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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미친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큰길로 나간다면 나는 목사라고 해서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달려가는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한테서 핸들을 뺏어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본회퍼 전집> 2권 중 ‘유태인 문제와 교회’
(<옥중서간>(대한기독교서회, 1967) ‘해설’에서 재인용)

히틀러와 나치의 광기가 독일을 지배하고 온 세계에 먹구름을 드리우던 시절, 땅도 하늘도 숨을 죽이고 나치의 이념과 군홧발이 사람들을 질식시켜가던 히틀러 치하의 독일. 한 마디만 뻥긋 잘못해도 그 살벌한 게슈타포의 마수에 걸려 쥐도 새로 무르게 사라지던 당시 독일에서도, 양심의 목소리는 비록 모기 소리만큼 작을지라도 쉴새없이 새어나와 사람이 살아 있음을 알렸다. 여러 방면에서 진행된 히틀러 암살 음모와 순수의 극치를 보여준 독일 대학생들의 백장미 운동 같은 것이 그 예다.

독일의 청년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그는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8형제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 본회퍼는 권위있는 정신병리학자로서 베를린 대학의 교수를 역임했고 학계만이 아니라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신망이 높은 학자였다. 어린 본회퍼는 신앙과 학문과 예술을 중시하는 가풍 속에서 다방면의 소양을 닦으며 자라났다. 청년기의 그는 이미 뛰어난 신학자인 동시에, 아름다운 글과 시를 썼고 음악을 사랑했다.

그가 베를린 대학 신학부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성도의 교제’는 매우 뛰어나서, 유명한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이를 두고 ‘신학상의 기적’이라고 절찬했다. 대학 졸업 후 목사보와 대학상사로 일하던 본회퍼의 앞날은 촉망받는 신학자,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앞날을 마냥 축복해주고만 있지는 않았다. 나치의 먹구름이 조금씩 조끔씩 독일의 하늘을 덮어오면서 그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젊은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그에게 교회는 세상과 동떨어진 성소나 도피처가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싸움으로써만 자신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저서 <그리스도교의 윤리>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교회는 고백한다 - 교회는 죄 없는 이들의 피가 하늘을 향해서 울부짖는 것을 보고 마땅히 외쳐야 했을 때 침묵을 지켰다. 교회는 바른 말을 바른 방법으로 바른 때에 찾아내지 못했다… 교회는 고백한다 - 교회는 가난한 자들이 약탈당하고 착취받으며 강한 자들이 부유해지고 부패해가는 것을 침묵으로 방관했다.”

희대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세계 대공황의 와중에서 군부와 대자본가와 지주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그는 1933년 1월, 교묘한 말로 대중들을 선동하여 마침내 정권장악에 성공했다. 그는 반대자들을 재빨리 제거해가면서 독일 민족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자신의 극우 민족공동체 이념을 확산시키고자 했다.

그러자면 희생양이 필요했다. 첫 번째 희생양은 유태인이었다. 그는 독일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고 유태인은 세상을 더럽히는 위험한 병균이므로 멸종시켜야 한다면서 위험하기 그지없는 극우 민족주의 감정을 부추겼다. 많은 독일인이 히틀러와 나치의 광기에 이끌려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는 데 동참했다. 이어서, 반나치 투쟁의 선봉에 섰던 공산주의자들이 두 번째 표적이 되어 많은 희생자를 냈다.

히틀러의 광기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마녀 사냥이 궤도에 오르자 이번엔 그때까지 자기들은 히틀러의 사정권 밖에 있거니 생각하면서 나치의 만행에 저항하지 않고 있던 온건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에게도 화살이 날아갔다. 이제 독일은 히틀러에 저항하는 정치집단은 하나도 남지 않고 오로지 나치, 즉 국가사회주의 이념만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로 변했다. 노동조합도 전면 금지되었고, 신문 방송도 철저한 검열을 받아 나치의 선전 매체가 되었다. 학교도 나치 이념의 교육장으로 변했다.

교회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정권 장악 후 히틀러는 “기독교는 우리 민족성의 유지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면서 교회의 환심을 샀다. 독일 교회의 대다수는 쌍수를 들어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곧 본색을 드러내어 나치의 지도 원리를 교회에까지 끌고 들어왔다. 교회를 하나의 제국 교회로 통합하여 자신의 휘하에 두고자 한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결국 히틀러의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니고 있던 본회퍼는 위선과 허위와 가장에 가려진 히틀러의 본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의 집권 직후에 있은 강연에서부터 이미 히틀러가 독일 국민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쟁이의 입에서 나오는 진실은 아무리 미화해도 역시 거짓말이요, 인간을 적대하는 자의 형제애는 아무리 좋아 보여도 역시 증오일 뿐이다.”

본회퍼의 눈은 민족애와 정의의 탈을 쓰고서 국민들을 현혹시키는 잔악한 독재자 히틀러의 참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통찰과 뼈를 깎는 고백은 자연스럽게 그를 히틀러에 대항하는 독일 ‘고백교회’의 중추로 서게 했고, 상황이 점점 더 암울해지면서 그는 어느덧 지하 반나치 투쟁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1939년, 히틀러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 온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본회는 암암리에 세계평화의 길을 찾아 백방으로 노력하는 한편, 악의 화신이라고 여긴 히틀러의 암살 음모에 가담한다. 그러나 1943년 4월, 한 사람의 배신으로 그가 가담한 반나치 운동의 일각이 드러나고 본회퍼는 체포, 투옥된다. 그리고 1944년 7월 옥중에서, 자신도 가담했던 히틀러 암살 기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담담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옥문을 나서는 모습을 꿈꾸던 그는 1945년 4월에 전격 처형당하면서 39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히틀러의 패망을 한 달도 남겨놓고 있지 않던 때였다.

목사요 신학자인 그가 반나치 운동에 참여하고 히틀러 암살 음모에까지 가담한 것을 한마디로 설명해주는 것이 위에 인용한 경구다. ‘미친 운전사한테서는 핸들을 뺏어야 한다.’ 즉, 이성이 아닌 광기로 사회를 몰아가는 존재가 있을 때에 그 뒤치다꺼리에 급급하기보다는 아예 근원을 제거해버려야 사람들의 평안과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고, 또 내가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에는 마땅히 그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광기가 지배하는 사회에는 어느 곳이든 광기를 일으키는 근원이 있고 사람들을 그릇된 방향으로 몰고가는 운전사가 있다. 운전사는 마땅히 끌어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근원을 찾아내고 그 움직임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