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이 연달아 대학입시를 치르다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수험생 학부모가 돼버렸습니다. 먹고사는 일, 위를 향해 올라가는 사다리 타기, 내 자리 챙기기에 비교적 초연했던 터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내심 느긋했는데, 아이들이 연달아 입시전쟁에 내몰리며 악전고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여, 틈틈이 입시자료도 뒤적여보고 정책도 눈치껏 살펴보고 각종 뉴스와 정보도 흘낏거려보지만 딱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 과목만 잘해도, 한 가지 능력만 특출해도, 학교 수업만 충실히 들어도 누구나 대학 갈 수 있다는 7차 교육과정 수립시의 호언장담은 어디에서도 실현될 곳을 못 찾겠습니다. 혹시 정책 입안 결정자들이 교육 토양이 척박하고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구조를 가진 시골 한구석의 대학들까지 감안한 거라면, 어차피 자식 덜 낳는 추세가 이어져 대학 총정원이 곧 입시생을 넘어설 판에 그 혜안(?)을 높이 살 일이지만, 그 말을 믿고 시골 대학을 찾아가는 이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정책적 뒷받침 없는 시골에 파묻혔다가 인생 조질 일 사서 할 사람 없기 때문입니다. 왜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다 이른바 SKY, ‘상위권’ 대학, 최소한 ‘인서울(In-Seoul)’에 목을 매겠느냐 말입니다.
정책의 무책임성을 지적하자면 끝이 없지만, 그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른바 대학별 논술고사입니다. 학교 내신성적을 무력화하며 수능 우대 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치는 일부 ‘상위권’ 대학의 성적 우수자 독점책 - 기초실력 다져진 인재를 데려와 거저먹기로 대학을 운영하려는 정책 - 이야 공적인 수학능력시험이라는 발판과 무대를 이용한 기득권 대학의 자율성과 ‘경제’ 논리의 연장으로서 ‘눈물을 머금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논술 시험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습니다.
명색이 여러 측면을 두루 감안하며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도 웬만한 대학의 논술 문제를 접하면 숨이 턱 막힙니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언제 아이들에게 그런 정리 능력, 추론 능력, 주장 능력을 가르친 적 있다고 그렇게 난해한 문제를 내고 그에 입각하여 아이들의 수학능력을 평가하느냐 말입니다. 공공연한 ‘사설 입시교육기관’이 돼버리다시피 한 외고 등 이른바 특목고에 이중 삼중의 특혜를 주는 정책일 뿐이지요. 어차피 그럴 바에야 아이들에게 이중 부담을 주는 수능 시험을 없애고 정규 과정에서부터 논리 능력, 사고 능력을 충분히 기를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개편하는 것이 마땅할 겁니다.
점점 강화돼가는 수능 우대 정책과 왜곡된 대학별 고사 같은 정책 방향은 공교육의 틀을 넘어서는 대학의 횡포이고, 그것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무책임입니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공교육은 ‘친구 사귀는 장’일 뿐이고 진학은 사교육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 돼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는 시장의 역기능을 교정해야 할 교육이 시장 논리에 완전히 굴복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부의 세습화, 부익부 빈익빈의 가속화를 고착화하는 반사회적 정책입니다.
아이들이 수능 보는 날 조금은 한가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교육 정책의 근본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육은 본디 자라나는 아이들의 능력을 그 출신 기반과 상관없이 골고루 키워주고 모든 아이들이 제 깜냥대로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며 당당하게 살 수 있는 토대를 갖춰주는 것입니다. 30여 년 전에 그 지겨운 대학입시 관문을 통과한 바 있는 나는 적어도 내 자식 세대에는 그런 끔찍한 유산을 물려주지 않을 수 있으리라 믿었고, 또 아이들도 내심 아비의 뜻을 이해주기를 바라면서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왔습니다. 일껏 강조한 것은 인생은 스스로 개척해가는 것이라는 선문답뿐이었지요.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입시 정책은 30년 전과 사실상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고, 경쟁과 서열은 오히려 더 강화돼 있었습니다. 그런 토대에서 내 아이들이 뛸 수 있는 기반은 더 좁아져 있었습니다. 적어도 30년 전에는 내가 맘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내 자식들은 숨 막혀합니다. 30년 전에는 수학 하나 포기하고(기본만 하고) 다른 과목만 잘해도 이른바 일류대학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수능시험에서 언어 하나 망치면 갈 곳이 없습니다(나도 문과였고 아이들도 모두 문과입니다). 대학 서열의 장벽은 (이른바 상류층의 해외 유학을 제외하고는) 전보다 더 강화된 것이 곳곳에서 눈에 띕니다. 아이들에게 소신껏 하라는 주문을 하기가 힘듭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정부는 사실상 무대책입니다. 아니, 오히려 아이들을 줄 세우지 못해 혈안이 된 느낌입니다. 부의 대물림을 고착화시키는 계급교육이 갈수록 더 강화돼가는 느낌입니다.
자신의 삶을 잠시 무르고 점수따기에만 매달린 결과로 얻는 시험성적에 따라 인생의 기본 진로가 결정되는 이런 불합리한 구조를 언제까지 바라보고 있어야만 할까요? 대학 수능시험은 말 그대로 자격시험으로만 삼고 교교 성적과 면접만으로 각자 구미에 맞는 학생들을 뽑는 대학입시 제도는 과연 불가능할까요? 대입 서열구조를 무너뜨리고 공공성을 강화한 대학 교육과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갈 수 있는 그런 제도는 실현 불가능한 걸까요?
대학도 초중고교처럼 전학 다니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하고 그 성과를 사회가 그대로 안아주는 세상은 불가능할까요? 아니, 그 이전에 대학 나오지 않아도 제 자리 잡아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 세상은 꿈일까요?
이제 둘째아들놈, 시험시간도 끝나가고 있군요. 시험 치고 들어설 아이의 얼굴 보기가 두려운 한 학부모가 답답한 마음에 몇 자 끼적여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