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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노예의 주인이 되고 싶지도 않다.
이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 -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 링컨의 연설 중에서

노예해방의 기수로 불리는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그는 켄터키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모진 고생을 겪으며 마침내 대통령에까지 이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정규교육이라고는 10달밖에 받지 못했으나, 책 읽기를 좋아하여 계모가 가져온 5권의 책 <성경><이솝우화><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천로역정><아라비안 나이트>를 읽고 또 읽어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조지 워싱턴 전기><스콧 독본>, 키케로와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집, 셰익스피어의 작품집 등에서 영웅들의 행적을 탐독하고 유클리드 기하학도 열심히 읽었다. 이러한 독서를 통해 그의 뛰어난 영어 산문체와 간결하고 논리적이며 유머 넘치는 화술이 형성되었다.

청년기까지의 그의 삶은 그야말로 평범한 서민의 생활이었다. 가게 점원으로 일하다가 나중에 친구와 동업으로 가게를 경영했으나 실패했고, 조그만 시골의 우체국장 일도 했으며, 측량기사로도 일했다. 그러다가 27살 때 독학으로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된다.

어린 시절의 소박한 서민의 삶은 그의 인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게 점원이나 우체국장으로 일할 때에 정확하고 헌신적인 일 처리로 ‘정직한 에이브’라는 별명을 얻었고, 변호사로 일할 때에도 남들보다 수임료를 적게 받으면서도 예리한 논증으로 많은 변론을 승리로 이끌어 신망을 얻었다.

그는 ‘정직하고 순박하고 현명하고 쾌활하며, 때로는 실수도 저지르나 그 실수에서 교훈을 얻으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대로 전진하는 '위대한 아메리카'의 평민상’이었다.

정계에 진출한 뒤에도 그는 자신이 민중의 한 사람임을 자랑했으며, 평범한 사람과 평범한 것들을 사랑했다. 그의 유머 섞인 말이 그런 태도를 잘 설명해준다.

“신도 평범한 민중을 사랑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평범함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놓으시지 않았겠는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와 그 자손들에 대한 링컨의 생각도, 노예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결과라기보다는 노예도 사람이라는 그런 소박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요컨대 사람이 사람을 짐승처럼 부리고 물건처럼 사고파는 제도는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노예해방을 위해 몸 바쳐 싸운 적극적인 노예폐지론자는 아니었고, 노예 소유주와 노예제를 인정하는 여러 주의 입장도 고려하면서 점진적으로 노예를 해방시켜가는 방법을 생각했다. 의원 시절이나 그후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링컨의 가장 큰 관심사는 사실 ‘노예해방’이 아니라 남북 분열의 위기에 있던 ‘연방의 수호’였다.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 연방을 수호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고, 노예를 해방해야 연방을 수호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으며, 또 일부 노예를 해방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어야 연방이 수호된다면 또 그렇게 하겠다.”

이렇게 말하던 링컨이 노예해방의 기수로 탈바꿈하기까지는 몇 가지 변수가 작용한다. 남부와 북부의 대립, 연방의 존속 여부와 노예해방 문제가 얽혀 남북전쟁으로 치달아간 상황 요인이 그 하나고, 전쟁중에 부분적이나마 노예해방선언이 이루어진 것이 그 둘이며, 또 링컨이 남북 분리주의자의 총탄에 암살당하면서 대의를 위해 죽은 순교자로 추앙받은 것도 일정한 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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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기서 노예해방이 선언될 당시의 미국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19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미국 내의 노예폐지론자와 흑인 노예들의 해방을 향한 싸움은 갈수록 불이 붙어갔다. 소규모 흑인 폭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형 집행과 도망 노예에 대한 비이성적인 재판이 사회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1852년에 발표된 스토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식자층 사이에 널리 읽히면서 노예해방의 대의에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노예해방운동의 선구자, 게리슨은 자신이 직접 쓰고 발간하는 신문 <해방자>에서 불같이 강렬한 논조를 편다.

“이 문제는 조용히 생각하고 말하고 쓰고 할 문제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자기 집에 불이 난 사람이 ‘불이야’ 하고 외치는데, 조용히 하라고 할 수 있는가? … 나는 진리처럼 냉혹하고 정의처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무관심은 말이 아니어서, 모든 동상이 받침대에서 뛰어내려와 망자들의 부활을 재촉할 정도다.”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남부 지도자들의 논리도 못지않게 강경했다. 요컨대 노예는 열등한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최고의 능력과 지식을 가진 인간, 즉 최고의 힘을 가진 인간이 열등한 인간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며 신의 섭리다. 동물들간에 약육강식이 성행하듯이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나는 노예제가 옳다고 생각한다… 일부 사회가 다른 사회의 노동으로 살 수 있지 않고서는 풍요로운 문명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결정권을 쥔 것은 경제문제였다. 당시 남부의 여러 주는 노예 노동을 근간으로 하는 면화나 담배 생산이 주산업인 데 반해서, 북부는 공업이 주산업이었고 농업도 노예 노동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자영농 위주였다. 제도상으로도 북부의 여러 주는 얼마 안 되던 흑인 노예에게 자유를 부여한 ‘자유 주’였고 남부는 법률로 노예제를 인정하는 ‘노예 주’였다.

19세기에 들어 북부의 여러 주가 유럽 이민을 대폭 받아들이면서 공업을 발전시키고 인구도 크게 늘어감에 따라, 연방의 주도권이 점차 남부에서 북부로 옮겨갔다. 위기의식을 느낀 남부의 지도자들 - 노예소유주들 - 은 프런티어의 확장에 따라 점점 늘어가던 서부의 준주準州들을 노예 주로 만들어 자기네 영향권하에 두고자 했으나, 북부라고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다. 결국 타협이 이루어져 북위 36.9도 이북의 준주는 자유 주, 이남의 준주는 노예주가 되었으나 그 경계선은 곧 유명무실해졌다.

1860년 노예폐지론자,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남부의 위기의식은 절정에 이른다. 1861년 남부의 여러 주는 마침내 ‘아메리카의 맹방’을 결성, 연방 탈퇴와 자치를 선언하고 북부에 맞서 총을 들었다. 남북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진퇴를 거듭하며 4년을 끌다가 1865년에 모든 면에서 우세한 북부의 승리로 끝난다.

남북전쟁은 사실, 노예해방을 위한 싸움이라기보다는 연방의 존속 여부와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이었으나, 모든 전쟁은 지고한 대의명분을 앞세우는 법, 북부군이 가장 즐겨 부른 노래는 백인으로서 흑인 노예들의 폭동을 이끌었던 존 브라운의 죽음을 기려 만든 곡이었다.

“존 브라운의 몸은 무덤 속에서 썩어가지만
그의 영혼은 계속 전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남북전쟁은 노예해방의 대의를 한껏 부풀렸고, 링컨은 1862년 9월 노예해방선언에 서명하면서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다.

“1863년 1월 1일을 기해, 연방에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킨 모든 주에 거주하는 모든 노예는 영원한 자유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선언이 법제화되면서 연방 내의 모든 주로 그 적용범위가 확대되고, 흑인 노예들은 마침내 사슬에서 풀려나 영원한 자유를 얻는다. 마침내 링컨의 소박한 꿈이 링컨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는 더 빨리 실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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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박한 꿈은 그만큼 배반당하기도 쉬운 법이다. 사슬에서 풀려난 흑인들은 이후 전보다 더 가혹한 노동조건으로 생존을 위한 싸움에 돌입해야 했고, 흑인들과 양심적인 일부 백인은 말로만 해방된 흑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길고도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리고 흑인 노예의 수입이 불법화된 뒤로, 나날이 팽창해가는 미국 자본주의의의 노동자 수요는 남부 유럽인,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인, 그리고 아시아인의 지속적인 유입으로 충당되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계 흑인과 중남미인과 아시아인이 일부 유럽계 백인과 함께 미국 사회의 저변에서 미국 자본주의의 광범한 노동시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링컨이 꿈꾸었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슴 한구석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소박한 꿈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노예해방 후 무려 150년이 다 돼가는 지금의 미국사회는 과연,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부리지 않고 만인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임에도 세계 최대의 빈부 격차를 보이는 사회, 70%는 남부럽지 않게 살고 30%는 버림받는 사회, 계급이 완전하게 분화되어 계급계층마다 삶의 방식 자체가 판이한 사회가 과연 미국 헌법에서 이야기하는 만민평등과 어떤 함수 관계가 있을까? 1년 전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당선되며 미국의 역사를 다시 쓰고 세계에 깊은 울림을 안겨다준 오바마는 과연 미국 사회를 신분과 계급과 부에 상관없이 만인이 평등한 사회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우리를 배반한다고 해서 뜻마저 저버릴 필요는 없다. 뜻이 살아 있는 한 희망을 잃지 않는 이들 가운데에서 그 뜻에 날개를 달아 하늘 높이 띄워올리는 이도 나타날 것이고, 그에 공감한 이들이 그 뜻을 이어받아 그 의미를 백배, 천배 확장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부리지 않는다는 것은 만인이 소망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의 가장 기초가 되는 이념이고, 그것은 링컨의 말마따나 ‘나는 노예도 되기 싫고 노예주도 되기 싫다’는 그런 소박한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공유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도 명명백백해 보이는 대의에 결사반대했고 지금도 사실상 반대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런 소박한 꿈이 그후의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철저하게 배반당해온 것이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심지어 ‘노예해방의 기수’로 불리는 링컨에게조차 그런 훌륭한 생각이 연방 수호라는 지상목표에 밀려 항상 뒷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꿈꾸는 것은 언제나 자유지만, 현실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그 내면의 힘의 메커니즘을 주목하고 그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갖추지 못하는 한 꿈의 실현은 언제나 요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