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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반 전에 쓴 소책자의 글을 9회 분량으로 나누어 싣습니다.

세월은 흘렀어도 바뀐 건 거의 없군요.

차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꽃잎처럼 스러져간 사람들

- 금정굴의 진실을 찾아서



1. 금단의 현장, 금정굴

2. 금정굴 사건은?

3. 컴컴한 금정굴에 볕이 들기까지

4. 금정굴 사건, 그 처음과 끝 - 금정굴 10문 10답

5. 스러져간 사람들

6. 꺾은 사람들

7.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8. 금정굴을 둘러싼 공방, 한 큐에 정리하기

9.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 - 평화도시 고양을 꿈꾸며



1. 금단의 현장, 금정굴


일산에서 파주 봉일천 넘어가는 고갯마루, 중산마을 끝자락에 주유소가 하나 있다.

이름이 고봉산주유소다.

주유소 앞에 서서 큰길 맞은편을 바라보면 나지막한 야산이 하나 보인다.

위에서 보면 산 모양이 누런 용을 닮았다는 황룡산이다.

등 뒤의 조금 높은 산이 고봉산인데, 산마루에는 여전히 북쪽 전파 차단용 철탑이 건재하다.

6차선 대로인 고봉로를 건너면, 어지러운 현수막들 사이로 ‘고봉산누리길’ 안내판이 보이고, 그 뒤편으로 몇 가지 설치물이 눈에 들어온다.

‘통한의 금정굴을 평화의 공원으로’라는 글귀가 새겨진 금정굴 안내 표목, 웃는지 비웃는지 묘한 표정으로 이곳이 금정굴에 오르는 입구임을 알려주는 4개의 작은 장승, 풍상을 겪으며 녹슬어 망가져가는 금정굴 안내판 들이다.

장승 옆의‘금정굴 100미터’라는 표지판이 금정굴이 지척에 있음을 말해준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오르막 산길에 통나무 계단을 만들어두었다.

고양시에서 최근에 누리길을 단장하여 연로하신 분들도 가볍게 산책을 다닐 수 있게 한 것이다.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2, 3분 오르니 눈앞이 조금 트이며 낡은 창고 하나와 현수막 몇 개가 눈에 들어온다.

황룡산의 첫번째 중턱마루다.






마루에 올라보니, 자그마한 개활지에 큼지막한 막사 같은 게 하나 있고, 주변으로 아기자기한 설치물들이 보인다.

‘산 자들이여, 우리를 기억하라’는 문구가 새겨진 금정굴 신목, 입구의 것과 쌍둥이처럼 닮은 네 개의 작은 밤나무 장승, 1994년에 세운 녹슨 철제 안내판, 2010년에 세운 새 안내판 들이다.

2010년 안내판을 보니, ‘금정굴, 진실과 정의의 발걸음’이라는 제목 아래 그간의 경과가 약술돼 있고, 진실화해위원회의 ‘고양금정굴 사건 진실규명결정 요지’도 새겨져 있다.

처음 눈에 들어왔던 낡은 창고로 눈을 돌려보니, 자물쇠가 채워진 문 위로 ‘유족회 사무소’라는 플라스틱 간판이 붙어 있고, 창고 벽에 가득한 1995년 발굴 당시의 빛바랜 유골 사진들이 온몸의 털과 뼈를 곧추서게 한다.

개활지 한복판의 파란 막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까이 가보니, 막사가 아니라 굴속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설치한 간이 천막이다.

철망 문 사이로 수직굴 입구가 보이는데, 굴 입구를 공사용 합판과 파이프로 막아놓아 굴속은 보이지 않는다.

안내판과 주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전쟁 중에 끔직한 일이 있었다는 통한의 금정굴 현장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 산23-1번지

1950년 당시 지명으로는 고양군 중면 일산리 탄현(숯고개) 마을

그곳에 수직굴 하나가 있었다.

일본 강점기 때 금이 나온다는 소문에 업자가 수직으로 굴을 파들어 가다가 다시 수평으로 굴을 파보았으나 그래도 금이 나오지 않자 굴을 그대로 방치한 채로 떠났다는 그곳.

그 금광구덩이에서 전쟁 중인 1950년 우리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 하나가 벌어졌다.

‘금정굴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이제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우리의 아픈 역사다.

그후 꽤 오랜 기간 굴 주변엔 악취가 진동하여 사람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굴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며 그곳은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고,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그곳은 금기의 땅, 금단의 현장이 되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귀신 나오는 곳이라며 얼씬도 못하게 했다.

금정굴은 그렇게 우리에게서 멀어져갔다.


43년이 지난 1993년 9월, 그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조촐한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2년 뒤인 1995년 9월, 수직굴을 파내려가는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엿새째 되는 날, 굴속 15미터쯤에서 사람들의 유해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흘간 굴속에서 파 올린 사람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이내 온 산을 뒤덮었다.

‘한국판 킬링필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