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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절실히 날기를 원할 때 나비가 될 수 있다.
- 트리나 폴러스

노랑 애벌레가 고치를 짓고 있는 애벌레에게 묻는다.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나요?”
“한 마리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절실히 날기를 원할 때 가능한 일이란다.”
“목숨을 버리라는 말씀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
너의 겉모습은 죽어 없어질 테지만 너의 참모습은 여전히 살아 있을 거야.
삶에 변화가 온 거지 목숨을 앗긴 건 아니란다.
나비가 되어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그 애벌레들과는 전혀 다르지.”


어린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그림책의 한 대목이다.
얇은 책자 속에 담긴 그 짧은 이야기는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참으로 넓고도 깊어서,
책장을 덮는 순간 저마다 자신이 깨달을 수 있는 선에서 그 메시지를 수용하고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된다.
상기하는 뜻에서 잠시 이야기를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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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에서 깨어난 줄무늬 애벌레는 나뭇잎을 갉아먹으며 몸을 키워가던 중 불현듯
‘삶에는 단지 먹고 자라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 ‘무언가’를 찾아 나선 애벌레의 눈앞에 하늘 높이 치솟은 기둥 하나가 나타난다.
수많은 애벌레들이 서로를 밀치며 위로 위로 올라가며 만들어내고 있는 기둥이다.
줄무늬 애벌레도 이내 그들 틈에 끼어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으며 위로 위로 올라간다.
꼭대기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맹목적인 자기 합리화만이 있을 뿐.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 걸 보면
틀림없이 그곳은 좋은 곳일 거야.”

그 와중에서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를 만나
맹목적인 자신의 행동에 회의를 느끼고 함께 아래로 내려온다.
둘은 풀밭을 뒹굴고 사랑을 나누면서 행복을 느끼지만 얼마 안 가서 그 생활도 시들해진다.
줄무늬 애벌레의 가슴에 다시 그 이상의 ‘무언가’에 대한 생각이 둥지를 틀기 시작한다.
그는 미처 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을 끝내 떨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기둥 위쪽 어딘가에서 애벌레 세 마리가 쿵 하고 땅에 떨어지더니
‘나비들만이…’ 하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죽는다.
기둥 꼭대기의 비밀이 몹시 궁금해진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의 애틋한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기둥 행을 결행한다.
혼자 남은 노랑 애벌레는 고치를 짓고 있는 애벌레를 만나 고민 끝에 나비가 되는 길을 택한다.
모든 애벌레의 몸속에는 한 마리의 나비가 들어있다는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서.

한편, 에너지도 재충전하고 마음도 단단히 고쳐먹은 줄무늬 애벌레는
맹렬한 속도로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으며 기둥 위로 올라간다.
값싼 동정이나 감상은 이제 금물이다.
줄무늬 애벌레는 마침내 기둥 꼭대기에 이른다.
정상에 이른 애벌레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

그것은 결코 낙원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오로지 제자리를 지키려는 아귀다툼,
떼밀려 추락하지 않으려는 필사의 저항만이 있을 뿐이었다.

순간, 당혹감 속에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하던 줄무늬 애벌레와 동료들의 눈앞에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나타난다.
기둥도 기어오르지 않고 아귀다툼도 벌이지 않고 창공을 훨훨 날아서.

줄무늬 애벌레의 머리에 ‘나비들만이…’하는 말이 떠오른다.
저게 나비란 말인가!
노랑나비는 그에게 무한한 사랑이 깃들인 눈길을 보내며, 뭔가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그 힘에 끌려 마침내 아래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내려가면서 그가 다른 애벌레들에게 말한다.
“내가 꼭대기까지 가봤는데,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그러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공연히 샘이 나서 그러는 거지. 올라가보지도 못하고서.”
“그렇더라도 그런 말 하지 마. 우린 달리 어쩔 도리가 없잖아?”

줄무늬 애벌레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외침이 터져 나온다.
“우린 날 수 있단 말이야!
나비가 될 수 있는 거야!”
애벌레들은 그의 말을 무시한다.
“그 말을 어떻게 믿니?
땅에서 기어오르는 게 우리의 삶이야.
우리 몸을 봐라.
어디에 나비가 들어 있겠니?
최선을 다해서 애벌레의 삶이나 즐기는 거야.”

줄무늬 애벌레는 엄습해오는 짙은 회의 속에서 아픈 가슴을 안고 중얼거린다.
“나는 나비를 보았어. 삶에는 무언가 보다 충만한 게 있는 거야.”
땅에 내려온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나비의 도움을 받으며 나비가 되는 길을 걷는다.
어둠과 두려움과 모든 것을 잃는 상실감을 이겨내고 마침내 새로운 삶으로 태어난다.
다시 애벌레들의 세계,
확산되는 깨달음과 결단과 도전,
무너져내리는 기둥.
마침내 꽃과 나비로 충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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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현실에 묻혀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애벌레 같은 인간들의 삶과 희망과 재탄생, 그리고 혁명을 말하고 있다.

애벌레와 나비.
애벌레의 새로운 모습인 나비는 애벌레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다.
마냥 땅 위를 기어다니거나 서로 짓밟으며 위로만 올라가려는 애벌레와는 달리,
나비는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을 날아다니며 이꽃 저꽃에 사랑의 씨앗을 운반해준다.
나비는 또한, 애벌레들의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사랑,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
나비가 옮긴 사랑의 씨앗이 결실을 맺어 피어나는 꽃들,
그리고 나비들의 참된 사랑이 빚어내는 새 생명들로 하여
세상도 참된 새 세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한 마리의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나비가 될 수 있다는 확신하에
스스로를 죽이고 고치를 만드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애벌레의 겉모습을 죽이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애벌레의 눈에 보이는 세상과 나비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차원이 다르다.
애벌레의 세상은 땅바닥과 나뭇잎과
기껏해야 서로 짓밟고 올라가기에 급급한 애벌레의 기둥뿐이지만,
나비에게는 수많은 애벌레의 기둥이 한눈에 들어오고 푸른 하늘과 넓은 땅이 보이며
나아가 사랑으로 빚어낼 수 있는 새 세상이 보인다.

애벌레의 삶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애벌레가 보는 세상과,
보다 나은 삶, 보다 나은 세계가 있다고 믿는 애벌레가 보는 세상도 전혀 다르다.
평생을 애벌레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애벌레의 눈에는
세상이 아무리 모순과 불합리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철옹성 그 자체로 비칠 뿐이지만,
나비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애벌레의 눈에는 현실의 모순과 불합리가 훤히 드러나 보이고
또 그것이 깨져야 하고 깨질 수 있는 것으로 비친다.
그의 가슴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새 세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등 평화가 넘치는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이
그에게 새로운 눈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전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은 저마다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꽃들에게 희망을>은 우리에게 최대의 선물을 주고 있다.
모든 애벌레의 몸속에는 한 마리의 나비가 자라고 있다고.
그것을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 그것을 실천에 옮기느냐 못 옮기느냐는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