 접수를 받아 사건을 조사하여 남긴 국가 기록물이다.

형사사건기록과 그 밖의 증거 등으로 추가 확인된 희생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1. 이종봉, 남, 중면 마두리, 금정굴(희생지)

2. 강선봉, 남, 중면 백석리, 금정굴

3. 허진임, 여, 중면 백석리, 금정굴

4. 김규순,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5. 김암권,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6. 김영한,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7. 김윤권,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8. 안석모,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9. 안용택,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10. 윤영만 모, 여, 중면 일산리, 금정굴

11. 오일섭,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12. 이영창,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13. 이경학,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14. 이계상,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15. 이병호,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16. 이종한 모, 여, 중면 일산리, 금정굴

17. 이한상,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18. 이홍철,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19. 이홍철 처, 여, 중면 일산리, 금정굴

20. 임용태,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21. 임종태,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22. 장성의,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23. 최용복,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24. 홍규원, 남, 중면 일산리, 금정굴

25. 임상준, 남, 중면 장항리, 금정굴

26. 한일성, 남, 중면 장항리, 주엽 하천

27. 한요수, 남, 중면 장항리, 주엽 하천

28. o o o, 남, 중면 주엽리, 주엽 하천

29. 최단, 남, 송포면 덕이리, 금정굴

30. 황용문, 남, 은평면 수색리

31. 박동수, 금정굴

32. 심상신, 금정굴

33. 이영희, 금정굴


이상으로, 금정굴 및 고양지역에서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명단을 살펴보았다.

물론 사건이 알려지면서 지금까지도 증언이 계속 나오고 새로운 유족들도 속속 나타나고 있지만, 확실성을 기하기 위해 위 명단에는 넣지 않았다.

신원이 어느 정도 확인된 희생자 수는 총 158명(일가몰살을 포함하지 않은 수)인데, 그중 40명 남짓을 제외한 110여 명이 금정굴에서 희생된 분들이다.

금정굴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진실화해위의 금정굴 사건 진실규명 이후 신빙성 있는 기록이 나왔는데, 앞서 이야기한 형사사건기록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금정굴 희생자를 약 200명으로 증언하고 있다.

한강변 희생자에 대해서는 최소 200명에서 400명까지 증언이 엇갈리며, 그 밖에 10여 곳에서 많게는 100여 명까지 희생당했다는 증언이 나와 있다.

종합하면, 고양지역의 희생자 총수는 최소 1천 명으로 추산된다.

물론 이는 실제로나, 지휘 계통상으로나 모두 고양경찰서장 책임하에 불법적으로 집단살해된 민간인 희생자들만의 숫자다.

전투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죽은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확인된 희생자 명단에서도 보듯이, 희생된 이들 중 여자가 10%를 넘고, 10대 또는 그 이하의 수도 10%가 넘는다.

구산리 한강변 사례 외 확인되지 않은 일가몰살 희생자를 더하면 그 비중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이는 당시의 집단살해가 어떤 성격을 띠고 있었는지 잘 말해주는 증거다.


무슨 이유로 끌려와 죽임을 당했나?


이들의 ‘불법 즉결처형’에 적용된 ‘죄목’은 당시의 조사 자료가 없어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힘들다.

다만 관계자 및 유족들의 증언, 그리고 사건 직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 작성한 형사사건기록을 통해 그 얼개는 알 수 있다.

첫째는 인민군 점령기에 마을 단위의 인민위원회나 사회단체에서 일하며 인민군을 도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당시 군이나 면 등 상급 단위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아 인민군에게 부역한 사람들은 인민군 퇴각과 함께 이미 피신한 뒤였다.

남은 사람들은 리나 마을 단위의 인민위원회, 농촌위원회, 여성동맹위원회, 민주청년동맹위원회, 교육위원회 등 향정관련 기관에서 일한 사람들로서, 수복 후에 자신이 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전쟁 전부터 마을 이장이나 구장, 단체 간부를 맡고 있다가 인민군 치하에서 그 직책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금정굴 희생자의 경우, 약 1/3 정도가 ‘부역’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런 경미한 직책을 맡아 일을 보다가 참변을 당했다.

둘째는 부역혐의자의 가족이나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다.

경찰이나 우익단체가 인민군 치하에서 피해를 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부역혐의자 가족들까지 끌고 와 살해한 것이다.

심지어는 한 사람의 부역자로 인해 온 가족이 거의 몰살당한 경우도 있었다.

씨를 말려야 후환이 없다는 의식, 재산 약탈 목적 등도 작용했다.

‘사촌이 일 좀 봤다는 이유로’ 그 일가친척을 잡아다 처벌한 데 대해서는 살벌하던 그 당시에도 가혹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금정굴 희생자의 1/3 이상이 부역혐의자의 가족이나 친인척이었고, 금정굴 외 마을 단위 학살에서는 가족 희생자가 훨씬 더 많았다.

셋째는 평소에 개인감정을 품고 있던 사람들을 무고하여 잡아다 죽인 경우다.

이 경우에는 전쟁 이전의 우익단체원들(보도연맹원 포함)이 인민군 점령기에 다시 인민군에게 부역을 하고 수복 후에는 다시 의용경찰대원이나 우익 치안대원으로 기용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 활동을 한 적이 있는 사람들 중 수복 후에 의용경찰대원이나 치안대원으로 변신하여 일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전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붙잡아다 죽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밖에 다른 지역에서 부역 행위를 하다가 이 지역으로 피신을 와서 붙잡혀 희생된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슬픈 사실은 그 어떤 경우든 법에 따라 정식 재판을 받았을 경우 사형이라는 극형을 언도받을 사람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이념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다가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이 땅의 순박한 민초들이 분단과 전쟁, 이념 대립, 권력 유지의 희생양으로 애꿎은 죽음을 맞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