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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우리’ 하지 말고, ‘난 이제 글렀소.’ 하시오
- 아이소포스(B.C. 620?-564?)


이야기 하나.

한 사람이 강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가 한쪽 강둑에서 맞은편 강둑으로 가로질러 그물을 쳐놓고는 밧줄에 돌을 매달아 물을 마구 쳤다. 놀란 물고기가 방향을 잃고 그물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그것을 보고 깨끗한 식수를 흐려놓는다고 꾸짖었다. 고기 잡는 이가 말했다.
“강물을 이렇게 흐려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굶어죽어요.”

이야기 둘.

새 사냥꾼이 그물을 펼쳐놓고 길들인 비둘기를 그물에 매어놓았다. 그러고는 얼마쯤 떨어진 곳으로 가서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멧비둘기가 날아와서 그물에 걸렸다. 사냥꾼이 급히 달려와 멧비둘기를 잡아들자 멧비둘기가 길들인 비둘기를 꾸짖었다. 자기 친척이 덫을 향해 날아오는데 경고도 하지 않았다고. 길들인 비둘기가 말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친척의 감사를 받는 것보다 주인의 노여움을 피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네.”

이야기 셋.

도둑들이 집을 털려고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수탉 한 마리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수탉을 집어들고 나와 제물로 바치려 하자 수탉이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하루 일이 시작되는 새벽녘에 사람들을 깨워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유용한 봉사를 한다는 구실을 대었다. 그러자 도둑들이 말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넌 죽어야 해. 그들을 깨움으로써 넌 우리가 도둑질을 못하게 하거든.”

이야기 넷.

흙 단지와 쇠 단지가 있었다. 어느 날 쇠 단지가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흙 단지는 자기 몸이 너무 약해서 긴 여행은 못 하고 또 누가 조금만 건드리면 박살난다고 말했다. 쇠 단지가 걱정 말라면서 자기가 보살펴주겠노라고 했다.

두 단지는 친구가 되어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이 힘에 겨운 흙 단지는 쇠단지에 거의 기대다시피 하며 걸었고, 뭔가가 가까이 오면 쇠 단지한테 더 바싹 붙어섰다. 두 단지의 몸이 연신 부딪히면서 달그락거렸다. 얼마 못 가서 흙 단지의 온몸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드디어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야기 다섯.

사자와 나귀가 함께 사냥을 했다. 사자의 기운과 나귀의 빠른 발을 이용하니 금세 많은 짐승이 잡혔다. 사냥을 끝낸 후 사자가 짐승을 셋으로 나누고는 말했다.
"첫번째 것은 내가 갖겠다. 나는 모든 동물의 왕이니까. 두 번째 것은 너와 함께 일한 대등한 짝으로서 내가 갖겠다. 세 번째 것은, 으음, 지금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넌 큰 화를 입을 것이다.”

이야기 여섯.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는데, 도끼가 한 자루 땅에 떨어져 있었다. 먼저 본 사람이 도끼를 주워들고는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 횡재했소.”

다른 사람이 말했다.
“‘우리’라고 하지 말고, ‘난 횡재했소.’ 하시오.”

길을 계속 가는데, 도끼 임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도끼를 든 사람이 말했다.
“우린 이제 글렀소.”

다른 사람이 말했다.
“‘우리’ ‘우리’ 하지 말고, ‘난 이제 글렀소.’ 하시오. 아까 도끼를 주웠을 때 당신이 혼자 가지려고 했잖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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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리스인들의 삶의 지혜가 담겨 있는 <이솝 우화> 중에서 ‘입장의 차이’를 다룬 이야기를 모아본 것이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허투루 들리지 않고 피부에 와닿는 걸 보면, 강산이 수백 번 바뀌었어도 사람 사는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정말이지, 각자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세상과 사물은 판이하게 달라 보인다. 같은 강물을 고기잡이 터로 삼는 사람과 식수원으로 쓰는 사람이 강물을 바라보는 태도가 같을 리 없다. 주인에게 영혼을 판 대신 편안하게 먹이를 받아먹고 사는 집비둘기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대신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먹이를 구하는 멧비둘기의 입장이 같을 리 없다. 새벽녘에 사람들을 깨워주는 수탉은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는 농부에게는 귀중한 존재지만, 밤의 어둠을 틈타 남의 집을 털며 사는 도둑에게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판이하게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비록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다수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하는 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무리한 봉합은, 함께 여행을 떠나는 흙 단지와 쇠 단지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어느 한쪽의 파멸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자와 나귀의 사냥 이야기는 공동작업의 성과가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따라 배분됨을 갈파하고 있다. 강자와 약자의 결합에 평등이란 있을 수 없다. 지배와 피지배, 강압과 굴종만이 있을 뿐이다. 같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의 지혜, 즉 사냥물을 큰 무더기와 작은 무더기로 갈라놓고 사자더러 먼저 고르시라고 제안하는 것이 강자와 결합한 약자의 생존술이다. 그게 싫으면 저항하다가 죽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상종을 말아야 하고, 그도 아니면 힘을 기르거나 지혜를 모아 강자를 무력화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도끼 주운 이야기에서 보듯이, 강자나 기득권자는 자신의 이익을 감추고자 ‘우리’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우리’라는 말을 자꾸 듣다 보면, 우리 집 쌀독은 바닥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공연히 자기도 부자인 것 같거나 아니면 앞으로 부자가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야기 속의 동행자는 처음부터 그 함정을 갈파하고 있지만, 현실 속의 함정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아 많은 사람들을 미궁 속에 빠뜨린다. ‘노사협조’ '성장우선'이라는 말 속에 숨겨진 착취 합리화의 논리, '국민국가' ‘국민정당’이라는 이름 속에 숨겨진 계급지배 영속화의 논리, ‘보편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속에 교묘히 숨겨진 각종 차별구조의 정당화 논리를 포착해내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라는 울타리 속에서 어쨌거나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들은 저마다 단칼에 잘라내 버리기는 힘든 일면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그런 양면성까지도 적절히 배합, 이용해가면서 자신의 무자비하고 탐욕스런 발톱을 숨긴 채 유난히도 화합을 강조한다. 때린 자와 맞은 자가 화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때린 자의 진정한 사과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상식도 거부한 채 주문처럼 무조건 화합만 왼다. 그리하여 모두가 하나됨을 뜻하는 ‘화합’이라는 좋은 말이 강자의 지배를 은폐하고 정당화 하는 역겨운 말로 둔갑한다.

요즘 들어 더욱 인기를 끌고 있는 추리소설에서 그러한 은폐 논리를 깨는 한 가지 중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일례로 어떤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고 할 때, 명탐정들은 무엇보다도 그를 죽일만한 동기를 가진 사람이 누군가, 그 사람이 죽음으로써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군가에 초점을 맞춘다. 비비 꼬이고 마구 뒤얽힌 상황에서도, 대개의 경우 그것은 살인자를 추적하는 아주 유용한 척도로 작용한다.

뭉뚱그려져 하나로 보이는 것들, ‘우리’라는 테두리 속에 모호하게 감싸안아진 모든 것들은 일단 뜯어서 새겨볼 필요가 있다. 갈등과 대립의 요소가 너무도 많아 도저히 하나라고 할 수 없음에도 ‘우리’라는 이름으로 거짓 포장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는 허한 공존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강자의 이해관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 이전에 ‘나’와 ‘너’를 구분하고 그 관계를 밝히는 것은 화합을 이루기 위한 일차적인 토대다. ‘나’와 ‘너’의 차이를 인정 또는 인식하고 그 차이가 빚어내는 대립과 갈등의 소지를 없애려는 노력을 치열하게 계속해갈 때, 진정한 화합의 태양이 비로소 동산 위에 살며시 고개를 내밀 것이다.


● 이솝과 <이솝 우화>

이솝(아이소포스Aisopos의 영어 이름)은 <이솝 우화>라는 한 권의 책으로 세세에 그 이름을 전하고 있는 그리스의 유명한 우화작가다. 그의 생애는 불분명하여 여러 이야기가 분분하나, 가장 믿을 만한 헤로도토스의 설명에 따르면, 소아시아 사모스 섬 - 당시 그리스의 식민지였다 - 에 살던 이아드몬이라는 시민의 노예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해방된 것으로 추정되며, 델포이를 방문했다가 시민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전한다.

<이솝 우화>가 책으로 만들어진 것은 기원 전 300년경에 데메트리우스라는 이가 이솝이 만든 이야기들에다 당시 민간에 전해내려오던 우화, 인근 국가들에 구전되던 우화들을 한데 엮어 편찬한 것이 처음이라고 하는데, 이 책 역시 전하지 않는다. 그뒤로 라틴 어와 그리스 어로 여러 개의 우화집이 편찬되었고, 그것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계속 보완되어 지금은 여러 개의 판본이 있다.

요컨대, ‘이솝’이라는 이름이 우화의 대명사로 불리면서 이솝=우화라는 등식이 성립되었고, 이솝의 창작 여부를 떠나 그리스-로마 문화권의 많은 우화가 <이솝 우화>라는 이름 속에 흡수돼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솝 우화>의 대종은 역시 이솝 생존 당시의 소아시아를 무대로 한 것으로서, 당시의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솝 우화>의 가장 큰 장점은 삶에 대한 깊은 통찰에 있다. 짤막한 이야기 속에서 번득이는 기지로 세상살이를 이야기하고 삶의 지혜를 논하며 교훈을 전하는 것이다. 대체로 처세훈이 많지만, 강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족하라거나 신중한 처신으로 위기를 넘기라고 권고하면서 기발한 지혜를 짜내 적을 골탕먹이는 몇 가지 사례를 거론하는 데 그치는 여느 치세 책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냉혹한 현실세계의 다양한 측면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삶과 세상을 보는 눈을 담담하게 일깨워주는 것이다.

우화는 복잡다기한 인간의 삶을 단순화시켜 그 정수만으로 진리를 꿰뚫고, 지배자들의 현란한 궤변을 논파하면서 그 가면을 벗기는 데 유용하게 쓰여온 독특한 문학 형식이다. 그중에서도 삶의 다양한 모습들과 다양한 인간관계를 단 몇 줄의 글로 절묘하게 짚어내는 <이솝 우화>는 읽을 때마다 머리가 탁 트이는 듯한 상쾌감과 더불어 생각할 거리를 풍부하게 제공해준다.